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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미술작가

인터뷰 질곡의 삶에서 빚어낸 꿈결 같은 색채의 세계

  • 오세형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 팀장
  • 등록일 2019-09-25
  • 조회수490

인터뷰

김근태 미술작가

질곡의 삶에서 빚어낸 꿈결 같은 색채의 세계

오세형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 팀장

전남 무안의 한 폐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김근태 작가를 만났다. 20년이 넘도록 지적장애인을 그려온 이야기를 들으며 양가적 감정이 오갔다. 모진 질곡의 삶을 겪은 개인의 서사는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에 동조하다가 그만 거리감을 잃고 분별을 흐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회복과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와 마주하며 강렬한 흡입력과 거부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며 겪은 생생한 현실인데도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이 들렸다. 인터뷰 후에 작품을 다시 보니 섬에서 만난 장애인들과 완전히 동화되기를 바랐던 그의 열망이 몽환적인 색채와 형상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이 보였다.

지금 계시는 곳(폐교)에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린다.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작업량이 많아 좀 넓은 장소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교육청에서 폐교 일부가 비어있다며 공간을 제공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오기로 했다. 2층에 있는 교실 두 칸을 사용하는 데 전시장과 작업실로 쓰고 있다. 화장실 등이 불편하지만 주변 자연이 너무 좋고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어서 작품 영감이 엄청나게 떠올라서 너무 좋다.

지적장애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5·18 항쟁 때도 현장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처음부터 지적장애인을 그리지는 않았다. 풍경화도 그리고, 국전에도 내고, 상도 받고 그랬는데, 광주항쟁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결국은 평범한 풍경화를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교사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서 다시 인체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서 나의 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을 찾다 보니 5·18의 현장이 다 스쳐 지나갔다. 파리에서 1년 가까이 생활했는데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역전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같은 소외계층을 그리다가 별로 느낌이 안 와서 목포에 있는 고아원의 아이들 스케치를 했다. 그때 주변의 누군가가 “여기 친구들보다 더 힘든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배를 타고 가면 섬에 아이들이 있다 해서 스케치북을 들고 ‘고하도’라는 섬을 들어가게 됐다. 섬에 가서 보니까 150명이나 되는 중증의 지적장애인들이 뒹굴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데 바로 5·18의 상처가 또렷이 떠올랐다. 그때 죽은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정리하고 3년 동안 배를 타고 오가며 작업하고 같이 잠도 자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내가 대학 2년 때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학생들이 데모를 했고 그 시위에 참여했다. 5·18에서는 시민군으로 참여했는데 나는 도청 앞문을 지키는 요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 4일 동안 사태를 수습하면서, 감옥에 있는 재야인사와 총을 교환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때 제 형과 어머니가 찾아와서는 다음 날 새벽 3시에 도청을 함락하니 빨리 피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저는 여기 시체를 두고 나갈 수 없다고 어머니와 형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한 여섯 시쯤 되었는데 같이 지키던 친구에게는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절반은 겁이 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도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래서 같이 도망치자고 하고 총을 놔두고 담을 넘어서 피했다. 그날 새벽에 85%가 죽었다. 이후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모른다. 끝내는 직장도 버리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내다가 지적장애인을 만나서 다시 회복의 길을 걸었다.

회복이라고 하셨는데 처음 장애인들을 만나셨을 때 어땠나? 어떻게 친해지고 가까워지셨는지 말씀해달라.

1993년도에 본격적으로 지적장애인을 그렸다. 이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맑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안다. 자기한테 뭔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때린다. 나는 한 번도 안 맞았다. 이 친구들이 나에게 ‘아빠아빠’했다. 다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죽음까지도 누가 돌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소외받는 만큼 나도 작가로서 소외를 받았다. 지적장애인을 그리는 나를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저 친구 좋은 그림 놔두고 왜 저 어려운 그림을 그리나, 저 친구 좀 돌았다”며 나를 안 만나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나는 우리 친구들만 보면 신이 나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끝까지 내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이 그들에게 있었다.

