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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창작과 배리어프리③

이슈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 이연주 연극 작가·연출가
  • 등록일 2021-09-29
  • 조회수1591

이슈

예술창작과 배리어프리③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이연주 극단 벨이울린다 대표

2013년 극단 애인의 제작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재공연했다. 극장의 제안으로 소극장을 사용할 기회가 생겼고,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계단으로만 내려갈 수 있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단원들과 논의 끝에 불편하지만 극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전 공연의 관객은 다수가 지인이었다. 재공연을 준비하면서 ‘우리 공연을 누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포스터에 배우들의 모습이 잘 나온 공연 사진을 싣기로 했다. (당시에는 공연 포스터를 보고 예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극단 공연에 필요한 설명이 무엇일까? 장애인 극단 공연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설마 유명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로 착각하고 예약하는 관객은 없겠지?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여러 고민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장애를 극단의 정체성이자 개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사용한 용어가 ‘에이블 아트’였다. 에이블 아트는 장애 예술을 무능력이 아닌 가능성의 표현으로 정의하던 용어로, 당시 일본의 장애 예술운동이었다. 그렇게 공연 사진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에 에이블 아트의 정의를 넣었다. 그때 우리는 또 다른 관객을 만났을까? 우리의 공연은 누구에게 접근하게 됐을까?

극단 애인 <고도를 기다리며> 포스터(2013)

접근하다 1. 가까이 다가가다 2.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다

약간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보자. 최근 공연계에서는 음성해설, 수어통역, 자막 표시가 ‘배리어프리’에 대한 정의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공연은 ‘배리어프리 공연’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거칠지만, 쉬운 접근을 위해 사용되는 설명일 것이다. 그럼 이때 발동되는 접근성은 누구를 위한 걸까? 접근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음성해설, 수어통역, 자막 표시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배리어프리 공연이란 무엇일까? 어떠한 장벽을 없애는 공연일까? 우리는 ‘배리어프리’라는 용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

배리어프리 운동의 의미를 떨어뜨리거나 관객을 위한 접근성이 고려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접근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는 공연단체가 많아지면서 실질적인 방안도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접근은 미학의 가능성과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늘 가능성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접근성에 대한 고려로 시작되었으나, 작품의 형식적 실험으로만 기능하는 경우도 종종 접하게 된다. 예술적 강박 없이도 접근성은 고려되어야 하며, 비장애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어야 할 무언가는 아니다.

구체적인 접근성을 위해서는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점검하는 것과 함께 질문이 개입할 여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벽은 무엇이며, 장벽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인가? 장벽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인가? 그렇다면 장벽을 없애는 주체는 누구인가? 또 다른 장벽은 없는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만남을 위한 구체적인 과정임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단단한 벽은 어떻게 고정되는가

장애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고 발견하려는 시도는 유의미하지만, 빠르게 발견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의미가 확장될 경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언어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의 용어로만 정의하기에 장애 예술은 너무나 다양하다. 창작, 예술교육, 시민예술, 예술운동 등 장애 예술 내에 각기 다른 분류로 나뉘기도 하고, 또는 각각의 분류 안에서 장애 예술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을 ‘포용적 예술’이란 단어로 묶을 수 있을까? ‘무장애 예술’은 어떠한가? 한계 없이, 장애 없이 장애 예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 예술은 가능성의 세계로만 이해되어야 하나?

장애 예술은 어떠한 정의를 통해 이해되고 발견되어야 하나? 그렇다면 장애는 단일하게 정의되고 있을까? 장애 예술에서 장애가 인식되지 않는 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장애 예술은 모두 다른 몸을 드러내는가? 비장애 예술에서는 다른 몸이 존재하지 않는가? 장애 예술의 속도는 느려야 하나? 빨라야 하나? 그것을 느리다고, 빠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인가? 쉽게 또는 어렵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해인가? 예술을 향유하는 감각은 이해로부터 출발하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일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에게 새로운 감각인가? 장애 예술은 발견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미학으로 발견되지 않는 장애 예술은 실패한 것인가? 미학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장애 예술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것인가?

다양한 경로로 이동하기

최근에 2013년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포스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유난히 ‘가능성의 예술’이란 표현이 걸렸다. 지금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가능성과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 극단 애인과 작업할 때, 장애 예술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가 구체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언어와 정의를 찾고 싶었고, 맘껏 움직여보고 시도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르다.

