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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장애 사이

이슈 몸을 둘러싼 갈등과 현실

  •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
  • 등록일 2021-08-25
  • 조회수1667

이슈

정상성을 질문하는 몸과 예술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움콘

“장애인은 환자가 아니다.”
흔히 ‘장애인 자립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백인 남성이자 지체장애인 에드워드 로버트(1939-1995)의 말이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장애계 그리고 장애학에서는 환자와 장애인을 구분해왔다. 환자는 치료될 수 있는 일시적 정체성이거나, 죽음으로 종료되는 상태라고 말해졌다. 반면 장애는 치료로 변화될 수 없으며, 지속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실제 한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오랫동안 매년 심사 때마다 등장하는 쟁점 중 하나는 질병과 장애에 관한 것이었다. 작품은 좋지만 ‘주제’가 장애가 아닌 질병이라 ‘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기는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내용과 만듦새가 좋지만 뚜렛증후군이나 강박증 같은 질병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탈락하기도 했었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서 2006년부터 2020년까지 심사위원이었는데, 이 주장은 큰 힘이 있었고, 나 또한 과거 오랫동안 동의했었다. 특히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을 해온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인 심사위원들은 ‘환자’와 거리를 두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타당한 맥락이 존재한다. 장애인은 오랫동안 ‘재활’의 대상으로 ‘의료권력’ 아래 놓여야 했다. 의료는 ‘장애인의 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어떻게든 그 몸을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장애인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장애의 의료적 모델에 맞서는 것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다. 문제는 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라고 주장해 왔고 이것이 바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기본 바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장애인의 몸을 의료적으로 치료해서 어떻게든 계단을 걷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장애의 의료적 모델이라면, 경사로가 없는 환경이 장애인의 몸을 ‘문제’로 만든다는 게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은 환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장애인권운동에서 매우 중요했다. 덕분에 의료권력의 통제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사회가 장애인의 몸을 ‘문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를 ‘수선’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다변화 그리고 의학의 발전과 발전방향 등으로 여러 변동 지점이 발생했다. 완전히 치료되지도 죽음으로 종료되지도 않으며, 평생을 만성적으로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됐다. 이들은 장애와 비장애 혹은 장애인과 환자 사이를 교차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2019년 “질병과 장애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대담을 기획해서 진행한 적 있었는데, 여러 비판을 만났다. 이미 「장애인 차별 금지법」 등에서 장애를 넓게 포섭하고 있는데, 질병과 장애의 경계를 질문하는 것은 너무 낡은 기획이며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을 들은 정신장애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나에게, 강박증이나 기면증 같은 정서적 질병은 장애로 인정받고자 요구하지만 여러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고 울먹였다. 그는 앞선 발언을 한 사람은 지체장애인 중심 운동만을 해온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정신장애인은 장애 영역에서도 소외되어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비판을 해온 이는 장애인자립생활운동 1세대라 할만한 활동가였는데, 그는 원칙적으로 질병과 장애의 경계가 흐려져야 한다면서도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사회가 제법 변화하고 장애인권이 주목받는 것 같지만, 여전히 가족에게 재활을 강요당하고 장애인의 몸을 부정당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다소 뻔한 이야기지만,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누구를 왜 장애인으로 혹은 환자로 규정하려고 했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 근대국가 건설, 생산적인 몸의 선별, 시설과 공장으로 갈 사람의 구분에 대한 재사유다. 또 하나 주지하다시피, 장애와 질병은 유동적인 범주다. 2021년 4월 보건복지부는 장애로 범위를 확대했고 ‘투렛장애’, ‘강박장애’, ‘기면증’ 등이 정신장애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라고 불리던 이들이 ‘장애인 등록증’을 갖게 된 것이다. 장애와 질병은 절대적 범주가 아니라, 그 사회적 역동 안에서 결정된다. 지금 사회에 필요한 것은 질병이냐 장애냐 하는 구분이라기보다, 어떤 특질을 가진 몸이든 간에 “한 명의 시민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지원과 변화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복합장애를 갖게 되었는데,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때마다 편리함을 자주 말씀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멸시한다. 나는 이게 비단 나의 아버지만의 문제라고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환자’는 장애인 복지혜택을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거부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 ‘환자’ 개인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장애인 혐오가 그들에게도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예술의 역할 중 하나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며, 현실을 재-경험, 재-해석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중시한다. 누가 장애인이고 환자인가 하는 경계가 왜 형성되었는지,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갈등을 예술 작품에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장애인 복지혜택은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원하지 않는 편협한 시민이 아니라, 장애인 차별을 내면화시키는 사회와 그 안에서 생존을 위해 장애인 등록을 ‘갈구’하게 되는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있다. 그리고 건강 중심 사회에서 끝없이 자기 몸의 어려움을 설명해야 하는 만성적으로 아픈 몸들이 그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장애인 복지는 없어도 되니까 장애인이라는 ‘증서’만 있으면 된다고 열망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장애인권’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던 시절에 비하면 최근 장애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고 장애 관련 책이 상당히 많이 출간되는 현상이 개인적으로 매우 놀랍다. 이제 예술 작품에서 장애인권의 당위보다 그를 둘러싼 여러 갈등과 현실을 보고 싶다. 당위로 쌓아 올린 인권보다 갈등과 충돌을 면밀히 고민하며 쌓아 올린 인권의 탑이 더 견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른몸들, 2020

