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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해률×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리뷰 친밀하고도 낯선 우리들의 집합체

  • 장윤정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1-08-25
  • 조회수1922

리뷰

배해률×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친밀하고도 낯선 우리들의 집합체

장윤정 연극평론가

  •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한때, 성북구의 허름한 빌라를 세계적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가 구매했다니, 이 대책 없이 매력적인 설정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2009년 8월 9입 매입, 2012년 4월 27일 매각,’ 소유 기간이 무려 ‘993일’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는 그럴듯함을 더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렇게 <여기, 한때, 가가>는 판타지를 횡단하며 현실을 드러낸다.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으로 상연된 <여기, 한때, 가가>는 축제 참가작임을 잊게 할 만큼 볼륨이 큰 편이다. 공연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흔적이 남았을까. 서사부터 형식까지 다양한 담론의 장을 마련한 작품을 톺아보고자 한다.

곰팡이와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여기, 한때, 가가>는 한 허름한 빌라에 사는 인물들을 주목한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이 공간을 선택한 듯하지만 내밀한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회로부터 밀려나 이곳까지 내몰린 상황에 가깝다. 퀴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가정과 사회를 절연하고서 안전한 공간에 머무는 이들, 드랙퀸 공연을 하며 ‘스테파니’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인물,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시작된 위로의 관계가 연애로 발전되어 경제권 없이 집을 나와야 했던 인물, 가정폭력을 피해 사회로 도피하였으나 사회에서도 보호받지 못하여 스스로 거처를 마련해야 했던 미성년의 인물. 이 낯설지만 친밀한 얼굴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웃이 되어 한 건물에 공존한다. 이들을 연결 짓는 것은 각자의 방에서 피어나는 ‘핑크색 곰팡이’다. 작품은 곰팡이를 대하는 인물들의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각각의 성격과 사연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재호다.

아들이 퀴어임을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에게서 재호는 자신의 존재 부정을 경험한다. 집을 나와 자신만의 공간에서 곰팡이와 사투를 벌이는 재호의 행동 기저에는, 기본적인 권리 획득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옳은 건 옳은 거”라는 자기 신념의 바탕에는 팝가수 ‘레이디 가가’가 존재하는데, 재호에게 그녀는 절대적인 우상에 가깝다. 예컨대, 레이디 가가가 집주인이었다면 곰팡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무너지지 않을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재호의 판타지를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레이디 가가는 자기 철학이 뚜렷한 아티스트로 호명되곤 하는데, 사회를 향한 소신 있는 발언과 함께,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는 음악인이자 전위적인 퍼포머로 알려져 있다. <여기, 한때, 가가>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입체화한다. 요컨대, 재호가 믿는 그런 ‘절대적인 존재’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재호에게는 레이디 가가라면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작품은 이러한 믿음에 레이디 가가로부터 오지 않는 답장으로 응답한다. 재호의 판타지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재호에게 판타지는 사실보다 훨씬 강력하기에 절대적 존재의 결핍은 자신의 혹은 다른 이의 문제로 치환된다. 나아가 온전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규율로써 타자를 소외시키는 도착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재호는 자신의 권리 입증을 위해 주현을 내쫓음으로써, 자신이 당한 소외를 타인에게 재생산하는 역설을 일으키는 것이다. 작품은 이러한 재호를 통해 약자에게 흔히 부여되는 절대적 선량함을 타파한다. 약자 또한 얼마든지 타인을 타자화할 수 있음까지도 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다면적 성격의 인간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맞더라도 그만하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와 주현을 향한 뒤늦은 죄책감은 재호로 하여금 자신과 레이디 가가 및 핑크색 곰팡이를 등치시키게 한다. 핑크색 곰팡이에서 촉발된 재호의 환경변화 의지는 ‘퀴어로서의 존재’를 이해받는 것으로 발전된다. 이 지점은 각 인물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경석/스테파니의 경우 곰팡이보다 ‘핑크색 구두’를 주목한다. 핑크색 구두로 상징되는 경석/스테파니의 존재는 설명 불가능한, “그냥 된” 것이다. 레이디 가가의 풀네임에서 딴 ‘스테파니’라는 이름 또한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주체적 선택일 뿐이다. 그런 경석/스테파니에겐 지금 여기, 보단 더 나은 어딘가가 중요하기에 곰팡이는 간과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상적인 곳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우의 경우, 곰팡이보다 곰팡이를 확실히 제거하는 ‘락스’를 주목한다. 그녀는 과거의 한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퀴어라는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 드러난 것에 회의를 느끼는 인물이다. 여기와 다른 곳을 향해 떠날 것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공간과 관련된 기억 및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하나는 어디에나 곰팡이는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제야 홀로되어 자신의 존재를 탐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주현은 홀로의 삶에 성실했던 인물로서 열악한 입지로 인해 기본 권리조차 말할 수 없는, 극히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다. 작품에서 주현과 하나는 유일하게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서로에게서 자신을 투사하고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핑크색 곰팡이, 재호, 레이디 가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새삼 확인한다. 이 지점은 곰팡이와 인물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낯선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핑크색 곰팡이로써 존재의 이중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핑크색 곰팡이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서로 간의 소통 가능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전제 조건이다. 작품은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들의 존재 자체가 핑크색 곰팡이와 닮았음을 발견하게 만든다. 나아가 설명 불가능한, 타자인 동시에 주체일 수 있는, 온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이 ‘존재’임을 확인하게끔 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연극

