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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

리뷰 차이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공존의 극장

  •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 등록일 2019-02-27
  • 조회수475

리뷰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

차이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공존의 극장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2013년 4월의 <피나 안 인 서울>에서 연원한다. “춤은 특별한 교육 없이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했던 피나 바우쉬의 예술정신을 잇는 프로젝트라고 했고, 또 정말로 그랬지만, 사실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스마트기기와 소셜미디어의 확산 때문에,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관한 대중의 인지 방식’에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이 명약관화해질 무렵이었다. <피나 안 인 서울>에서 안은미는 ‘영상으로 접하는 무용’의 힘을 빌었다. 2009년 작고한 피나 바우쉬를 기리는 영화 <피나>(2011)에 매혹되는 사람이 많은 현상에 주목, 해당 영화를 함께 감상한 뒤, 워크숍 등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각자 본인만의 단편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판을 벌였다. (실제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영상 속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과정에서 피나 바우쉬는 어느 정도 견인용 에너지원에 불과했고, 진짜 핵심은 모두가 공평하게 1분 59초의 시간이라는 제약에 맞춰 공연한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창작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사람”이라는 자격 요건과 ‘1분 59초’라는 공통의 시간 제약은, 몇 가지 전례 혹은 형식을 상기시켰다. 처음엔, 1968년 앤디 워홀이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라고 시큰둥하게 예언했던 것이 떠올랐고, 나중엔, 6초짜리 동영상을 올릴 수 있던 소셜미디어 바인(Vine)이나 한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동영상을 특징으로 했던 소셜미디어 스냅챗(snapchat)과 비교하게 되기도 했다. 제약이 사라지거나 크게 약화된 유동성, 편재성(ubiquity)과 ‘만회가 불가능한 계급 격차’의 시대에, 거꾸로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은 공평한 제약’을 통해 서로 더 잘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일까?

<피나 안 인 서울>의 초연 이래, 약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바인과 스냅챗 등의 열풍은 식어버렸고,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마치 유튜브가 최종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뵌다. 시간의 제약은 없지만 누구나 같은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기에, 전문가도 아마추어도 유튜브를 통해 정보와 사건과 서사를 쏟아낸다. 동영상 규제를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의 텀블러(Tumblr) 사용자들을 흡인해낸 오늘의 트위터를 보면, 익명성을 가면 삼은 채, 영상을 위한 섹스 행위를 공연하듯 반복하고 그 촬영 기록을 업로드하는 청년들이 부지기수다. ‘현실이 실존하고, 그를 영상으로 기록한다’는 구식 인식 체계는 붕괴했고, ‘새로운 실존으로서의 영상을 위해 실재를 직조한다’는 식의 태도가 일반화됐다.

따라서,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무용을 위한 오프라인 유튜브 채널’ 쯤으로 독해되기도 한다. 오늘의 시점에선 그렇다. 하면, 안은미의 ‘무용을 위한 오프라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개척해낸 여러분들의 작업은 그간 어땠을까?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에서 문제적 관점을 제시하는 흥미로운 작업은, 대개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한두 편에 그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의 모든 발표작이 망작이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겠다는 과욕에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껍데기를 둘러 입고 마는 경우도 흔하다. 프로페셔널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망작도 1분 59초의 틀로 보면,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뭘 어떻게 제시하려 하는지, 왜 망하는 길로 접어드는지 지켜보노라면, 금세 1분 59초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은, 1분까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공연하다가, 그 짧은 사이에도 아차 하는 사이에 집중력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리는, 거의 리얼리티쇼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각각의 1분 59초는 지루해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다. 중간중간 민망한 작업도 꽤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묘한 기승전결이 이뤄지기도 한다. (각각의 작업에 안은미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작업의 배치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어떤 브리콜라주(bricolage)가 이뤄지는 면이 없지 않다.)