  • 질병과 질환은 구분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는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 구분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질병으로 통합해서 쓴다.
  • 질병과 장애 사이의 보다 구체적 갈등과 긴장은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질병과 장애 사이”(조한진희, 동녘, 2019)
  • “장애와 질병은 구분되어야 할까?”([일다], 2018.4.1.) 기사 바로가기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 여성·평화·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다큐인에서 장애, 빈곤, 여성 관련 다큐를 만들었었고,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쓰고, 동명의 시민연극을 기획했다.
iingmodo@gmail.com

사진제공.필자

2021년 9월 (23호)

상세내용

이슈

정상성을 질문하는 몸과 예술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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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환자가 아니다.”
흔히 ‘장애인 자립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백인 남성이자 지체장애인 에드워드 로버트(1939-1995)의 말이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장애계 그리고 장애학에서는 환자와 장애인을 구분해왔다. 환자는 치료될 수 있는 일시적 정체성이거나, 죽음으로 종료되는 상태라고 말해졌다. 반면 장애는 치료로 변화될 수 없으며, 지속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실제 한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오랫동안 매년 심사 때마다 등장하는 쟁점 중 하나는 질병과 장애에 관한 것이었다. 작품은 좋지만 ‘주제’가 장애가 아닌 질병이라 ‘우리’ 영화제에서 상영하기는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내용과 만듦새가 좋지만 뚜렛증후군이나 강박증 같은 질병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탈락하기도 했었다. 나는 해당 영화제에서 2006년부터 2020년까지 심사위원이었는데, 이 주장은 큰 힘이 있었고, 나 또한 과거 오랫동안 동의했었다. 특히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을 해온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인 심사위원들은 ‘환자’와 거리를 두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타당한 맥락이 존재한다. 장애인은 오랫동안 ‘재활’의 대상으로 ‘의료권력’ 아래 놓여야 했다. 의료는 ‘장애인의 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어떻게든 그 몸을 비장애인의 몸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장애인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장애의 의료적 모델에 맞서는 것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다. 문제는 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라고 주장해 왔고 이것이 바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기본 바탕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장애인의 몸을 의료적으로 치료해서 어떻게든 계단을 걷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장애의 의료적 모델이라면, 경사로가 없는 환경이 장애인의 몸을 ‘문제’로 만든다는 게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은 환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장애인권운동에서 매우 중요했다. 덕분에 의료권력의 통제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장애인 중심사회가 장애인의 몸을 ‘문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를 ‘수선’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다변화 그리고 의학의 발전과 발전방향 등으로 여러 변동 지점이 발생했다. 완전히 치료되지도 죽음으로 종료되지도 않으며, 평생을 만성적으로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됐다. 이들은 장애와 비장애 혹은 장애인과 환자 사이를 교차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2019년 “질병과 장애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대담을 기획해서 진행한 적 있었는데, 여러 비판을 만났다. 이미 「장애인 차별 금지법」 등에서 장애를 넓게 포섭하고 있는데, 질병과 장애의 경계를 질문하는 것은 너무 낡은 기획이며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을 들은 정신장애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나에게, 강박증이나 기면증 같은 정서적 질병은 장애로 인정받고자 요구하지만 여러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고 울먹였다. 