이제 그림 얘기를 들려 달라. 올해 한가람미술관에서 연 전시의 부제로 “나는 자폐아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쓰셨다. 좀 독특한데 왜 이런 주제를 잡으셨는지 궁금하다.

한 20년 가까이 그 주제를 다루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내가 자폐아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자폐’라는 얘기를 사람들은 안 쓰려고 하는데, 이번에 한가람미술관 전시 포스터에 그 문구를 넣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자폐인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움직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나. 그런데 우리 친구들을 보니까, 내가 발견하지 못한 세계가 있는 거다. 그림을 그리는 자폐아 친구들을 보면 (내가) 보지 못한 세계를 그리고 있더라.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을 표현해야겠다,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자폐라고 하니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자기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위장된 모습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런데 나는 예술가이고 예술가는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상상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한가람미술관 전시에서 100미터를 그렸던 작품 전시와 함께 빛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 그리고 한지에 그린 그림 200개를 (이이남 작가와 함께) 영상작업으로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현대과학이 나의 손으로 그린 영혼과 결합한 것 같았다. 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더라. 그래서 이것이 엄청난 것이구나, 앞으로 이 작업을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주로 얼굴, 인물을 그리지 않나. 항상 배경과 인물을 대비되게 하고, 색도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한다. 색도 세상에 없는 색이다.

원래 서양화는 물감을 많이 사용한다. 유화 재료이기 때문에 몇 번 발라야 한다. 나는 특히 두툼하게 바른다. 그림에서 신비한 색깔, 빛이 나온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신의 존재가 나에게는 영향이 컸다. 기도와 환상 속에서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보았다. 100호짜리 77개를 연결해서 100미터를 그렸는데 2년 7개월 만에 끝냈다. 그 작품을 유화로 하려면 보통 10년에서 20년이 걸린다. 물감을 바르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내가 쓰러져도 그린다는 각오로 온 힘을 다 모아서 작품을 끄집어낸다. 내가 작업을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이끄는 세계가 있다. 계속 기도하고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다.

한쪽 눈은 실명하셨고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도 안 좋으시고 청력도 80% 이상 잃으셨다고 들었다. 작업 하기 힘드실 텐데 최근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달라.

옛날에 사고로 인해서 한쪽 눈은 실명한 상태이다. 유네스코 전시를 앞두고, 상처의 아픔을 파내면서 우리 친구들 무덤에 들어가는 장면을 50호 15개에 그리는 중에 갑자기 눈이 하얘지는 거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다고 하더라. 황반 현상으로 빛이 들어오면 사람을 못 본다. 빛이 안 오면 조금씩 보인다. 갑자기 귀도 들리지 않았다. 눈하고 귀가 이런 상태가 되니까 절망적이지 않나. 그런데 반대로 내게 뭔가 암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친구들을 더 깊게 그릴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태어나면 흙으로 태어나 흙으로 죽는다. 이번에 흙으로 지적장애인 형태의 토우 1천 개를 만든다. 또 5·18의 죽은 영혼과 행방불명된 영혼 등을 한지로 군상 1천 개를 만들었다. 땅과 하늘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있다. 그 작업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화가로서 작업으로 표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만들어낼 계획을 갖고 있다.

작업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역사와 개인의 화해와 치유의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제 전시, 유엔이나 유네스코에서 표방하고 있는 주제와 맞닿아 있어서 전시를 여러 번 하게 된 것 같다. 그쪽 전시는 어떤 동기로 하게 되셨고, 보신 분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적장애인을 그린 작품 전시를 열었는데 유엔과 유네스코 전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조금씩 가졌다. 아, 이런 친구들이 이 세상에 있었구나. 실제로는 전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장애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도 작품을 대하면서 관심을 가진다. 내 작품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러한 것에 조금이라도 내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유네스코 전시에서 내 작품과 함께 지적장애인들의 그림을 모아서 한쪽 부스에다 전시를 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참가자들이 모여서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는데, 서아프리카 베냉 공화국 대사가 자기 나라에 와서 문화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문화지원은 정신을 바꿀 수 있어서 너무도 필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 전시를 추진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진행하지 못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문화지원에 대한 요구들이 있다.

