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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내기와 재구성을 위한 힌트

이슈 장애인 문화예술 교육, 세 가지 편견을 넘어

  •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 등록일 2021-10-27
  • 조회수2015

이슈

인권을 노래하는 노들음악대

편견을 뜻하는 영어 단어 ‘prejudice’는 어원적으로 ‘사전(pre-) 판단(judgement)’ 내지 ‘선험적 판단’을 의미한다. 인간은 공간적·시간적·관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살아가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즉 어떤 면에서 인간에게 편견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중요한 건 편견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편견이 존재함을 아는 것, 그리고 소통과 배움을 통해 그러한 편견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문화예술 교육과 관련된 편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장애’, ‘문화예술’, ‘교육’ 각각에 대한 편견이 함께 결합되고 증폭되어 장애인-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첫째, 장애에 대한 편견이다. 장애는 실천/관행(practice)적으로나 담론적으로 보건복지 영역의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예컨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어 있으며 법무부가 담당 부처이지만,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를 소관 부처로 하는 법률이 되고 말았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역시 주로 건축물과 구조물의 편의시설을 다루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등과 관련된 법안이라는 이유로 소관 부처가 국토교통부가 아닌 보건복지부다. 장애 문제와 관련된 정책토론회에서 발제자나 토론자로 나서는 이들도 대부분 ‘보건’ 계열이나 ‘복지’ 계열의 학문을 전공한 이들이다. 이러한 편견의 힘이 구조적으로 작동하다 보니 장애인 문화예술 교육은 미술치료나 음악치료와 같은 이름하에 치료 활동으로 포섭되거나, 아니면 모종의 복지서비스로 간주되기도 한다. 장애를 지닌 ‘인간’을 위한 문화예술 활동이라는 본래적 의미는 뒤편으로 밀려나거나 삭제된 채 말이다.

둘째, 문화예술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는 한 사회를 정치적 영역, 경제적 영역, 문화적 영역으로 나누어 파악하곤 한다. 그렇게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 자체는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틀 속에서 문화예술이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것, 혹은 무관해야만 하는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순수 예술이라는 관념은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표상한다. 또한 노동은 필연(생물학적 필연성)의 영역이고 예술은 자유의 영역이라는 관념은 경제와 예술의 분리를 표상한다. 그러나 과연 문화예술이 정치 및 경제와 그렇게 분리될 수 있을까?

프랑스 정치철학자이자 미학자이기도 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공동체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활동은 치안(police)의 영역에 속하며, 정치(la politique)란 이러한 질서와 단절하여 그것을 재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치안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공권력이나 법체계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인 것의 나눔’(partage du sensible)(주1)이다. 그리고 정치란 치안을 근거 짓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른 종류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으로 대체함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릴 수 있게 하는’ 감성 혁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와 예술은 인간 공동체의 토대에서 이미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 노동을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기여하는 인간의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경제 활동인 노동과 문화예술 활동은 이분법적으로 구획되지 않는다. 실제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근로계약을 맺고 그 같은 문화예술 활동을 행하는 노동자로 존재한다. 또한 에티엔 발르바르(Étienne Balibar)의 통찰을 빌려오자면, 일정한 활동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인정되는 과정에서부터 경제와 정치와 문화(이데올로기)가 언제나 ‘복합적 전체’로서 함께 작동한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교육에 대한 편견이다.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주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기여자와 수혜자, 능동자와 수동자라는 위계적 구분의 편견과 흔히 마주하게 된다. 또한 가르치는 것은 일/노동이 될 수 있지만, 배우는 것은 오히려 소비/여가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교육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과연 그렇게 획일적으로 분할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러한 분할 속에서 진정한 배움과 교육이 가능할까? 그리고 배우는 자의 애씀과 노력과 에너지는 이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걸까?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오랜 노력이 작은 결실을 맺으면서, 작년 하반기부터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이 시작되었고 올해는 시범사업의 형태로나마 경기도로 확대되었다. 이 일자리는 최중증 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을 우선 대상으로 하며 최저시급을 지급하는데, 그 3대 직무 중 하나가 ‘문화예술 활동’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 20여 명도 이 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노들야학에서 이루어지는 댄스 활동, 음악대 활동, 미술 활동은 문화예술교육인 동시에 노동이고, 그들의 거리 공연과 작품 전시는 새로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형성해 내는 정치 활동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노들야학의 교사와 학생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라기보다는 협업 노동자라는 위상을 지닌다. 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활동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장애인-문화예술-교육을 틀지어 왔던 편견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재구성하기 위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주1: 여기서 불어 ‘partage’는 우리말의 ‘나눔’과 마찬가지로 ‘공유’와 ‘분할/분배’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남자다움/여자다움에 대한 감각은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자연스럽고 윤리적인 것으로 ‘공유’되어 있는 동시에, 남성은 남성적 감각[감성]을, 여성은 여성적 감각[감성]을 ‘분할/분배’받게 된다. 또한 이러한 감각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세계는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로 ‘분할’되고 그에 따른 자신의 몫과 역할이 ‘분배’된다.

