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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을 질문하는 신경다양성

이슈 편협과 두려움을 탈주하는 기억

  •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 등록일 2021-08-25
  • 조회수1502

이슈

정상성을 질문하는 신경다양성

편협과 두려움을 탈주하는 기억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차별의 시대를 불태워라.” 이것은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공식 슬로건이었다. 명백히 일차적으로는 성소수자의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슬로건을 두고 나는 ‘치매인’, 특히 ‘치매를 갖고 사는 노년여성’을 떠올렸다.(주1) ‘시대’라는 말 때문이었을 거다. 점점 더 늘어나는 고령자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는 치매인을 의미하고,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할 중요한 시대적 현상이 되고 있다. 남성보다 여성의 기대수명이 더 긴 현실에서 치매에 걸린 노년여성은 노년 중에서도 가장 ‘장애’가 심하고, 그에 따라 가장 불편하고 왜곡된 삶을 살 확률이 높은 소수자다.

‘두려울까 봐 두려운’ 차별의 관점

치매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종종 잊어버리고, 또 자신의 움직임과 욕구, 위생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고 간주된다. 이들은 바깥 활동을 할 수 없고,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점점 더 ‘비가시적으로 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회도 시민도 이들이 보이지 않을수록 다행으로 여긴다. 이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나도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질문이라면 거듭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며, 치명적인 두려움일수록 제대로 직면해야 잡아먹히지 않는다. 많은 경우 두려움은, ‘두려울까 봐 두려운’이라는 비밀스런 구조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직면하지 않을 때 두려움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검은 덩어리가 되고, 이 덩어리는 점점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그러나 직면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양파껍질 까듯 그 실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해결책이 나타나기도 한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의 내용을 물어봤을 때 사람들은, 우선 자신과 관련해서 “통제가 안 된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내게 일어난다” “내 인생이 폭력적으로 도둑질당한다” “의미 없는 실존을 살게 된다” “자유와 인격을 박탈당한다” “구경거리가 되고, 인권침해를 당해도 모른다” 등의 말을 한다. 타인과 관련해서 주로 언급되는 것은 “남들에게, 특히 나를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고통을 준다.”이다.(주2) 이 모든 두려움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서 기원하며, 관계의 지속-불가능성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을 훼손 없이 현재로 불러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한다(remember)는 것은 무엇보다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re-member)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즉 이들이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이들이 파악하고 느끼는 방식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그 다름이 가리키는 방향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뇌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적절한 도움만 있다면, 이들에게도 ‘평범한 삶’이 가능하다. 두려움 너머에 엄연한 삶이, 이전의 삶을 잇는, 다르지만 의미 있는 삶이 전개된다. 이것은 물론 ‘치매인과 함께 살기’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상을 거스르는’ 신경다양성의 관점

치매인으로 그리고 치매인과 함께, 서로 즐겁고 서로 안전하며 서로 존엄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치매인과 비치매인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신경의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인지 형태나 과정을 ‘정상’으로 특권화하고, 조현병이나 자폐증, 인지장애증(치매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인지 형태나 과정은 ‘비정상’ 내지는 ‘열등한’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신경전형주의(neurotypicalism)를 거슬러 읽는 급진적 태도로 이끈다.(주3) 신경전형적 지능을 중심에 둔 삶의 가치나 인격 논의는 너무나 많은 삶을 비정상적이고 가치가 낮은, 의미가 비워진 존재라는 범주로 밀어낸다.

이러한 범주화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감각하기 위해서는 그저 ‘예민한 인권감수성’ 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과 인지,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가 필요하다. 도덕적 상호 존중이 가능한 사람의 조건이 왜 꼭 기호-문법적 기억에 초점을 맞춘 자기의식이나 언어능력, 자율성, 그리고 시간감각이어야 하는가. 근대 자유주의 개인 이해의 유산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관점은 편협하고 좁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만한 오류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이 편협한 오류와 부정의(injustice)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장애인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를 ‘연결된 것으로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이 폐쇄를 벗어날 수 있는 통찰 중의 하나를 발견한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다시 말해 이해관계/관심(interest) 속에 있으며 마음을 쓰고(care) 상처 입을 수 있는 생명체들이라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모두 다,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이한 뇌신경 상태와 그로 인한 상이한 인지 과정, 표현이 다양성의 형태로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치매에 걸린 사람은 더 이상 ‘뇌의 장애 때문에 인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신경다양성의 사회에서 치매인은 조현병 환자나 자폐증 환자, 또는 발달장애인과 공통의 경험으로 만난다.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는 이들에게는 그에 맞게 다른 방식의 상호의존 또는 상호돌봄의 선택지가 제공되어야 한다.