100미터짜리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도록에 아이들의 얼굴을 악보에다 음표처럼 그렸다. 비발디 <사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조금은 삐뚤어지고 조금은 뉘어있는 음표”라고 매력적으로 표현하셨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길 원하셨나.

실제로 100미터는 굉장히 길다. 그 전시를 계속하는데 관심이 없더라. 비발디 <사계>를 생각해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모든 무한한 세계가 일 년 단위로 돌아가지 않나. 악보에 우리 친구들을 배치했다. 어떤 친구는 조그맣고 어떤 친구는 몸집이 크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꽃도 넣고 바다의 물고기도 넣고 나비도 넣었다. 나비를 각자 하나씩 띄워서 서로 나비를 통해서 이야기하라고. 봄엔 꽃이 활짝 핀 곳에서 놀게 하고, 여름엔 파란색을 써서 물고기랑 같이 놀게 하고. 각자 특징을 잡아서 그림을 그렸다. 유화에서 그렇게 긴 그림은 최초이다. 작품을 본 사람들이 아주 빛나고 밝게 어떻게 이런 표정을 잡아내는지 놀랍다고 한다. 실제로 그 아이들이 밝다. 우리가 봤을 때나 어둡지 그 애들은 너무 행복하고 천진난만하다. 그것을 내 그림으로 표현해내려고 많이 생각하고 만들어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동참해주고 치유 받았다. 어떤 사람은 그림 절대 팔지 말라고 한다. 이 그림은 팔아선 안 된다는 거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치유해주니까, 이것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대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난리다. 나는 뭐 먹고 사냐고 그랬지.(웃음)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전시나 그림을 보고 장애인 당사자나 그 부모,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

지적장애인 그림을 같이 전시하면, 부모까지 세 명이 붙어야 한다. 김근태 화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화가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부모님들이 “이런 날도 있나요?”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 친구들이 이렇게 잘 그리냐고 그러더라.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고 우리 친구들 그림을 사주었으면 한다. 이 친구들이 떳떳하게 사회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서울에서 지적장애인을 가르치는 젊은 친구들이 넘쳐난다. 조금 더 조직적으로 해서 부모에게 희망을 주고 살 권리를 주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으면 한다. 내가 책을 내주려고 하고 있다. 같이, 더불어서 만들어 가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올 거다. 이 친구들이 성장해서 세계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선생님께 개인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이지 않나. 어떤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달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한가람미술관 전시 후에 쉬고 싶은데 우리 친구들이 계속 나를 괴롭히는 거다. 그래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갔다. 광주에서 상처를 입어서 한 번도 안 갔는데, 찾아가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내년이 5·18 40주년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좋다. 내 그림을 전시할 이유가 있다. 망월동 묘지 앞에다 전시도 하면서 한 달 동안 고백을 하겠다. 살아남은 자의, 뒤돌아 도망쳐 나온 자의 비굴함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죽어간 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담당자가 좋다고 했다. 여러 가지 행사가 많이 있는데, 서로 얼굴 보고 그려주기 작품구상을 하고 있고, 국제 포럼도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오대륙 형상에 천개의 토우를 만들어서 매달아 축제 형식의 치유 개념으로 전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함께가자 160.2×912.1cm / Oil on canvas / 2015

희망 160.2×651.5cm / Oil on canvas / 2015

김근태

1983년 조선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1992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프랑스 파리 그랑슈미에르 모델 연습을 통해 작품의 화두(지적장애인 인물 그리기)를 찾았으며,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 고하도 장애인 요양원 공생원에서 생활하며 장애인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1996년 2번째 전시회부터 2019년 현재까지 오직 장애인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여는 세계 유일의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OECD, 유엔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작품의 예술적,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초대전 등 다수의 전시회를 열었다.

