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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형 탈학습-예술교육의 틀 깨기

이슈 쓸모가 아닌 존재를 질문하기

  • 최진 대구교육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 등록일 2021-11-24
  • 조회수1369

이슈

지난해에 발달장애인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연구에 참여했다. 이 연구를 시작한 데는 실은 사적인 관심이 앞섰다. 어린 시절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지적장애 3급을 판정받은 남동생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잘해 줄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흔을 앞둔 동생의 삶은 어떻게 하면 자기 삶을 최소한으로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쓸모’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가족의 걱정과 염려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동생 자신도 (가서 무슨 일을 하건) 그저 출근할 곳이 있는 것에 안도했고, 그렇지 못하면 강박적으로 불안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원하는 것 같았다. 이와 달리 적어도 문화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는 발달장애인이 다른 이들로부터 쓸모를 질문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연구진이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된 것은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지원과 제도의 방향이 ‘직업’ 예술인을 키우는 것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인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나 조력자가 이들을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교육 활동에 참여시킬 때, 상당수는 진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고민하는 기관에서도 이러한 요청과 관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나 조력자는 장애 당사자가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진 자폐아의 서번트 증후군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그저 그리기나 악기 연주 등을 꾸준히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언젠가 번듯하게 이 사회 속에 서서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염원을 가진 듯했다.

연구는 물론 직업예술인을 넘어서서 더 포괄적인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하기는 했지만, 생존전략으로서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그 염원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어쨌든 여기서도 쓸모는 끊임없이 질문되고 있었다. 그 쓸모를 명료화하기 위해, 그들의 활동이나 작품을 예술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지, 여기에 예술교육은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는지 등에 대한 지난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예술교육’이라는 말이 지닌 모순성을 보았다. 만일 ‘교육’이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특정한 학습 목표에 도달하게끔 이끄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럼으로써 피교육자의 선형적인 발달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현대의 예술은 그러한 정형화된 발달과 계몽의 프레임 자체에 제동을 거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역설적이었다. 더군다나 발달장애인은 선형적인 인지 능력의 발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를 지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악보에 제시된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섬세한 음정을 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고, 오늘 느낀 가을을 몸이나 형태,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이드를 안내받으면서 거기에 응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형상화해내기도 했다. 결국 교육이라는 활동에 요청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일어나는 어떠한 화학적 변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더 ‘잘하는 이’가 ‘못하는 이’에게 가르칠 어떤 것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것을 기대한 강사나 매개자는 이내 지치게 되었다고 공통적으로 고백했다. 이 둘 사이가 유지되려면 서로 감각하고 지각하며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받는, 바로 그 화학적 변화가 있어야 했다.

이때 변화는 ‘저 사람은 어떻게 자기 주변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있을까’와 같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끊임없는 상동행동은 그 사람이 낯선 공간을 더듬어보는 패턴일 수도 있고, 옆에서 계속 던지는 질문에도 눈을 맞추지 않고 멍하니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나와는 다른 속도로 낯선 시간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궁금함은 ‘나는 어떻게 내 주변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낯선 공간에 갔을 때 나는 무엇부터 살피는지,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어떤 표정을 짓고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주변을 감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이처럼 사람마다 느끼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표현’의 방식과 속도도 다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의미부여가 필요할 것 같은 예술이라는 말 대신에, 감각과 지각을 가시화하는 행위를 ‘표현’으로 이해해보기로 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의도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 자체가 일상적이고 무뎌진 우리의 감각에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미술이나 음악, 퍼포먼스와 같은 장르에 관심을 가진다기보다, 독특하게 보고 듣고 반응하는 것들을 시각, 청각, 움직임이라는 감각 요소를 통해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행위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라고 형용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이들 중 상당수가 어릴 때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까지 보호자가 대신 해주는 수동성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러한 몸과 움직임의 반경은 표현의 방식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타인 혹은 사물과 소통함으로써 그들의 몸과 움직임의 반경이 점차 넓어진 경우도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표현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일 발달장애인에게 ‘예술교육’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장르에서 탁월성을 보일 수 있는 훈련으로서가 아니라 감각하고 지각하는 다른 방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표현을 각자가 세계를 만나는 언어의 형상화로서 이해해줄 수 있는 어디쯤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결국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지각하게끔 하는 누군가의 표현을 만나서 나의 일상적인 감각과 지각을 질문의 영역으로 묶어두고 다시 느끼거나 생각하게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쓸모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면,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이 팍팍한 세상 속에서 쓸모의 방향 정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발달장애인의 느슨한 존재 방식 그 자체가, 강박적으로 쓸모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존재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예술적인 어떤 것은 아닐까.

* 이 글은 2020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진행한 「발달장애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조사 및 정책과제 수립 연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을 두고 있다.
[연구보고서] 바로가기 링크
최진

최진

대구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예술교육의 의미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교육과 정치』(공저)가 있고, 논문으로는 「정치적 존재방식을 위한 예술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jinchoi@dnue.ac.kr

사진제공. 필자(로아트 작가의 작품)

2021년 12월 (26호)

상세내용

이슈

지난해에 발달장애인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연구에 참여했다. 이 연구를 시작한 데는 실은 사적인 관심이 앞섰다. 어린 시절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지적장애 3급을 판정받은 남동생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잘해 줄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흔을 앞둔 동생의 삶은 어떻게 하면 자기 삶을 최소한으로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쓸모’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가족의 걱정과 염려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동생 자신도 (가서 무슨 일을 하건) 그저 출근할 곳이 있는 것에 안도했고, 그렇지 못하면 강박적으로 불안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원하는 것 같았다. 이와 달리 적어도 문화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는 발달장애인이 다른 이들로부터 쓸모를 질문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연구진이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된 것은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지원과 제도의 방향이 ‘직업’ 예술인을 키우는 것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인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나 조력자가 이들을 미술이나 음악 등의 예술교육 활동에 참여시킬 때, 상당수는 진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고민하는 기관에서도 이러한 요청과 관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나 조력자는 장애 당사자가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진 자폐아의 서번트 증후군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그저 그리기나 악기 연주 등을 꾸준히 배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언젠가 번듯하게 이 사회 속에 서서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염원을 가진 듯했다.