연극은 극장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극장으로 들어서면 벽면 곳곳에 재호의 건의문이 붙어 있다. 이어 객석으로 이어지는 분장실 복도에는 레이디 가가 혹은 드랙퀸 공연을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놓여 있다. 이로써 관객은 객석에 앉기 전부터 연극적 약속을 경험하게 된다. 객석은 무대를 둘러싼 채 사방으로 설치되어 있고, 낭독극을 위한 보면대는 극장 내 다양한 위치에 놓여 있다. 대개 낭독극은 실연을 앞둔 과정단계로 통용된다. 그런데 <여기, 한때, 가가>는 ‘입체낭독극’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장르로서의 낭독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공연이 진행되면 배우들은 보면대를 다양한 위치에 놓으며 연기하고, 각 인물의 독백 장면에서는 그 인물을 상징하는 음향이 연출되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은 대본을 보지 않고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본을 보더라도 마치 서로 대화하듯 연기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러움이 연출되곤 했다.

<여기, 한때, 가가>에서는 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는 점 또한 주목된다. 하지성 배우는 재호 역을, 신강수 배우는 경석/스테파니 역을, 임지윤 배우는 지우 역을 맡았는데, 덕분에 작품을 여러 방면으로 접근하여 이해하게끔 했다. 그간 장애인 배우들이 장애와 관련하여 당사자성이 강한 작품에 주로 등장했다면, <여기, 한때, 가가>의 경우 사회적 약자인 퀴어를 장애인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관객에게 인물의 결을 다층적으로 감각하게 만들었다. 재호의 입체적인 성격에 퀴어와 장애를 동시에 가시화하니, 작품은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하게끔 한 것이다. 이제, 장애인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의의를 찾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장애인 배우’라는 정체성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자긍심은 분명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와 별개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면서 관객에게 자주 노출될수록 그를 ‘장애인 배우’로 인식하기보다는 ‘배우’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생김을 경험케 했다.

관객은 하지성 배우의 발화에 익숙해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극에 몰입했다. 재호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장애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신강수 배우는 다양한 작품에 등장하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온 배우로서, 경석/스테파니라는 인물은 그가 맡아왔던 인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임지윤 배우는 명징한 발음과 발성으로 관객의 주목을 끌며 극에 흥미를 더했다. 중요한 지점은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의 성격이 구체화되어 갈수록 배우의 장애 여부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관객의 신뢰를 얻을 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된다면 장애의 유무는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외에도 비장애인 배우인 이지민 배우와 백소정 배우 또한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각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각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는 작품에 완성도를 높이고 있었다.

<여기, 한때, 가가>는 배리어프리 형식까지 세심하게 고민해낸 작품이다. 작품에 참여한 수어 통역사들은 각각 특정한 인물들을 맡아 연기에 가까운 표정과 움직임으로 수어를 진행했다. 주목되는 지점은 재호라는 남성 인물을 여성 수어 통역사가, 지우라는 여성 인물을 남성 수어 통역사가 맡아 진행했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인물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인물과 수어 통역사의 성별을 동일하게 조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수어 통역사와 극중 인물의 성별을 교차시킨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작품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여 감각하게 되었다.