‘사라짐을 기억하는’ 예술의 관점

치매인이 ‘사라지는 기호-문법적 기억’ 현상에도 어떻게 시간의 삶, 소통가능한 관계적 삶을 이어가는지, 예술과 문화의 힘으로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삶의 텍스트이며 삶의 직물인 기억은 혼자만의 역작도 실패작도 아니다. 가담하고 있는 손들의 마음 씀이 협업하여 어떤 문양을 만들어나가는지, 그 문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신경다양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리는 일상도 다채로워지고 밝아질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과 냄새로 빛날 것이다.

사적인 돌봄의 차원에서 보자. 치매에 걸렸지만, 어머니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그 살아온 내력과 성격, 습관을 잘 아는 자식들이 그 앎을 바탕으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 이야기들은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 꿈, 환상, 지금의 현실이 기기묘묘하게 어울려 초현실주의적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위로를 품고 있는 목소리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치매인의 서사가 위치하고 있는 비선형적·비문법적 세계로 비치매인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그 세계 안에서 치매 어머니도, 함께 하는 이들도 강하고 따뜻한 ‘서로’의 의식을 감각한다.(주4)

좀 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도 문화예술 활동은 치매인의 ‘다른 인지와 감성’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사회적 소속감을 유지시킨다. 특히 선별된 음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춤-동작들은 잠재되어 있던 에로스의 감각을 일깨우기도 하고, 침묵 속에 잠겨있던 과거의 찬란했던 장면들을 다시 활짝 전개시키기도 한다.(주5) 또한 집단으로 진행되는 연극이나 글쓰기, 사진찍기, 그림 그리기 등 상상력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하기’는 신경다양성의 세계를 그야말로 다양하게 펼친다.(주6) (특히 중증) 치매인의 예술표현의 장이 더 많은 곳에서 더 창의적인 발상으로 마련되길 기대한다. 문화예술을 공동체적 소통의 실천으로, 상호인정의 비밀스런 경험으로 이해하는 문화예술인이라면 치매인과도 창의적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양한 시도, 실험을 기대한다.

주1: 치매는 어리석음을 강조한 용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인지장애증, 인지증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으며,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 또한 ‘치매를 갖고 사는 사람’, 인지증/인지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치매/치매인’을 둘러싼 불편한 담론을 환기시킨다는 의미에서 ‘치매/치매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주2: Anne Davis Basting, 『Forget Memory : Creating Better Lives for People with Dementia』,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9.

주3: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장한길 옮김, 오월의봄, 2020 참고.

주4: 전희식·김정임, 『엄마하고 나하고』, 한국농어민신문, 2010; 하윤재,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판미동, 2017; 정성기, 『나는 매일 엄마와 밥을 먹는다』, 헤이북스, 2016 등 참고.

주5: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얀 코리디앙, 다큐멘터리 <아흔 살 소녀 블랑슈>, 2016; 마이클 로사토베넷, 다큐멘터리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 2014 등 참고.

주6: Anne Davis Basting, 앞의 책.