1분 59초의 시간 제약은, 사실 무용 공연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준다. 등장과 퇴장이다. 무대 공연은 ‘어떻게 나타나서 뭘 보여주고, 어떻게 퇴장하느냐’의 반복이다. 평생을 창작해온 무대 예술가들에게도 “말이 되는” 등장과 퇴장은, 골치 아픈 이슈다. 1분 59초라는 시간의 액자 때문에, 공연자들은 후다닥 나와서 후다닥 퇴장한다. 따라서 뭘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를 최선을 다해 구현하면 그만이다.

참가자들에게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공연에서 좀 실수를 했다고 해도 큰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안은미의 1분 59초’는 라이브 동영상 같아서, 누구도 완성도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참가자 다수는 공연을 위한 교육과 워크숍 과정에서 이미 안은미 식의 세계관과 행위 양식 등에 어느 정도 전염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의 정신과 태도로 모든 아쉬움을 극복해버린다. (공연 이후 그 효과가 어느 정도 지속하느냐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즉,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그냥 ‘1분 59초’ 프로젝트는 아니다. ‘안은미’라는 수식도, 수식 이상으로 중요하다. 안은미 식 ‘하면 된다’의 정신, 주어진 상태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 만물을 아름답게 수용-포용하는 힘, 이러한 정신과 태도와 힘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고, 평소엔 표출하지 못하던 자신의 면모를, 나름의 최적화한 형식을 통해 구현-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피나 바우쉬 무용단의 무용수들이, 피나 바우쉬의 정신에 동화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업을 재연한다는 자세로 무대에 오르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 눈빛부터 다르다. 무대 예술에서 안무가/연출자 특유의 정신과 언어와 태도 등은, 작업 이상의 차원에서 마술적 변화의 힘을 발휘한다. 위대한 안무가/연출자들은 갑갑한 한계 상황을 뛰어넘을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점과 시공으로 모두를 견인함으로써, 극장을 일종의 타임머신이나 우주선으로 기능케 한다.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라는 우주선에 승선하기로 작정한 이들은, 우주 비행 훈련을 통해 새로운 시공으로 자기 자신을 이끈다. 이 과정에서 늘 참가자들은, ‘타자를 어떻게 마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선 경우라면, ‘타자화된 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안은미의 세계에서 타자성은, 무시되지도 않지만 함부로 미화되거나 긍정되지도 않는다. 차이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되, 대안으로 포장되지는 않는다.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에서, 몇몇 참가자는 전에 만나기 어려웠던 질문을 던졌다. 뇌리에 각인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나는 변태가 될 수 있을까?”였다. 도발적인 질문을 전혀 도발적이지 않게 제시하는 참가자 오진희의 미디어 퍼포먼스 작업 <왜 못 알아들어>는 타자성을 다뤄온 기존의 프로페셔널 작업이 가지는 어떤 한계를 조용히 뛰어넘었다. 타자화된 자신의 조건을 전제로 또 다른 타자성의 언어를 새로 취해 자신의 참된 욕망을 표출한다는 게임은, 다른 곳에선 본 일이 없다.

프레드, 네가 이겼다!

이 작품의 형식은 아주 연극적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만일 형식적인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자칫 뜨거워졌을 거다. 이 뜨거움을 식히는 냉매는 재치와 유머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 것처럼 온갖 장애물과 싸워야 하고 좌절과 낙담에 술을 퍼마시기도 하지만, 프레드의 삶이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그의 말과 몸짓에 당당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왜 문제인 거야? 이런 대답을 듣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인형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프레드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때 사람들이 답하는 소위 상식이란 그냥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한데, 또 유쾌하다.

이런 재미는 웃음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의미가 깊어지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인형 프레드와 조연출 마틴이 하나의 존재로 엮이는 순간이다. 수당이 깎인 프레드의 다리 조종사가 해고되었을 때 마틴 역시 바보같이 무대를 오간다는 이유로 조연출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걸을 수 없는 프레드와 일할 수 없는 마틴.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프레드의 다리를 마틴이 잡아주는 것이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던 마틴은 프레드의 다리를 잡아줌으로써 프레드에게 다시금 몸짓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가 된다. 마틴의 손길에 힘입어 높은 곳에서 도약하는 프레드의 유영은 죽기 위한 뛰어내림에서 삶을 위한 날아오름으로 맥락을 바꾼다. ‘무대’라는 가짜 세상에서 현실이라는 진짜 세상을 향해 힘없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당당히 뛰어들어야 하는 이 도약대에 프레드와 마틴이 함께 서 있는 거다.