작품은 커튼콜까지 인상적으로 구성했다. 모든 배우와 수어 통역사가 무대에 앉은 채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장애인 배우의 눈높이에서 인사를 진행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객석에 앉은 관객과 같은 눈높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인사를 진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이 지점에서 강보름 연출의 모두를 위한 세심한 숙고의 자세를 가늠하게 된다. 강보름 연출 작업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에 가까운데, 이번 <여기, 한때, 가가>는 장애‧비장애 연극인들이 함께 작업하는 방법론을 구성해가는 과정처럼 읽힌다. 지난함에도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그 노고가 짐작된다. 강보름 연출의 작업이 소중한 것은, 작업 과정의 중요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연극으로서의 재미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관객으로서 그의 행보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여기, 한때, 가가>의 서사와 형식에서 관객은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퀴어이기도 하고, 장애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이기도 하고, 현실 속 결핍을 판타지로 메우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어쩌면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곰팡이처럼 우리 또한 지워질 수 없는 세상의 얼룩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작품은 되묻는다. 그렇게 허름한 빌라로 가득한 이 땅은 친밀하고도 낯선, 각각으로 함께 있는 이웃/우리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르겠다.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배해률×프로젝트 레디메이드|2021.7.29.~8.1.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출 강보름|출연 하지성, 신강수, 임지윤, 이지민, 백소정

배해률과 프로젝트 레디메이드가 협업하여 희곡 〈여기, 한때, 가가〉를 서로 다른 말과 몸을 통해 무대화한다. 프로덕션 내 각자가 가진 젠더, 계급, 연령, 장애 유무 등 여러 범주의 차이들을 인식하고 존중하며, 더 나아가 이 ‘다름’을 창작과정에 반영하고자 한다.

장윤정

연극비평집단 시선 소속 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다. 모든 창작물에는 나름의 미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공연에 대한 글을 쓴다. 사람과 글이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yjlife1@gmail.com

사진제공.프로젝트 레디메이드

2021년 9월 (23호)

상세내용

리뷰

배해률×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친밀하고도 낯선 우리들의 집합체

장윤정 연극평론가

  •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한때, 성북구의 허름한 빌라를 세계적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가 구매했다니, 이 대책 없이 매력적인 설정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2009년 8월 9입 매입, 2012년 4월 27일 매각,’ 소유 기간이 무려 ‘993일’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는 그럴듯함을 더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렇게 <여기, 한때, 가가>는 판타지를 횡단하며 현실을 드러낸다.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으로 상연된 <여기, 한때, 가가>는 축제 참가작임을 잊게 할 만큼 볼륨이 큰 편이다. 공연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흔적이 남았을까. 서사부터 형식까지 다양한 담론의 장을 마련한 작품을 톺아보고자 한다.

곰팡이와 존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여기, 한때, 가가>는 한 허름한 빌라에 사는 인물들을 주목한다.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이 공간을 선택한 듯하지만 내밀한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회로부터 밀려나 이곳까지 내몰린 상황에 가깝다. 퀴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가정과 사회를 절연하고서 안전한 공간에 머무는 이들, 드랙퀸 공연을 하며 ‘스테파니’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는 인물,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시작된 위로의 관계가 연애로 발전되어 경제권 없이 집을 나와야 했던 인물, 가정폭력을 피해 사회로 도피하였으나 사회에서도 보호받지 못하여 스스로 거처를 마련해야 했던 미성년의 인물. 이 낯설지만 친밀한 얼굴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웃이 되어 한 건물에 공존한다. 이들을 연결 짓는 것은 각자의 방에서 피어나는 ‘핑크색 곰팡이’다. 작품은 곰팡이를 대하는 인물들의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각각의 성격과 사연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재호다.