김도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자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장애학 함께 읽기』 『장애학의 도전』 등의 책을 썼고, 『철학, 장애를 논하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phare7@naver.com

사진제공. 필자

2021년 11월 (25호)

상세내용

이슈

인권을 노래하는 노들음악대

편견을 뜻하는 영어 단어 ‘prejudice’는 어원적으로 ‘사전(pre-) 판단(judgement)’ 내지 ‘선험적 판단’을 의미한다. 인간은 공간적·시간적·관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살아가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즉 어떤 면에서 인간에게 편견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중요한 건 편견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편견이 존재함을 아는 것, 그리고 소통과 배움을 통해 그러한 편견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문화예술 교육과 관련된 편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장애’, ‘문화예술’, ‘교육’ 각각에 대한 편견이 함께 결합되고 증폭되어 장애인-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첫째, 장애에 대한 편견이다. 장애는 실천/관행(practice)적으로나 담론적으로 보건복지 영역의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예컨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어 있으며 법무부가 담당 부처이지만,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를 소관 부처로 하는 법률이 되고 말았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역시 주로 건축물과 구조물의 편의시설을 다루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등과 관련된 법안이라는 이유로 소관 부처가 국토교통부가 아닌 보건복지부다. 장애 문제와 관련된 정책토론회에서 발제자나 토론자로 나서는 이들도 대부분 ‘보건’ 계열이나 ‘복지’ 계열의 학문을 전공한 이들이다. 이러한 편견의 힘이 구조적으로 작동하다 보니 장애인 문화예술 교육은 미술치료나 음악치료와 같은 이름하에 치료 활동으로 포섭되거나, 아니면 모종의 복지서비스로 간주되기도 한다. 장애를 지닌 ‘인간’을 위한 문화예술 활동이라는 본래적 의미는 뒤편으로 밀려나거나 삭제된 채 말이다.

둘째, 문화예술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는 한 사회를 정치적 영역, 경제적 영역, 문화적 영역으로 나누어 파악하곤 한다. 그렇게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 자체는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틀 속에서 문화예술이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것, 혹은 무관해야만 하는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순수 예술이라는 관념은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표상한다. 또한 노동은 필연(생물학적 필연성)의 영역이고 예술은 자유의 영역이라는 관념은 경제와 예술의 분리를 표상한다. 그러나 과연 문화예술이 정치 및 경제와 그렇게 분리될 수 있을까?

프랑스 정치철학자이자 미학자이기도 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공동체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활동은 치안(police)의 영역에 속하며, 정치(la politique)란 이러한 질서와 단절하여 그것을 재구성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치안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공권력이나 법체계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인 것의 나눔’(partage du sensible)(주1)이다. 그리고 정치란 치안을 근거 짓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른 종류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으로 대체함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릴 수 있게 하는’ 감성 혁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와 예술은 인간 공동체의 토대에서 이미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 노동을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기여하는 인간의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경제 활동인 노동과 문화예술 활동은 이분법적으로 구획되지 않는다. 실제로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근로계약을 맺고 그 같은 문화예술 활동을 행하는 노동자로 존재한다. 또한 에티엔 발르바르(Étienne Balibar)의 통찰을 빌려오자면, 일정한 활동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인정되는 과정에서부터 경제와 정치와 문화(이데올로기)가 언제나 ‘복합적 전체’로서 함께 작동한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교육에 대한 편견이다.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주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기여자와 수혜자, 능동자와 수동자라는 위계적 구분의 편견과 흔히 마주하게 된다. 또한 가르치는 것은 일/노동이 될 수 있지만, 배우는 것은 오히려 소비/여가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교육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과연 그렇게 획일적으로 분할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러한 분할 속에서 진정한 배움과 교육이 가능할까? 그리고 배우는 자의 애씀과 노력과 에너지는 이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걸까?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오랜 노력이 작은 결실을 맺으면서, 작년 하반기부터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이 시작되었고 올해는 시범사업의 형태로나마 경기도로 확대되었다. 이 일자리는 최중증 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을 우선 대상으로 하며 최저시급을 지급하는데, 그 3대 직무 중 하나가 ‘문화예술 활동’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 20여 명도 이 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노들야학에서 이루어지는 댄스 활동, 음악대 활동, 미술 활동은 문화예술교육인 동시에 노동이고, 그들의 거리 공연과 작품 전시는 새로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형성해 내는 정치 활동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노들야학의 교사와 학생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라기보다는 협업 노동자라는 위상을 지닌다. 이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활동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장애인-문화예술-교육을 틀지어 왔던 편견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재구성하기 위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주1: 여기서 불어 ‘partage’는 우리말의 ‘나눔’과 마찬가지로 ‘공유’와 ‘분할/분배’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남자다움/여자다움에 대한 감각은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자연스럽고 윤리적인 것으로 ‘공유’되어 있는 동시에, 남성은 남성적 감각[감성]을, 여성은 여성적 감각[감성]을 ‘분할/분배’받게 된다. 또한 이러한 감각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세계는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로 ‘분할’되고 그에 따른 자신의 몫과 역할이 ‘분배’된다.

김도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자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장애학 함께 읽기』 『장애학의 도전』 등의 책을 썼고, 『철학, 장애를 논하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phare7@naver.com

사진제공. 필자

2021년 11월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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