김영옥

연구활동가.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노년과 질병, 아픈 몸과 돌봄 등을 여성주의 인권 관점에서 담론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흰머리 휘날리며-예순 이후 페미니즘』, 『이미지 페미니즘』, 『노년은 아름다워』, 『밀양을 살다』(공저),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 공존을 위한 다문화』(공저), 『발터 벤야민: 모더니티와 도시』(공저), 『새벽 세 시의 몸들』(공저) 등이 있다.
daimon32@hanmail.net

2021년 9월 (23호)

상세내용

이슈

정상성을 질문하는 신경다양성

편협과 두려움을 탈주하는 기억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차별의 시대를 불태워라.” 이것은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공식 슬로건이었다. 명백히 일차적으로는 성소수자의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슬로건을 두고 나는 ‘치매인’, 특히 ‘치매를 갖고 사는 노년여성’을 떠올렸다.(주1) ‘시대’라는 말 때문이었을 거다. 점점 더 늘어나는 고령자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는 치매인을 의미하고,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할 중요한 시대적 현상이 되고 있다. 남성보다 여성의 기대수명이 더 긴 현실에서 치매에 걸린 노년여성은 노년 중에서도 가장 ‘장애’가 심하고, 그에 따라 가장 불편하고 왜곡된 삶을 살 확률이 높은 소수자다.

‘두려울까 봐 두려운’ 차별의 관점

치매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종종 잊어버리고, 또 자신의 움직임과 욕구, 위생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에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고 간주된다. 이들은 바깥 활동을 할 수 없고,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점점 더 ‘비가시적으로 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회도 시민도 이들이 보이지 않을수록 다행으로 여긴다. 이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나도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질문이라면 거듭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며, 치명적인 두려움일수록 제대로 직면해야 잡아먹히지 않는다. 많은 경우 두려움은, ‘두려울까 봐 두려운’이라는 비밀스런 구조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직면하지 않을 때 두려움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검은 덩어리가 되고, 이 덩어리는 점점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그러나 직면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양파껍질 까듯 그 실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해결책이 나타나기도 한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의 내용을 물어봤을 때 사람들은, 우선 자신과 관련해서 “통제가 안 된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내게 일어난다” “내 인생이 폭력적으로 도둑질당한다” “의미 없는 실존을 살게 된다” “자유와 인격을 박탈당한다” “구경거리가 되고, 인권침해를 당해도 모른다” 등의 말을 한다. 타인과 관련해서 주로 언급되는 것은 “남들에게, 특히 나를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고통을 준다.”이다.(주2) 이 모든 두려움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서 기원하며, 관계의 지속-불가능성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을 훼손 없이 현재로 불러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억한다(remember)는 것은 무엇보다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re-member)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즉 이들이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이들이 파악하고 느끼는 방식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그 다름이 가리키는 방향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뇌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와 적절한 도움만 있다면, 이들에게도 ‘평범한 삶’이 가능하다. 두려움 너머에 엄연한 삶이, 이전의 삶을 잇는, 다르지만 의미 있는 삶이 전개된다. 이것은 물론 ‘치매인과 함께 살기’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상을 거스르는’ 신경다양성의 관점

치매인으로 그리고 치매인과 함께, 서로 즐겁고 서로 안전하며 서로 존엄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치매인과 비치매인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신경의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인지 형태나 과정을 ‘정상’으로 특권화하고, 조현병이나 자폐증, 인지장애증(치매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인지 형태나 과정은 ‘비정상’ 내지는 ‘열등한’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신경전형주의(neurotypicalism)를 거슬러 읽는 급진적 태도로 이끈다.(주3) 신경전형적 지능을 중심에 둔 삶의 가치나 인격 논의는 너무나 많은 삶을 비정상적이고 가치가 낮은, 의미가 비워진 존재라는 범주로 밀어낸다.

이러한 범주화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감각하기 위해서는 그저 ‘예민한 인권감수성’ 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과 인지,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가 필요하다. 도덕적 상호 존중이 가능한 사람의 조건이 왜 꼭 기호-문법적 기억에 초점을 맞춘 자기의식이나 언어능력, 자율성, 그리고 시간감각이어야 하는가. 근대 자유주의 개인 이해의 유산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관점은 편협하고 좁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만한 오류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이 편협한 오류와 부정의(injustice)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장애인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를 ‘연결된 것으로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이 폐쇄를 벗어날 수 있는 통찰 중의 하나를 발견한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있는, 다시 말해 이해관계/관심(interest) 속에 있으며 마음을 쓰고(care) 상처 입을 수 있는 생명체들이라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모두 다,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이한 뇌신경 상태와 그로 인한 상이한 인지 과정, 표현이 다양성의 형태로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치매에 걸린 사람은 더 이상 ‘뇌의 장애 때문에 인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신경다양성의 사회에서 치매인은 조현병 환자나 자폐증 환자, 또는 발달장애인과 공통의 경험으로 만난다.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는 이들에게는 그에 맞게 다른 방식의 상호의존 또는 상호돌봄의 선택지가 제공되어야 한다.

