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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간파하고 주목하기

이슈 첨예한 지형과 날카로운 쟁점 앞에서

  •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 등록일 2022-06-29
  • 조회수1224

이슈

‘기존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장애예술의 가치를 전환하기 위해 어떤 환기와 질문이 필요할까?’ 웹진 [이음]이 앞으로의 방향과 목표를 고민하며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기획위원이란 나의 위치를 떼어놓고 보기 어렵겠지만, [이음]은 장애예술의 함의와 현장에 대해 어떤 매체보다 현장에 더 가깝고 진지하고 확장적인 주제를 던지고자 매번 노력하는 매체다. 이런 [이음]이 현장과 꾸려온 길 위에서 전환과 환기, 실험과 해체, 까끌까끌함과 불편함, 마찰 등을 열쇳말로 다음 장을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기획위원인 내게 이번 칼럼은 중요하면서도 무거운 지면이다. 이 무겁고 책임 있는 주제 앞에서 머뭇거리며 고심한 끝에, 나는 좀 멀리 있는 길을 돌아 이 질문으로 돌아와 보기로 했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는 6월 21일. 오늘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지하철 투쟁은 135일 차, 삭발투쟁 56일 차다. 90명이 넘는 장애인이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오체투지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 아니 멈추고 있다. 아니, 사회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시공간에 머문 다수의 시민은 가려졌던 이들과 낯선 상황을 마주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멈칫거리며 당황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 이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담당한다는 정치, 정책, 언론의 대답과 질문이 필요하다. 적어도 장애인 인권 투쟁을 ‘서울시민을 볼모로 한다’라며 증오를 선동하고 혐오와 차별의 장을 공모하는 정치인은 없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하철 투쟁은 장애인과 무관한 시간을 살던 시민들의 삶이 어떤 연루를 시작하는 순간이 아닐까. 멈춰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이 말이다. 이때 다양한 ‘나’의 질문이 모여 사회가 장애인과 관계 맺는 방법이 새로워진다. 이때 장애예술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혀 예술적이지 않고 순전히 정치적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이 순간에도 장애예술을 기꺼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습적으로 사회가 이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 지원사업이 인정하는 어떤 행위 혹은 활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낯선 무언가를 내놓았을 때, [이음]은 그것을 장애예술이라 간파하며 이 지면에 그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다른 한 장면도 떠오른다.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링크)은 2011년에 서울시 지원사업 평가기관인 서울시복지재단으로부터, ‘여성센터’라는 이유로 ‘전 장애영역 포괄’이라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주요 운영원칙에 어긋나고 장애남성을 배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주1) 성차별이 장애 차별과 함께 공조하는 억압의 한 축으로서 장애와 젠더라는 복합적 차별구조에 맞서는 활동은 장애남성을 ‘배제’한다는 평가로 돌아온 것이다. 젠더를 남성, 여성을 일컫는 말로 협소화시키며 성평등 가치가 누락된 장애인 정책의 현장이다. 성평등의 가치를 누락시킴으로써 장애 차별의 구조와 양상, 현실도 동시에 가려진다.

이 장면은 10년을 훌쩍 넘어, 지난 대선에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대선후보의 주장과 만난다. 성평등 정책이 여성을 보호하는 정책으로만 이해될 때, 특히 정책이 장애여성을 더 취약한 여성으로만 호명할 때, 사회적 문제는 당사자의 취약성으로만 귀결된다. 그래서 장애여성공감은 국가적 ‘보호주의’와 싸우고 있다. 혹시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도 이렇게 예술인 중에서 취약한 이들로만 호명되고 있진 않은가? 장애예술은 과연 성평등과는 어떤 연결을 꾀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치열할 때도 장애예술계 내부의 문제는 왜 ‘장애’ 이외의 젠더 이슈는 민감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과연 [이음]이란 매체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혹은 조금 보이는 현상의 심층을 건드리는 고민을 촉진할 수 있을까?

장애는 정치적인 장 위에 놓여 있다. 특히 장애의 범주와 정의는 성장과 개발주의, 이성애주의와 가족 규범을 정상화하는 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장애인을 자격을 가진 시민으로 선별하고 인정하며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이 차별과 억압의 질서하에 비정상화된 다양한 몸들의 위치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이들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불구의 몸들이 불화를 통해 바꾸어내려는 투쟁이, 장애 정치일 것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다중쟁점 정치’로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마치 환경운동가와 벌목꾼, 여성과 트랜스젠더가 대립되어 보이지만, 그들이 처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쟁점을 파악하게 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장애인에게 할당되는 몫, 주어진 자리를 거부하며 정의와 보편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 그래서 잔여적 복지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다중쟁점 정치로 우리를 포획하는 차별적 구조를 관통해 가야 한다.