오세형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 팀장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작품사진 제공. 김근태

2019년 9월 (8호)

상세내용

인터뷰

김근태 미술작가

질곡의 삶에서 빚어낸 꿈결 같은 색채의 세계

오세형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 팀장

전남 무안의 한 폐교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김근태 작가를 만났다. 20년이 넘도록 지적장애인을 그려온 이야기를 들으며 양가적 감정이 오갔다. 모진 질곡의 삶을 겪은 개인의 서사는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에 동조하다가 그만 거리감을 잃고 분별을 흐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회복과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예술가와 마주하며 강렬한 흡입력과 거부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근대사를 관통하며 겪은 생생한 현실인데도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이 들렸다. 인터뷰 후에 작품을 다시 보니 섬에서 만난 장애인들과 완전히 동화되기를 바랐던 그의 열망이 몽환적인 색채와 형상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이 보였다.

지금 계시는 곳(폐교)에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소개를 부탁드린다.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작업량이 많아 좀 넓은 장소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교육청에서 폐교 일부가 비어있다며 공간을 제공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오기로 했다. 2층에 있는 교실 두 칸을 사용하는 데 전시장과 작업실로 쓰고 있다. 화장실 등이 불편하지만 주변 자연이 너무 좋고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어서 작품 영감이 엄청나게 떠올라서 너무 좋다.

지적장애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5·18 항쟁 때도 현장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처음부터 지적장애인을 그리지는 않았다. 풍경화도 그리고, 국전에도 내고, 상도 받고 그랬는데, 광주항쟁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결국은 평범한 풍경화를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교사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서 다시 인체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서 나의 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을 찾다 보니 5·18의 현장이 다 스쳐 지나갔다. 파리에서 1년 가까이 생활했는데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역전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같은 소외계층을 그리다가 별로 느낌이 안 와서 목포에 있는 고아원의 아이들 스케치를 했다. 그때 주변의 누군가가 “여기 친구들보다 더 힘든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배를 타고 가면 섬에 아이들이 있다 해서 스케치북을 들고 ‘고하도’라는 섬을 들어가게 됐다. 섬에 가서 보니까 150명이나 되는 중증의 지적장애인들이 뒹굴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데 바로 5·18의 상처가 또렷이 떠올랐다. 그때 죽은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정리하고 3년 동안 배를 타고 오가며 작업하고 같이 잠도 자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내가 대학 2년 때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학생들이 데모를 했고 그 시위에 참여했다. 5·18에서는 시민군으로 참여했는데 나는 도청 앞문을 지키는 요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 4일 동안 사태를 수습하면서, 감옥에 있는 재야인사와 총을 교환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때 제 형과 어머니가 찾아와서는 다음 날 새벽 3시에 도청을 함락하니 빨리 피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저는 여기 시체를 두고 나갈 수 없다고 어머니와 형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한 여섯 시쯤 되었는데 같이 지키던 친구에게는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절반은 겁이 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도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래서 같이 도망치자고 하고 총을 놔두고 담을 넘어서 피했다. 그날 새벽에 85%가 죽었다. 이후 살아남은 자의 비겁함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모른다. 끝내는 직장도 버리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내다가 지적장애인을 만나서 다시 회복의 길을 걸었다.

회복이라고 하셨는데 처음 장애인들을 만나셨을 때 어땠나? 어떻게 친해지고 가까워지셨는지 말씀해달라.

1993년도에 본격적으로 지적장애인을 그렸다. 이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맑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안다. 자기한테 뭔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때린다. 나는 한 번도 안 맞았다. 이 친구들이 나에게 ‘아빠아빠’했다. 다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죽음까지도 누가 돌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소외받는 만큼 나도 작가로서 소외를 받았다. 지적장애인을 그리는 나를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저 친구 좋은 그림 놔두고 왜 저 어려운 그림을 그리나, 저 친구 좀 돌았다”며 나를 안 만나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나는 우리 친구들만 보면 신이 나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끝까지 내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이 그들에게 있었다.

