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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직 <렛츠 버딩!>

리뷰 들리지만, 듣지 않았던, 듣고 싶은 소리

  • 김시락 공연예술가
  • 등록일 2022-06-29
  • 조회수1189

리뷰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듣다’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감각기관을 통해 알아차리다’이다.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듣기는 귀라는 감각기관에 음파가 전해지는 것이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듣기’에는 ‘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다’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 경우 앞서 정의한 듣기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며, 듣는 대상의 주체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너는 내 말을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지”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라거나 음악 볼륨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된 소리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인지적 처리 과정을 수행해달라는 요청에 가깝다.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잘 듣고 있다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사를 보면서, 그가 말을 참 잘 들어준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파의 전달을 넘어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건 신체의 감각기관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수용하는 과정은 머리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잘 듣는 일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상대방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면 아무리 상대방이 귀한 말을 해도 하찮게 들린다. 두 존재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낯선 이의 말과 정서적으로 친밀한 이의 말을 다르게 들을 것이다. 소리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듣는 행위는 감각기관의 기능과 별개로 듣는 이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

‘말하기’도 ‘듣기’와 다르지 않다. 말하기와 듣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인 말하기와 듣기는 소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집회와 시위는 대표적인 ‘말하기’에 속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게 ‘듣기’를 요청하며 ‘말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대개의 시위와 집회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 큰소리를 내거나 통행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만약 야트막한 물리적 턱이 삶을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말하기’가 강요와 폭력으로 들린다면, 잘못된 듣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발언의 중요도가 발언자의 사회적 권력의 크기와 비례하거나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서툰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는 어떨까? 말하는 이의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다반사다. 또 사람들이 집중해서 들어주는 소리 중에는 힘 있는 이들의 편향된 말도 많다. 목소리가 작은 이들이 말하기 어렵고, 작은 목소리를 듣는 것에 서툰 사회인 셈이다.

그것이 우리가 본격적인 ‘버딩’에 앞서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다. 공연은 듣기가 서툰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서로의 감각을 가볍게 깨우며 시작한다. 충분히 천천히. 함께 새가 될 이들과 새 이름이 적힌 명찰을 목에 걸고, 내가 될 새를 말하고, 다른 이들이 될 새를 듣는다. 새에 관한 설명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있다. “모든 ○○이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개별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이상함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부드러운 제안이다. 또,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새를 공유하고, 몸에서 새와 닮은 부분인 날개뼈를 발견하고, ‘새소리’로 퉁칠 수 없는 뚜렷하고 고유한 특색을 지닌 소리들을 들어보기도 한다. 이전에도 들렸지만, 듣지 않았던 소리를 듣기 위한 연습이다. 풍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새는 그렇게 듣고 싶은 존재가 되어간다.

준비운동을 마친 후 필요한 건 ‘안다’는 착각과 자만을 경계하는 일이다. 안다는 착각과 자만은 귀를 막고 듣기를 방해한다. 나 역시 꾀꼬리 소리를 안다고 착각했지만, ‘새 하는 중’에 그 착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꾀꼬리는 구애할 때와 경계할 때 다른 종이라 느껴질 정도로 판이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꾀꼬리의 소리였고, 그 꾀꼬리만의 소리이기도 했다. 새도 사람처럼 기분과 상황에 따라 수많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오늘 내게 소리를 들려준 꾀꼬리도 내일은 다른 소리를 들려줄 수도 있다. 사람이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란 걸 알지만, 수어가 전 세계 공통어인 줄 알던 때가 있었다. 점자가 전 세계 공용어냐는 질문을 받고 어이없어했음에도 말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시각장애인이라도 전맹이나 저시력처럼 정도가 다른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온전히 알기 어렵다. 하물며 다른 유형의 장애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안다는 착각과 자만을 버리고 지레짐작하는 대신 질문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이성직 작가의 작별 인사가 도착했다. 날기 연습을 하는 새를 봤다고 했다. 그 만남을 반가워하면서도 그는 새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탐조 활동이 새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습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지향점이 ‘탐조’를 넘어서 ‘새 하는 중’인 이유도 그럴 것이다. 새의 이름을 갖고 새가 되어 보았던 시간이 새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새의 입장을 생각해볼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다 함께 새가 되기 위해 나누었던 고민과 실천 또한 공연이 끝난 후에도 내게 남았다. 듣고 싶은 대상이 생겼을 때나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할 때, 나는 ‘○○ 하는 중’을 시도할 것이다.

‘새 하는 중’은 시각장애인인 나를 배려하는 공연이기도 했지만 내게 배려하는 법을 상기시키는 공연이기도 했다. 작가의 시선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면서도 따뜻하고 세심했다. 작가의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기존의 것들을 어떻게 다시 담을지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다.

  • 필자는 큰부리까마귀라는 새이름을 얻었다.
    몸에서 새와 닮은 부분인 날개뼈를 만져보는 필자(왼쪽)

  • 창경궁에서 진행한 ‘새 듣기’ 편.
    사람들에게 새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알려준다.