장애예술 역시 잔여적 대상이 아닌,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의 정상화 전략과 맞서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영국예술위원회의 ‘인클루시브 아트(inclusive art)’ 사례를 소개할 때 왜 포괄적 예술이 아닌 포용적 예술로 매끄럽게 해석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포용적 예술로 해석될 때 장애예술의 정치적 첨예함은 어떻게 침식되는가. 영국예술위원회의 장애 정책이 한국에는 없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인 「평등법」에 근거해 작동한다는 것은 왜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지 않는가. [이음]은 이 거칠고 거슬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장애와 여성이라는 그 당연하게 할당된 자리를 거부하며 싸우는 동료들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장애예술 역시 정책과 제도 혹은 기존 예술계가 할당하는 어떤 권력을 거부하며, 자라나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 당장 지원과 물리적 인프라를 확산시키는 것과, 그 체계에 갇히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필요하다.

웹진 [이음]은 이렇게 첨예한 지형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올해 마찰과 까끌까끌함을 기조로 활동의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애예술을 ‘전시’하는 지면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과 장애예술인을 조직하고 이를 지지하는 독자들을 조직하는 활동이 필요하고,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 모른다. 레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_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거울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고 제안한다. 매체가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일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 한다는 웹진의 쉽지 않은 당면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장애예술이 장애예술답지 않은 순간에 더 주목하며 무엇을 독자들에게 읽게 하고 싶은가라는 정치적 숙제를 놓치지 않아야겠다. 놓치지 않고 싶다.

  • 벽면을 가득 채운 빔 프로젝션 영상을 배경으로 휠체어를 탄 배우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영상에는 한 사람의 몸 그림이 있다. 오른편에는 수어통역사와 자막이 있다. 자막에는 다음의 내용이 보인다. “이야기하곤 하죠. 사실 억울하기도 했어요. 사회적으로 계속 당당한 몸이 아니라 위축되는 몸, 언제까지 사회의 감시를 받아야 할지 저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고 싶어요. 차별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차별받고 싶지도 않아요.”

    《투 유: 당신의 방향》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 2022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로 극단 춤추는허리에서 연극을 만들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7기 위원,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이다.
rpvl72@gmail.com

사진 제공. 김화용(촬영 최요한)

2022년 7월 (32호)

상세내용

이슈

‘기존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장애예술의 가치를 전환하기 위해 어떤 환기와 질문이 필요할까?’ 웹진 [이음]이 앞으로의 방향과 목표를 고민하며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기획위원이란 나의 위치를 떼어놓고 보기 어렵겠지만, [이음]은 장애예술의 함의와 현장에 대해 어떤 매체보다 현장에 더 가깝고 진지하고 확장적인 주제를 던지고자 매번 노력하는 매체다. 이런 [이음]이 현장과 꾸려온 길 위에서 전환과 환기, 실험과 해체, 까끌까끌함과 불편함, 마찰 등을 열쇳말로 다음 장을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기획위원인 내게 이번 칼럼은 중요하면서도 무거운 지면이다. 이 무겁고 책임 있는 주제 앞에서 머뭇거리며 고심한 끝에, 나는 좀 멀리 있는 길을 돌아 이 질문으로 돌아와 보기로 했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는 6월 21일. 오늘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지하철 투쟁은 135일 차, 삭발투쟁 56일 차다. 90명이 넘는 장애인이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오체투지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 아니 멈추고 있다. 아니, 사회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시공간에 머문 다수의 시민은 가려졌던 이들과 낯선 상황을 마주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멈칫거리며 당황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 이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담당한다는 정치, 정책, 언론의 대답과 질문이 필요하다. 적어도 장애인 인권 투쟁을 ‘서울시민을 볼모로 한다’라며 증오를 선동하고 혐오와 차별의 장을 공모하는 정치인은 없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하철 투쟁은 장애인과 무관한 시간을 살던 시민들의 삶이 어떤 연루를 시작하는 순간이 아닐까. 멈춰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이 말이다. 이때 다양한 ‘나’의 질문이 모여 사회가 장애인과 관계 맺는 방법이 새로워진다. 이때 장애예술은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혀 예술적이지 않고 순전히 정치적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이 순간에도 장애예술을 기꺼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습적으로 사회가 이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 지원사업이 인정하는 어떤 행위 혹은 활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낯선 무언가를 내놓았을 때, [이음]은 그것을 장애예술이라 간파하며 이 지면에 그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다른 한 장면도 떠오른다.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링크)은 2011년에 서울시 지원사업 평가기관인 서울시복지재단으로부터, ‘여성센터’라는 이유로 ‘전 장애영역 포괄’이라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주요 운영원칙에 어긋나고 장애남성을 배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주1) 성차별이 장애 차별과 함께 공조하는 억압의 한 축으로서 장애와 젠더라는 복합적 차별구조에 맞서는 활동은 장애남성을 ‘배제’한다는 평가로 돌아온 것이다. 젠더를 남성, 여성을 일컫는 말로 협소화시키며 성평등 가치가 누락된 장애인 정책의 현장이다. 성평등의 가치를 누락시킴으로써 장애 차별의 구조와 양상, 현실도 동시에 가려진다.