그는 앞선 발언을 한 사람은 지체장애인 중심 운동만을 해온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정신장애인은 장애 영역에서도 소외되어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비판을 해온 이는 장애인자립생활운동 1세대라 할만한 활동가였는데, 그는 원칙적으로 질병과 장애의 경계가 흐려져야 한다면서도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사회가 제법 변화하고 장애인권이 주목받는 것 같지만, 여전히 가족에게 재활을 강요당하고 장애인의 몸을 부정당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다소 뻔한 이야기지만,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누구를 왜 장애인으로 혹은 환자로 규정하려고 했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 근대국가 건설, 생산적인 몸의 선별, 시설과 공장으로 갈 사람의 구분에 대한 재사유다. 또 하나 주지하다시피, 장애와 질병은 유동적인 범주다. 2021년 4월 보건복지부는 장애로 범위를 확대했고 ‘투렛장애’, ‘강박장애’, ‘기면증’ 등이 정신장애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라고 불리던 이들이 ‘장애인 등록증’을 갖게 된 것이다. 장애와 질병은 절대적 범주가 아니라, 그 사회적 역동 안에서 결정된다. 지금 사회에 필요한 것은 질병이냐 장애냐 하는 구분이라기보다, 어떤 특질을 가진 몸이든 간에 “한 명의 시민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지원과 변화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복합장애를 갖게 되었는데,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때마다 편리함을 자주 말씀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멸시한다. 나는 이게 비단 나의 아버지만의 문제라고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환자’는 장애인 복지혜택을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거부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 ‘환자’ 개인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장애인 혐오가 그들에게도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예술의 역할 중 하나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며, 현실을 재-경험, 재-해석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중시한다. 누가 장애인이고 환자인가 하는 경계가 왜 형성되었는지, 그 안에서 펼쳐지는 갈등을 예술 작품에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장애인 복지혜택은 원하지만 장애인이라는 낙인은 원하지 않는 편협한 시민이 아니라, 장애인 차별을 내면화시키는 사회와 그 안에서 생존을 위해 장애인 등록을 ‘갈구’하게 되는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있다. 그리고 건강 중심 사회에서 끝없이 자기 몸의 어려움을 설명해야 하는 만성적으로 아픈 몸들이 그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장애인 복지는 없어도 되니까 장애인이라는 ‘증서’만 있으면 된다고 열망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장애인권’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던 시절에 비하면 최근 장애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고 장애 관련 책이 상당히 많이 출간되는 현상이 개인적으로 매우 놀랍다. 이제 예술 작품에서 장애인권의 당위보다 그를 둘러싼 여러 갈등과 현실을 보고 싶다. 당위로 쌓아 올린 인권보다 갈등과 충돌을 면밀히 고민하며 쌓아 올린 인권의 탑이 더 견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른몸들, 2020

  • 질병과 질환은 구분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는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 구분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질병으로 통합해서 쓴다.
  • 질병과 장애 사이의 보다 구체적 갈등과 긴장은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질병과 장애 사이”(조한진희, 동녘, 2019)
  • “장애와 질병은 구분되어야 할까?”([일다], 2018.4.1.) 기사 바로가기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 여성·평화·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다큐인에서 장애, 빈곤, 여성 관련 다큐를 만들었었고,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쓰고, 동명의 시민연극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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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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