이제 그림 얘기를 들려 달라. 올해 한가람미술관에서 연 전시의 부제로 “나는 자폐아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쓰셨다. 좀 독특한데 왜 이런 주제를 잡으셨는지 궁금하다.

한 20년 가까이 그 주제를 다루면서 계속 느끼는 것은 내가 자폐아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자폐’라는 얘기를 사람들은 안 쓰려고 하는데, 이번에 한가람미술관 전시 포스터에 그 문구를 넣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자폐인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움직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나. 그런데 우리 친구들을 보니까, 내가 발견하지 못한 세계가 있는 거다. 그림을 그리는 자폐아 친구들을 보면 (내가) 보지 못한 세계를 그리고 있더라.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을 표현해야겠다,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자폐라고 하니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자기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위장된 모습을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런데 나는 예술가이고 예술가는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상상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한가람미술관 전시에서 100미터를 그렸던 작품 전시와 함께 빛의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 그리고 한지에 그린 그림 200개를 (이이남 작가와 함께) 영상작업으로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현대과학이 나의 손으로 그린 영혼과 결합한 것 같았다. 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더라. 그래서 이것이 엄청난 것이구나, 앞으로 이 작업을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주로 얼굴, 인물을 그리지 않나. 항상 배경과 인물을 대비되게 하고, 색도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한다. 색도 세상에 없는 색이다.

원래 서양화는 물감을 많이 사용한다. 유화 재료이기 때문에 몇 번 발라야 한다. 나는 특히 두툼하게 바른다. 그림에서 신비한 색깔, 빛이 나온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신의 존재가 나에게는 영향이 컸다. 기도와 환상 속에서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보았다. 100호짜리 77개를 연결해서 100미터를 그렸는데 2년 7개월 만에 끝냈다. 그 작품을 유화로 하려면 보통 10년에서 20년이 걸린다. 물감을 바르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내가 쓰러져도 그린다는 각오로 온 힘을 다 모아서 작품을 끄집어낸다. 내가 작업을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이끄는 세계가 있다. 계속 기도하고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다.

한쪽 눈은 실명하셨고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도 안 좋으시고 청력도 80% 이상 잃으셨다고 들었다. 작업 하기 힘드실 텐데 최근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달라.

옛날에 사고로 인해서 한쪽 눈은 실명한 상태이다. 유네스코 전시를 앞두고, 상처의 아픔을 파내면서 우리 친구들 무덤에 들어가는 장면을 50호 15개에 그리는 중에 갑자기 눈이 하얘지는 거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른다고 하더라. 황반 현상으로 빛이 들어오면 사람을 못 본다. 빛이 안 오면 조금씩 보인다. 갑자기 귀도 들리지 않았다. 눈하고 귀가 이런 상태가 되니까 절망적이지 않나. 그런데 반대로 내게 뭔가 암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친구들을 더 깊게 그릴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태어나면 흙으로 태어나 흙으로 죽는다. 이번에 흙으로 지적장애인 형태의 토우 1천 개를 만든다. 또 5·18의 죽은 영혼과 행방불명된 영혼 등을 한지로 군상 1천 개를 만들었다. 땅과 하늘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있다. 그 작업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화가로서 작업으로 표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만들어낼 계획을 갖고 있다.

작업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역사와 개인의 화해와 치유의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제 전시, 유엔이나 유네스코에서 표방하고 있는 주제와 맞닿아 있어서 전시를 여러 번 하게 된 것 같다. 그쪽 전시는 어떤 동기로 하게 되셨고, 보신 분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적장애인을 그린 작품 전시를 열었는데 유엔과 유네스코 전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조금씩 가졌다. 아, 이런 친구들이 이 세상에 있었구나. 실제로는 전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장애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도 작품을 대하면서 관심을 가진다. 내 작품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러한 것에 조금이라도 내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유네스코 전시에서 내 작품과 함께 지적장애인들의 그림을 모아서 한쪽 부스에다 전시를 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참가자들이 모여서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는데, 서아프리카 베냉 공화국 대사가 자기 나라에 와서 문화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문화지원은 정신을 바꿀 수 있어서 너무도 필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 전시를 추진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진행하지 못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문화지원에 대한 요구들이 있다.