이 함께 있음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크다. 단지 장애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리 없는 자들을 향한 예술적 공감과 격려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적인 책무임을 기억하자면 <프레드>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말대로, ‘주류 예술의 완성도 높은 작품’의 조건에 넉넉히 들어맞는 작품임이 맞다. 장애인 예술이라는 말 뒤에 ‘작품’이라는 말보다는 ‘활동’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프레드>가 제시하는 비전은 명쾌하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삶’을 끌어안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장애’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묵직하다.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

안은미컴퍼니, 2019. 1. 18.(금), 1.19.(토), CKL스테이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피나 바우쉬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작된 ‘1분 59초 프로젝트’는 전문교육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이 안무를 직접 제작하여 공연함으로써 예술 공연의 대중적 영역을 새로운 형태로 확장하고자 출발했다. ‘장애인 공동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는 장애인·비장애인 참가자가 직접 무대에 올라 워크숍을 거쳐 완성한 각자의 ‘1분 59초’를 선보였다.

임근준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Q 운동가이자 미술가로서 실험기를 보냈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디자인 연구자 모임인 DT 네트워크 동인으로 활동했고,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Off Kilter: Notes from a Study of Contemporary Korean Artists』(2007),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여섯 빛깔 무지개』(2015) 등이 대표 저작이고, 조만간 『현대미술의 새로운 전환: 포스트-컨템퍼러리 시대의 예술 생존법』(가제)과 『이것은 과연 미술인가』(가제) 등을 발간할 예정이다. 2008년 이후 당대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www.crazy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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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 황정욱)

사진제공.안은미컴퍼니

2019년 2월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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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

차이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공존의 극장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2013년 4월의 <피나 안 인 서울>에서 연원한다. “춤은 특별한 교육 없이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했던 피나 바우쉬의 예술정신을 잇는 프로젝트라고 했고, 또 정말로 그랬지만, 사실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스마트기기와 소셜미디어의 확산 때문에,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관한 대중의 인지 방식’에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이 명약관화해질 무렵이었다. <피나 안 인 서울>에서 안은미는 ‘영상으로 접하는 무용’의 힘을 빌었다. 2009년 작고한 피나 바우쉬를 기리는 영화 <피나>(2011)에 매혹되는 사람이 많은 현상에 주목, 해당 영화를 함께 감상한 뒤, 워크숍 등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각자 본인만의 단편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판을 벌였다. (실제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영상 속의 무용 공연을 보고 감동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과정에서 피나 바우쉬는 어느 정도 견인용 에너지원에 불과했고, 진짜 핵심은 모두가 공평하게 1분 59초의 시간이라는 제약에 맞춰 공연한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창작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사람”이라는 자격 요건과 ‘1분 59초’라는 공통의 시간 제약은, 몇 가지 전례 혹은 형식을 상기시켰다. 처음엔, 1968년 앤디 워홀이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라고 시큰둥하게 예언했던 것이 떠올랐고, 나중엔, 6초짜리 동영상을 올릴 수 있던 소셜미디어 바인(Vine)이나 한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동영상을 특징으로 했던 소셜미디어 스냅챗(snapchat)과 비교하게 되기도 했다. 제약이 사라지거나 크게 약화된 유동성, 편재성(ubiquity)과 ‘만회가 불가능한 계급 격차’의 시대에, 거꾸로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은 공평한 제약’을 통해 서로 더 잘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일까?