아들이 퀴어임을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에게서 재호는 자신의 존재 부정을 경험한다. 집을 나와 자신만의 공간에서 곰팡이와 사투를 벌이는 재호의 행동 기저에는, 기본적인 권리 획득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옳은 건 옳은 거”라는 자기 신념의 바탕에는 팝가수 ‘레이디 가가’가 존재하는데, 재호에게 그녀는 절대적인 우상에 가깝다. 예컨대, 레이디 가가가 집주인이었다면 곰팡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무너지지 않을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재호의 판타지를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레이디 가가는 자기 철학이 뚜렷한 아티스트로 호명되곤 하는데, 사회를 향한 소신 있는 발언과 함께,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는 음악인이자 전위적인 퍼포머로 알려져 있다. <여기, 한때, 가가>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입체화한다. 요컨대, 재호가 믿는 그런 ‘절대적인 존재’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재호에게는 레이디 가가라면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작품은 이러한 믿음에 레이디 가가로부터 오지 않는 답장으로 응답한다. 재호의 판타지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재호에게 판타지는 사실보다 훨씬 강력하기에 절대적 존재의 결핍은 자신의 혹은 다른 이의 문제로 치환된다. 나아가 온전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규율로써 타자를 소외시키는 도착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재호는 자신의 권리 입증을 위해 주현을 내쫓음으로써, 자신이 당한 소외를 타인에게 재생산하는 역설을 일으키는 것이다. 작품은 이러한 재호를 통해 약자에게 흔히 부여되는 절대적 선량함을 타파한다. 약자 또한 얼마든지 타인을 타자화할 수 있음까지도 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다면적 성격의 인간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맞더라도 그만하는 것을 권장하는 사회와 주현을 향한 뒤늦은 죄책감은 재호로 하여금 자신과 레이디 가가 및 핑크색 곰팡이를 등치시키게 한다. 핑크색 곰팡이에서 촉발된 재호의 환경변화 의지는 ‘퀴어로서의 존재’를 이해받는 것으로 발전된다. 이 지점은 각 인물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경석/스테파니의 경우 곰팡이보다 ‘핑크색 구두’를 주목한다. 핑크색 구두로 상징되는 경석/스테파니의 존재는 설명 불가능한, “그냥 된” 것이다. 레이디 가가의 풀네임에서 딴 ‘스테파니’라는 이름 또한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주체적 선택일 뿐이다. 그런 경석/스테파니에겐 지금 여기, 보단 더 나은 어딘가가 중요하기에 곰팡이는 간과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상적인 곳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우의 경우, 곰팡이보다 곰팡이를 확실히 제거하는 ‘락스’를 주목한다. 그녀는 과거의 한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퀴어라는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 드러난 것에 회의를 느끼는 인물이다. 여기와 다른 곳을 향해 떠날 것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공간과 관련된 기억 및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하나는 어디에나 곰팡이는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제야 홀로되어 자신의 존재를 탐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주현은 홀로의 삶에 성실했던 인물로서 열악한 입지로 인해 기본 권리조차 말할 수 없는, 극히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다. 작품에서 주현과 하나는 유일하게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서로에게서 자신을 투사하고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핑크색 곰팡이, 재호, 레이디 가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새삼 확인한다. 이 지점은 곰팡이와 인물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낯선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핑크색 곰팡이로써 존재의 이중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핑크색 곰팡이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서로 간의 소통 가능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전제 조건이다. 작품은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들의 존재 자체가 핑크색 곰팡이와 닮았음을 발견하게 만든다. 나아가 설명 불가능한, 타자인 동시에 주체일 수 있는, 온전히 제거될 수 없는 것이 ‘존재’임을 확인하게끔 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연극

연극은 극장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극장으로 들어서면 벽면 곳곳에 재호의 건의문이 붙어 있다. 이어 객석으로 이어지는 분장실 복도에는 레이디 가가 혹은 드랙퀸 공연을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놓여 있다. 이로써 관객은 객석에 앉기 전부터 연극적 약속을 경험하게 된다. 객석은 무대를 둘러싼 채 사방으로 설치되어 있고, 낭독극을 위한 보면대는 극장 내 다양한 위치에 놓여 있다. 대개 낭독극은 실연을 앞둔 과정단계로 통용된다. 그런데 <여기, 한때, 가가>는 ‘입체낭독극’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 장르로서의 낭독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공연이 진행되면 배우들은 보면대를 다양한 위치에 놓으며 연기하고, 각 인물의 독백 장면에서는 그 인물을 상징하는 음향이 연출되었다. 무엇보다 배우들은 대본을 보지 않고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본을 보더라도 마치 서로 대화하듯 연기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러움이 연출되곤 했다.