100미터짜리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도록에 아이들의 얼굴을 악보에다 음표처럼 그렸다. 비발디 <사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조금은 삐뚤어지고 조금은 뉘어있는 음표”라고 매력적으로 표현하셨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길 원하셨나.

실제로 100미터는 굉장히 길다. 그 전시를 계속하는데 관심이 없더라. 비발디 <사계>를 생각해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모든 무한한 세계가 일 년 단위로 돌아가지 않나. 악보에 우리 친구들을 배치했다. 어떤 친구는 조그맣고 어떤 친구는 몸집이 크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꽃도 넣고 바다의 물고기도 넣고 나비도 넣었다. 나비를 각자 하나씩 띄워서 서로 나비를 통해서 이야기하라고. 봄엔 꽃이 활짝 핀 곳에서 놀게 하고, 여름엔 파란색을 써서 물고기랑 같이 놀게 하고. 각자 특징을 잡아서 그림을 그렸다. 유화에서 그렇게 긴 그림은 최초이다. 작품을 본 사람들이 아주 빛나고 밝게 어떻게 이런 표정을 잡아내는지 놀랍다고 한다. 실제로 그 아이들이 밝다. 우리가 봤을 때나 어둡지 그 애들은 너무 행복하고 천진난만하다. 그것을 내 그림으로 표현해내려고 많이 생각하고 만들어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동참해주고 치유 받았다. 어떤 사람은 그림 절대 팔지 말라고 한다. 이 그림은 팔아선 안 된다는 거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치유해주니까, 이것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대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난리다. 나는 뭐 먹고 사냐고 그랬지.(웃음)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전시나 그림을 보고 장애인 당사자나 그 부모,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

지적장애인 그림을 같이 전시하면, 부모까지 세 명이 붙어야 한다. 김근태 화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화가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부모님들이 “이런 날도 있나요?”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 친구들이 이렇게 잘 그리냐고 그러더라.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고 우리 친구들 그림을 사주었으면 한다. 이 친구들이 떳떳하게 사회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서울에서 지적장애인을 가르치는 젊은 친구들이 넘쳐난다. 조금 더 조직적으로 해서 부모에게 희망을 주고 살 권리를 주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으면 한다. 내가 책을 내주려고 하고 있다. 같이, 더불어서 만들어 가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올 거다. 이 친구들이 성장해서 세계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선생님께 개인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이지 않나. 어떤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달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한가람미술관 전시 후에 쉬고 싶은데 우리 친구들이 계속 나를 괴롭히는 거다. 그래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갔다. 광주에서 상처를 입어서 한 번도 안 갔는데, 찾아가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내년이 5·18 40주년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좋다. 내 그림을 전시할 이유가 있다. 망월동 묘지 앞에다 전시도 하면서 한 달 동안 고백을 하겠다. 살아남은 자의, 뒤돌아 도망쳐 나온 자의 비굴함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죽어간 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담당자가 좋다고 했다. 여러 가지 행사가 많이 있는데, 서로 얼굴 보고 그려주기 작품구상을 하고 있고, 국제 포럼도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오대륙 형상에 천개의 토우를 만들어서 매달아 축제 형식의 치유 개념으로 전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함께가자 160.2×912.1cm / Oil on canvas / 2015

희망 160.2×651.5cm / Oil on canvas / 2015

김근태

1983년 조선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1992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프랑스 파리 그랑슈미에르 모델 연습을 통해 작품의 화두(지적장애인 인물 그리기)를 찾았으며,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 고하도 장애인 요양원 공생원에서 생활하며 장애인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다. 1996년 2번째 전시회부터 2019년 현재까지 오직 장애인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여는 세계 유일의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OECD, 유엔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작품의 예술적,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초대전 등 다수의 전시회를 열었다.

오세형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 팀장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이재범 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작품사진 제공. 김근태

2019년 9월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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