<피나 안 인 서울>의 초연 이래, 약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바인과 스냅챗 등의 열풍은 식어버렸고,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마치 유튜브가 최종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뵌다. 시간의 제약은 없지만 누구나 같은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기에, 전문가도 아마추어도 유튜브를 통해 정보와 사건과 서사를 쏟아낸다. 동영상 규제를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의 텀블러(Tumblr) 사용자들을 흡인해낸 오늘의 트위터를 보면, 익명성을 가면 삼은 채, 영상을 위한 섹스 행위를 공연하듯 반복하고 그 촬영 기록을 업로드하는 청년들이 부지기수다. ‘현실이 실존하고, 그를 영상으로 기록한다’는 구식 인식 체계는 붕괴했고, ‘새로운 실존으로서의 영상을 위해 실재를 직조한다’는 식의 태도가 일반화됐다.

따라서,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무용을 위한 오프라인 유튜브 채널’ 쯤으로 독해되기도 한다. 오늘의 시점에선 그렇다. 하면, 안은미의 ‘무용을 위한 오프라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개척해낸 여러분들의 작업은 그간 어땠을까?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에서 문제적 관점을 제시하는 흥미로운 작업은, 대개 하나의 프로젝트에서 한두 편에 그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거의 모든 발표작이 망작이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겠다는 과욕에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껍데기를 둘러 입고 마는 경우도 흔하다. 프로페셔널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망작도 1분 59초의 틀로 보면,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뭘 어떻게 제시하려 하는지, 왜 망하는 길로 접어드는지 지켜보노라면, 금세 1분 59초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은, 1분까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공연하다가, 그 짧은 사이에도 아차 하는 사이에 집중력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리는, 거의 리얼리티쇼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 각각의 1분 59초는 지루해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다. 중간중간 민망한 작업도 꽤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묘한 기승전결이 이뤄지기도 한다. (각각의 작업에 안은미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작업의 배치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어떤 브리콜라주(bricolage)가 이뤄지는 면이 없지 않다.)

1분 59초의 시간 제약은, 사실 무용 공연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준다. 등장과 퇴장이다. 무대 공연은 ‘어떻게 나타나서 뭘 보여주고, 어떻게 퇴장하느냐’의 반복이다. 평생을 창작해온 무대 예술가들에게도 “말이 되는” 등장과 퇴장은, 골치 아픈 이슈다. 1분 59초라는 시간의 액자 때문에, 공연자들은 후다닥 나와서 후다닥 퇴장한다. 따라서 뭘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를 최선을 다해 구현하면 그만이다.

참가자들에게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공연에서 좀 실수를 했다고 해도 큰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안은미의 1분 59초’는 라이브 동영상 같아서, 누구도 완성도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참가자 다수는 공연을 위한 교육과 워크숍 과정에서 이미 안은미 식의 세계관과 행위 양식 등에 어느 정도 전염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의 정신과 태도로 모든 아쉬움을 극복해버린다. (공연 이후 그 효과가 어느 정도 지속하느냐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즉,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는, 그냥 ‘1분 59초’ 프로젝트는 아니다. ‘안은미’라는 수식도, 수식 이상으로 중요하다. 안은미 식 ‘하면 된다’의 정신, 주어진 상태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 만물을 아름답게 수용-포용하는 힘, 이러한 정신과 태도와 힘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고, 평소엔 표출하지 못하던 자신의 면모를, 나름의 최적화한 형식을 통해 구현-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피나 바우쉬 무용단의 무용수들이, 피나 바우쉬의 정신에 동화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업을 재연한다는 자세로 무대에 오르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 눈빛부터 다르다. 무대 예술에서 안무가/연출자 특유의 정신과 언어와 태도 등은, 작업 이상의 차원에서 마술적 변화의 힘을 발휘한다. 위대한 안무가/연출자들은 갑갑한 한계 상황을 뛰어넘을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점과 시공으로 모두를 견인함으로써, 극장을 일종의 타임머신이나 우주선으로 기능케 한다.