연구는 물론 직업예술인을 넘어서서 더 포괄적인 발달장애인의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하기는 했지만, 생존전략으로서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그 염원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어쨌든 여기서도 쓸모는 끊임없이 질문되고 있었다. 그 쓸모를 명료화하기 위해, 그들의 활동이나 작품을 예술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지, 여기에 예술교육은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는지 등에 대한 지난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예술교육’이라는 말이 지닌 모순성을 보았다. 만일 ‘교육’이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특정한 학습 목표에 도달하게끔 이끄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럼으로써 피교육자의 선형적인 발달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현대의 예술은 그러한 정형화된 발달과 계몽의 프레임 자체에 제동을 거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역설적이었다. 더군다나 발달장애인은 선형적인 인지 능력의 발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를 지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악보에 제시된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섬세한 음정을 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고, 오늘 느낀 가을을 몸이나 형태,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이드를 안내받으면서 거기에 응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형상화해내기도 했다. 결국 교육이라는 활동에 요청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일어나는 어떠한 화학적 변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더 ‘잘하는 이’가 ‘못하는 이’에게 가르칠 어떤 것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것을 기대한 강사나 매개자는 이내 지치게 되었다고 공통적으로 고백했다. 이 둘 사이가 유지되려면 서로 감각하고 지각하며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받는, 바로 그 화학적 변화가 있어야 했다.

이때 변화는 ‘저 사람은 어떻게 자기 주변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있을까’와 같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끊임없는 상동행동은 그 사람이 낯선 공간을 더듬어보는 패턴일 수도 있고, 옆에서 계속 던지는 질문에도 눈을 맞추지 않고 멍하니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나와는 다른 속도로 낯선 시간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궁금함은 ‘나는 어떻게 내 주변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낯선 공간에 갔을 때 나는 무엇부터 살피는지,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어떤 표정을 짓고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주변을 감각하고 느끼고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이처럼 사람마다 느끼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표현’의 방식과 속도도 다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의미부여가 필요할 것 같은 예술이라는 말 대신에, 감각과 지각을 가시화하는 행위를 ‘표현’으로 이해해보기로 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의도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 자체가 일상적이고 무뎌진 우리의 감각에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미술이나 음악, 퍼포먼스와 같은 장르에 관심을 가진다기보다, 독특하게 보고 듣고 반응하는 것들을 시각, 청각, 움직임이라는 감각 요소를 통해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행위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라고 형용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이들 중 상당수가 어릴 때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까지 보호자가 대신 해주는 수동성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러한 몸과 움직임의 반경은 표현의 방식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타인 혹은 사물과 소통함으로써 그들의 몸과 움직임의 반경이 점차 넓어진 경우도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표현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만일 발달장애인에게 ‘예술교육’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장르에서 탁월성을 보일 수 있는 훈련으로서가 아니라 감각하고 지각하는 다른 방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표현을 각자가 세계를 만나는 언어의 형상화로서 이해해줄 수 있는 어디쯤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결국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지각하게끔 하는 누군가의 표현을 만나서 나의 일상적인 감각과 지각을 질문의 영역으로 묶어두고 다시 느끼거나 생각하게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쓸모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면,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이 팍팍한 세상 속에서 쓸모의 방향 정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발달장애인의 느슨한 존재 방식 그 자체가, 강박적으로 쓸모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존재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예술적인 어떤 것은 아닐까.

* 이 글은 2020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진행한 「발달장애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조사 및 정책과제 수립 연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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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

최진

대구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교육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예술교육의 의미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교육과 정치』(공저)가 있고, 논문으로는 「정치적 존재방식을 위한 예술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jinchoi@dn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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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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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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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교육' 이라는 이름 하에 정말 우리는 그 누구보다 잘하기 위해,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교육' 이라는 말이 '예술' 에 붙어 전혀 상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단어가 '예술교육' 이 되었습니다. 많은 장애부모들이 이 '예술교육' 을 통해 자신의 아이들의 재능이 발견되거나 여기에서 직업으로서의 희망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정말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예술' 앞에서는 누가 높고 낮음을 따질 필요 없이 각자의 느낌을 표현하는 그 자체가 존중되어지면 좋을 것 같은데..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씁쓸함이 느껴져서 슬펐습니다. 우리의 예술교육을 돌아보며 어떤 예술을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21-11-25 19: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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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느끼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표현’의 방식과 속도도 다를 수 있다는 것과 복잡한 의미부여가 필요할 것 같은 예술이라는 말 대신에, 감각과 지각을 가시화하는 행위를 ‘표현’으로 이해해보려는것에 다시한번저도 많은생각을 하고가게되네요 .장애라는 틀을 인식하는것 자체가 예술에 어울리지않다고봐요 장애 비장애모두를 가르지않고 각자의표현으로바라보고싶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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