장벽은 존재한다. 장벽이 없을 거라고, 적어도 나에게는 장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장벽을 쉽게 지워버리지는 말자. 장벽을 인식하기도 하고, 장벽을 두드려 보고, 벽돌을 깨기도 하고, 장벽과 장벽 사이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그래서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이연주

극단 전화벨이 울린다 소속.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한다. 주요 연출작으로 <고도를 기다리며> <삼풍백화점> <이반검열> <전화벨이 올린다> <인정투쟁: 예술가편> 등이 있다.
thukushi97@hanmail.net

사진제공.필자

2021년 10월 (24호)

상세내용

이슈

예술창작과 배리어프리③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이연주 극단 벨이울린다 대표

2013년 극단 애인의 제작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재공연했다. 극장의 제안으로 소극장을 사용할 기회가 생겼고,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계단으로만 내려갈 수 있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단원들과 논의 끝에 불편하지만 극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전 공연의 관객은 다수가 지인이었다. 재공연을 준비하면서 ‘우리 공연을 누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포스터에 배우들의 모습이 잘 나온 공연 사진을 싣기로 했다. (당시에는 공연 포스터를 보고 예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 극단 공연에 필요한 설명이 무엇일까? 장애인 극단 공연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한가? 설마 유명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로 착각하고 예약하는 관객은 없겠지?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여러 고민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장애를 극단의 정체성이자 개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사용한 용어가 ‘에이블 아트’였다. 에이블 아트는 장애 예술을 무능력이 아닌 가능성의 표현으로 정의하던 용어로, 당시 일본의 장애 예술운동이었다. 그렇게 공연 사진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에 에이블 아트의 정의를 넣었다. 그때 우리는 또 다른 관객을 만났을까? 우리의 공연은 누구에게 접근하게 됐을까?

극단 애인 <고도를 기다리며> 포스터(2013)

접근하다 1. 가까이 다가가다 2.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다

약간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보자. 최근 공연계에서는 음성해설, 수어통역, 자막 표시가 ‘배리어프리’에 대한 정의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공연은 ‘배리어프리 공연’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거칠지만, 쉬운 접근을 위해 사용되는 설명일 것이다. 그럼 이때 발동되는 접근성은 누구를 위한 걸까? 접근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음성해설, 수어통역, 자막 표시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배리어프리 공연이란 무엇일까? 어떠한 장벽을 없애는 공연일까? 우리는 ‘배리어프리’라는 용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

배리어프리 운동의 의미를 떨어뜨리거나 관객을 위한 접근성이 고려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접근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는 공연단체가 많아지면서 실질적인 방안도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접근은 미학의 가능성과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늘 가능성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접근성에 대한 고려로 시작되었으나, 작품의 형식적 실험으로만 기능하는 경우도 종종 접하게 된다. 예술적 강박 없이도 접근성은 고려되어야 하며, 비장애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어야 할 무언가는 아니다.

구체적인 접근성을 위해서는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점검하는 것과 함께 질문이 개입할 여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벽은 무엇이며, 장벽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인가? 장벽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인가? 그렇다면 장벽을 없애는 주체는 누구인가? 또 다른 장벽은 없는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만남을 위한 구체적인 과정임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단단한 벽은 어떻게 고정되는가

장애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고 발견하려는 시도는 유의미하지만, 빠르게 발견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의미가 확장될 경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언어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의 용어로만 정의하기에 장애 예술은 너무나 다양하다. 창작, 예술교육, 시민예술, 예술운동 등 장애 예술 내에 각기 다른 분류로 나뉘기도 하고, 또는 각각의 분류 안에서 장애 예술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을 ‘포용적 예술’이란 단어로 묶을 수 있을까? ‘무장애 예술’은 어떠한가? 한계 없이, 장애 없이 장애 예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 예술은 가능성의 세계로만 이해되어야 하나?

장애 예술은 어떠한 정의를 통해 이해되고 발견되어야 하나? 그렇다면 장애는 단일하게 정의되고 있을까? 장애 예술에서 장애가 인식되지 않는 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장애 예술은 모두 다른 몸을 드러내는가? 비장애 예술에서는 다른 몸이 존재하지 않는가? 장애 예술의 속도는 느려야 하나? 빨라야 하나? 그것을 느리다고, 빠르다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인가? 쉽게 또는 어렵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해인가? 예술을 향유하는 감각은 이해로부터 출발하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일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에게 새로운 감각인가? 장애 예술은 발견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미학으로 발견되지 않는 장애 예술은 실패한 것인가? 미학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장애 예술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것인가?

다양한 경로로 이동하기

최근에 2013년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포스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유난히 ‘가능성의 예술’이란 표현이 걸렸다. 지금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가능성과 만나고 충돌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 극단 애인과 작업할 때, 장애 예술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가 구체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언어와 정의를 찾고 싶었고, 맘껏 움직여보고 시도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르다.

장벽은 존재한다. 장벽이 없을 거라고, 적어도 나에게는 장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장벽을 쉽게 지워버리지는 말자. 장벽을 인식하기도 하고, 장벽을 두드려 보고, 벽돌을 깨기도 하고, 장벽과 장벽 사이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그래서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이연주

극단 전화벨이 울린다 소속.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한다. 주요 연출작으로 <고도를 기다리며> <삼풍백화점> <이반검열> <전화벨이 올린다> <인정투쟁: 예술가편> 등이 있다.
thukushi97@hanmail.net

사진제공.필자

2021년 10월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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