‘사라짐을 기억하는’ 예술의 관점

치매인이 ‘사라지는 기호-문법적 기억’ 현상에도 어떻게 시간의 삶, 소통가능한 관계적 삶을 이어가는지, 예술과 문화의 힘으로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삶의 텍스트이며 삶의 직물인 기억은 혼자만의 역작도 실패작도 아니다. 가담하고 있는 손들의 마음 씀이 협업하여 어떤 문양을 만들어나가는지, 그 문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신경다양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리는 일상도 다채로워지고 밝아질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과 냄새로 빛날 것이다.

사적인 돌봄의 차원에서 보자. 치매에 걸렸지만, 어머니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그 살아온 내력과 성격, 습관을 잘 아는 자식들이 그 앎을 바탕으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 이야기들은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 꿈, 환상, 지금의 현실이 기기묘묘하게 어울려 초현실주의적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위로를 품고 있는 목소리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치매인의 서사가 위치하고 있는 비선형적·비문법적 세계로 비치매인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그 세계 안에서 치매 어머니도, 함께 하는 이들도 강하고 따뜻한 ‘서로’의 의식을 감각한다.(주4)

좀 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도 문화예술 활동은 치매인의 ‘다른 인지와 감성’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사회적 소속감을 유지시킨다. 특히 선별된 음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춤-동작들은 잠재되어 있던 에로스의 감각을 일깨우기도 하고, 침묵 속에 잠겨있던 과거의 찬란했던 장면들을 다시 활짝 전개시키기도 한다.(주5) 또한 집단으로 진행되는 연극이나 글쓰기, 사진찍기, 그림 그리기 등 상상력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하기’는 신경다양성의 세계를 그야말로 다양하게 펼친다.(주6) (특히 중증) 치매인의 예술표현의 장이 더 많은 곳에서 더 창의적인 발상으로 마련되길 기대한다. 문화예술을 공동체적 소통의 실천으로, 상호인정의 비밀스런 경험으로 이해하는 문화예술인이라면 치매인과도 창의적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양한 시도, 실험을 기대한다.

주1: 치매는 어리석음을 강조한 용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인지장애증, 인지증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으며,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 또한 ‘치매를 갖고 사는 사람’, 인지증/인지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치매/치매인’을 둘러싼 불편한 담론을 환기시킨다는 의미에서 ‘치매/치매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주2: Anne Davis Basting, 『Forget Memory : Creating Better Lives for People with Dementia』,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9.

주3: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장한길 옮김, 오월의봄, 2020 참고.

주4: 전희식·김정임, 『엄마하고 나하고』, 한국농어민신문, 2010; 하윤재,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판미동, 2017; 정성기, 『나는 매일 엄마와 밥을 먹는다』, 헤이북스, 2016 등 참고.

주5: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얀 코리디앙, 다큐멘터리 <아흔 살 소녀 블랑슈>, 2016; 마이클 로사토베넷, 다큐멘터리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 2014 등 참고.

주6: Anne Davis Basting, 앞의 책.

김영옥

연구활동가.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노년과 질병, 아픈 몸과 돌봄 등을 여성주의 인권 관점에서 담론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흰머리 휘날리며-예순 이후 페미니즘』, 『이미지 페미니즘』, 『노년은 아름다워』, 『밀양을 살다』(공저),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 공존을 위한 다문화』(공저), 『발터 벤야민: 모더니티와 도시』(공저), 『새벽 세 시의 몸들』(공저) 등이 있다.
daimon32@hanmail.net

2021년 9월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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