<여기, 한때, 가가>에서는 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는 점 또한 주목된다. 하지성 배우는 재호 역을, 신강수 배우는 경석/스테파니 역을, 임지윤 배우는 지우 역을 맡았는데, 덕분에 작품을 여러 방면으로 접근하여 이해하게끔 했다. 그간 장애인 배우들이 장애와 관련하여 당사자성이 강한 작품에 주로 등장했다면, <여기, 한때, 가가>의 경우 사회적 약자인 퀴어를 장애인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관객에게 인물의 결을 다층적으로 감각하게 만들었다. 재호의 입체적인 성격에 퀴어와 장애를 동시에 가시화하니, 작품은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하게끔 한 것이다. 이제, 장애인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의의를 찾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장애인 배우’라는 정체성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자긍심은 분명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와 별개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면서 관객에게 자주 노출될수록 그를 ‘장애인 배우’로 인식하기보다는 ‘배우’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생김을 경험케 했다.

관객은 하지성 배우의 발화에 익숙해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극에 몰입했다. 재호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장애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신강수 배우는 다양한 작품에 등장하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온 배우로서, 경석/스테파니라는 인물은 그가 맡아왔던 인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임지윤 배우는 명징한 발음과 발성으로 관객의 주목을 끌며 극에 흥미를 더했다. 중요한 지점은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의 성격이 구체화되어 갈수록 배우의 장애 여부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은 관객의 신뢰를 얻을 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된다면 장애의 유무는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외에도 비장애인 배우인 이지민 배우와 백소정 배우 또한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각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각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는 작품에 완성도를 높이고 있었다.

<여기, 한때, 가가>는 배리어프리 형식까지 세심하게 고민해낸 작품이다. 작품에 참여한 수어 통역사들은 각각 특정한 인물들을 맡아 연기에 가까운 표정과 움직임으로 수어를 진행했다. 주목되는 지점은 재호라는 남성 인물을 여성 수어 통역사가, 지우라는 여성 인물을 남성 수어 통역사가 맡아 진행했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인물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인물과 수어 통역사의 성별을 동일하게 조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수어 통역사와 극중 인물의 성별을 교차시킨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작품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여 감각하게 되었다.

작품은 커튼콜까지 인상적으로 구성했다. 모든 배우와 수어 통역사가 무대에 앉은 채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장애인 배우의 눈높이에서 인사를 진행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객석에 앉은 관객과 같은 눈높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인사를 진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이 지점에서 강보름 연출의 모두를 위한 세심한 숙고의 자세를 가늠하게 된다. 강보름 연출 작업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에 가까운데, 이번 <여기, 한때, 가가>는 장애‧비장애 연극인들이 함께 작업하는 방법론을 구성해가는 과정처럼 읽힌다. 지난함에도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그 노고가 짐작된다. 강보름 연출의 작업이 소중한 것은, 작업 과정의 중요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연극으로서의 재미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관객으로서 그의 행보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여기, 한때, 가가>의 서사와 형식에서 관객은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퀴어이기도 하고, 장애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이기도 하고, 현실 속 결핍을 판타지로 메우는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어쩌면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곰팡이처럼 우리 또한 지워질 수 없는 세상의 얼룩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작품은 되묻는다. 그렇게 허름한 빌라로 가득한 이 땅은 친밀하고도 낯선, 각각으로 함께 있는 이웃/우리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르겠다.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입체낭독극 <여기, 한때, 가가>

배해률×프로젝트 레디메이드|2021.7.29.~8.1.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출 강보름|출연 하지성, 신강수, 임지윤, 이지민, 백소정

배해률과 프로젝트 레디메이드가 협업하여 희곡 〈여기, 한때, 가가〉를 서로 다른 말과 몸을 통해 무대화한다. 프로덕션 내 각자가 가진 젠더, 계급, 연령, 장애 유무 등 여러 범주의 차이들을 인식하고 존중하며, 더 나아가 이 ‘다름’을 창작과정에 반영하고자 한다.

장윤정

연극비평집단 시선 소속 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다. 모든 창작물에는 나름의 미덕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공연에 대한 글을 쓴다. 사람과 글이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yjlife1@gmail.com

사진제공.프로젝트 레디메이드

2021년 9월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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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