‘안은미의 1분 59초’ 프로젝트라는 우주선에 승선하기로 작정한 이들은, 우주 비행 훈련을 통해 새로운 시공으로 자기 자신을 이끈다. 이 과정에서 늘 참가자들은, ‘타자를 어떻게 마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선 경우라면, ‘타자화된 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안은미의 세계에서 타자성은, 무시되지도 않지만 함부로 미화되거나 긍정되지도 않는다. 차이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되, 대안으로 포장되지는 않는다.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에서, 몇몇 참가자는 전에 만나기 어려웠던 질문을 던졌다. 뇌리에 각인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나는 변태가 될 수 있을까?”였다. 도발적인 질문을 전혀 도발적이지 않게 제시하는 참가자 오진희의 미디어 퍼포먼스 작업 <왜 못 알아들어>는 타자성을 다뤄온 기존의 프로페셔널 작업이 가지는 어떤 한계를 조용히 뛰어넘었다. 타자화된 자신의 조건을 전제로 또 다른 타자성의 언어를 새로 취해 자신의 참된 욕망을 표출한다는 게임은, 다른 곳에선 본 일이 없다.

프레드, 네가 이겼다!

이 작품의 형식은 아주 연극적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만일 형식적인 거리 두기가 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자칫 뜨거워졌을 거다. 이 뜨거움을 식히는 냉매는 재치와 유머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 것처럼 온갖 장애물과 싸워야 하고 좌절과 낙담에 술을 퍼마시기도 하지만, 프레드의 삶이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그의 말과 몸짓에 당당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왜 문제인 거야? 이런 대답을 듣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인형이라는 사실이 당연한 프레드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질 때 사람들이 답하는 소위 상식이란 그냥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씁쓸한데, 또 유쾌하다.

이런 재미는 웃음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의미가 깊어지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인형 프레드와 조연출 마틴이 하나의 존재로 엮이는 순간이다. 수당이 깎인 프레드의 다리 조종사가 해고되었을 때 마틴 역시 바보같이 무대를 오간다는 이유로 조연출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걸을 수 없는 프레드와 일할 수 없는 마틴.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프레드의 다리를 마틴이 잡아주는 것이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던 마틴은 프레드의 다리를 잡아줌으로써 프레드에게 다시금 몸짓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가 된다. 마틴의 손길에 힘입어 높은 곳에서 도약하는 프레드의 유영은 죽기 위한 뛰어내림에서 삶을 위한 날아오름으로 맥락을 바꾼다. ‘무대’라는 가짜 세상에서 현실이라는 진짜 세상을 향해 힘없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당당히 뛰어들어야 하는 이 도약대에 프레드와 마틴이 함께 서 있는 거다.

이 함께 있음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크다. 단지 장애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리 없는 자들을 향한 예술적 공감과 격려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기본적인 책무임을 기억하자면 <프레드>는, 클레어 윌리엄스의 말대로, ‘주류 예술의 완성도 높은 작품’의 조건에 넉넉히 들어맞는 작품임이 맞다. 장애인 예술이라는 말 뒤에 ‘작품’이라는 말보다는 ‘활동’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우리에게 <프레드>가 제시하는 비전은 명쾌하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삶’을 끌어안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장애’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묵직하다.

장애인 공동 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

안은미컴퍼니, 2019. 1. 18.(금), 1.19.(토), CKL스테이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피나 바우쉬의 정신을 바탕으로 시작된 ‘1분 59초 프로젝트’는 전문교육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이 안무를 직접 제작하여 공연함으로써 예술 공연의 대중적 영역을 새로운 형태로 확장하고자 출발했다. ‘장애인 공동창작 프로젝트 안은미의 1분 59초’는 장애인·비장애인 참가자가 직접 무대에 올라 워크숍을 거쳐 완성한 각자의 ‘1분 59초’를 선보였다.

임근준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Q 운동가이자 미술가로서 실험기를 보냈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디자인 연구자 모임인 DT 네트워크 동인으로 활동했고,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Off Kilter: Notes from a Study of Contemporary Korean Artists』(2007),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여섯 빛깔 무지개』(2015) 등이 대표 저작이고, 조만간 『현대미술의 새로운 전환: 포스트-컨템퍼러리 시대의 예술 생존법』(가제)과 『이것은 과연 미술인가』(가제) 등을 발간할 예정이다. 2008년 이후 당대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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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 황정욱)

사진제공.안은미컴퍼니

2019년 2월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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