이 장면은 10년을 훌쩍 넘어, 지난 대선에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대선후보의 주장과 만난다. 성평등 정책이 여성을 보호하는 정책으로만 이해될 때, 특히 정책이 장애여성을 더 취약한 여성으로만 호명할 때, 사회적 문제는 당사자의 취약성으로만 귀결된다. 그래서 장애여성공감은 국가적 ‘보호주의’와 싸우고 있다. 혹시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도 이렇게 예술인 중에서 취약한 이들로만 호명되고 있진 않은가? 장애예술은 과연 성평등과는 어떤 연결을 꾀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이 치열할 때도 장애예술계 내부의 문제는 왜 ‘장애’ 이외의 젠더 이슈는 민감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과연 [이음]이란 매체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혹은 조금 보이는 현상의 심층을 건드리는 고민을 촉진할 수 있을까?

장애는 정치적인 장 위에 놓여 있다. 특히 장애의 범주와 정의는 성장과 개발주의, 이성애주의와 가족 규범을 정상화하는 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장애인을 자격을 가진 시민으로 선별하고 인정하며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이 차별과 억압의 질서하에 비정상화된 다양한 몸들의 위치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이들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불구의 몸들이 불화를 통해 바꾸어내려는 투쟁이, 장애 정치일 것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에서 ‘다중쟁점 정치’로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마치 환경운동가와 벌목꾼, 여성과 트랜스젠더가 대립되어 보이지만, 그들이 처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쟁점을 파악하게 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장애인에게 할당되는 몫, 주어진 자리를 거부하며 정의와 보편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 그래서 잔여적 복지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다중쟁점 정치로 우리를 포획하는 차별적 구조를 관통해 가야 한다.

장애예술 역시 잔여적 대상이 아닌,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의 정상화 전략과 맞서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영국예술위원회의 ‘인클루시브 아트(inclusive art)’ 사례를 소개할 때 왜 포괄적 예술이 아닌 포용적 예술로 매끄럽게 해석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포용적 예술로 해석될 때 장애예술의 정치적 첨예함은 어떻게 침식되는가. 영국예술위원회의 장애 정책이 한국에는 없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인 「평등법」에 근거해 작동한다는 것은 왜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지 않는가. [이음]은 이 거칠고 거슬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장애와 여성이라는 그 당연하게 할당된 자리를 거부하며 싸우는 동료들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장애예술 역시 정책과 제도 혹은 기존 예술계가 할당하는 어떤 권력을 거부하며, 자라나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 당장 지원과 물리적 인프라를 확산시키는 것과, 그 체계에 갇히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필요하다.

웹진 [이음]은 이렇게 첨예한 지형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올해 마찰과 까끌까끌함을 기조로 활동의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애예술을 ‘전시’하는 지면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과 장애예술인을 조직하고 이를 지지하는 독자들을 조직하는 활동이 필요하고,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 모른다. 레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_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에서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거울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고 제안한다. 매체가 장애예술과 장애예술인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일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 한다는 웹진의 쉽지 않은 당면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장애예술이 장애예술답지 않은 순간에 더 주목하며 무엇을 독자들에게 읽게 하고 싶은가라는 정치적 숙제를 놓치지 않아야겠다. 놓치지 않고 싶다.

  • 벽면을 가득 채운 빔 프로젝션 영상을 배경으로 휠체어를 탄 배우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영상에는 한 사람의 몸 그림이 있다. 오른편에는 수어통역사와 자막이 있다. 자막에는 다음의 내용이 보인다. “이야기하곤 하죠. 사실 억울하기도 했어요. 사회적으로 계속 당당한 몸이 아니라 위축되는 몸, 언제까지 사회의 감시를 받아야 할지 저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고 싶어요. 차별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차별받고 싶지도 않아요.”

    《투 유: 당신의 방향》 연계 퍼포먼스: ‘집에 살던 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쇼케이스 <어쩌면 이상한 만남>, 2022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로 극단 춤추는허리에서 연극을 만들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7기 위원,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이다.
rpvl72@gmail.com

사진 제공. 김화용(촬영 최요한)

2022년 7월 (32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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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1 1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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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자립이란 단어는 오래전에 없었지요.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단어가 만들어지고 행동도 일어나는데 그 필요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기본적인 마인드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그래서 더 상처받고 더 외쳐야 하는 작금의 사태...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모아야겠지요 살아있으니깐...제대로 살고 싶으니깐...

2022-06-30 14: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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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은 언제나 문제투성이들과 싸워야 하는군요. 춤추는 허리님 화이팅입니다!! 덧: 이곳에서 만큼은 원고들에서 '장애'라는 단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런지 모른채로 구분짓기의 인식이 더욱 강화되는 듯 싶어서요. 차이와 다름을 줄이고 같은 사람으로 보려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해요. 장애예술이 되면 안되고, 그냥 예술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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