렛츠 버딩!

이성직 | 2022.5.19.~5.22. | 노들장애인야학-창경궁-노들장애인야학

[2021년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에서 쇼케이스로 개발한 프로그램을 듣고 보는 감각으로 나누어 관객을 만난다. 새에 관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새의 몸을 흉내 내본다. 새를 찾기 위해 이동하거나 기다리고, 새를 보거나 듣거나 촬영하거나 녹음한다. 새의 이름을 조류도감에서 찾아보고, 새에 관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찰흙으로 새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새와 우리를 연결하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새 하는 중’이다. 관객이 다양한 감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드는 예술가 이성직이 제작했다. 대표작으로 <렛츠 버딩!> <만성탈수 간병하기> <감자전 www.gamja-geon.com> <김장하다> <아프면 낫는다 건강백세!>가 있다.

전시정보. <렛츠 버딩!> 바로가기(링크)
<렛츠 버딩!> 영상 보기(링크)

김시락

공연예술가. 창작집단 선넘어선 소속. 제약을 넘어선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창작자이고, 볼 수 없어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을 포착해내는 소시민이다. 예술을 매개로 제약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활동을 한다. 코끼리들이 웃는다 <커뮤니티 대소동> 공동기획·출연, 서울문화재단 소리창작 워크숍 <상상경작> 공동기획·운영, 서울문화재단 움직임워크숍 <봉인해제> 공동기획·운영에 참여했다.
qpseh0113@naver.com

사진 제공. 이성직(ⓒTJ CHOE)

2022년 7월 (32호)

김시락

김시락 

공연예술가. 창작집단 선넘어선 소속. 제약을 넘어선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창작자이고, 볼 수 없어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을 포착해내는 소시민이다. 예술을 매개로 제약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활동을 한다. 코끼리들이 웃는다 <커뮤니티 대소동> 공동기획·출연, 서울문화재단 소리창작 워크숍 <상상경작> 공동기획·운영, 서울문화재단 움직임워크숍 <봉인해제> 공동기획·운영에 참여했다.
qpseh0113@naver.com

상세내용

리뷰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듣다’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감각기관을 통해 알아차리다’이다.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듣기는 귀라는 감각기관에 음파가 전해지는 것이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듣기’에는 ‘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다’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 경우 앞서 정의한 듣기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며, 듣는 대상의 주체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너는 내 말을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지”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라거나 음악 볼륨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된 소리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인지적 처리 과정을 수행해달라는 요청에 가깝다.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잘 듣고 있다가 조목조목 반박하는 형사를 보면서, 그가 말을 참 잘 들어준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음파의 전달을 넘어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건 신체의 감각기관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수용하는 과정은 머리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잘 듣는 일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상대방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면 아무리 상대방이 귀한 말을 해도 하찮게 들린다. 두 존재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낯선 이의 말과 정서적으로 친밀한 이의 말을 다르게 들을 것이다. 소리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듣는 행위는 감각기관의 기능과 별개로 듣는 이의 주체적인 참여를 통해 가능하다.

‘말하기’도 ‘듣기’와 다르지 않다. 말하기와 듣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인 말하기와 듣기는 소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집회와 시위는 대표적인 ‘말하기’에 속한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게 ‘듣기’를 요청하며 ‘말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대개의 시위와 집회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 큰소리를 내거나 통행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만약 야트막한 물리적 턱이 삶을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말하기’가 강요와 폭력으로 들린다면, 잘못된 듣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발언의 중요도가 발언자의 사회적 권력의 크기와 비례하거나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여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듣기’와 ‘말하기’가 서툰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는 어떨까? 말하는 이의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다반사다. 또 사람들이 집중해서 들어주는 소리 중에는 힘 있는 이들의 편향된 말도 많다. 목소리가 작은 이들이 말하기 어렵고, 작은 목소리를 듣는 것에 서툰 사회인 셈이다.

그것이 우리가 본격적인 ‘버딩’에 앞서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다. 공연은 듣기가 서툰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서로의 감각을 가볍게 깨우며 시작한다. 충분히 천천히. 함께 새가 될 이들과 새 이름이 적힌 명찰을 목에 걸고, 내가 될 새를 말하고, 다른 이들이 될 새를 듣는다. 새에 관한 설명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있다. “모든 ○○이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개별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이상함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부드러운 제안이다. 또,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새를 공유하고, 몸에서 새와 닮은 부분인 날개뼈를 발견하고, ‘새소리’로 퉁칠 수 없는 뚜렷하고 고유한 특색을 지닌 소리들을 들어보기도 한다. 이전에도 들렸지만, 듣지 않았던 소리를 듣기 위한 연습이다. 풍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새는 그렇게 듣고 싶은 존재가 되어간다.

준비운동을 마친 후 필요한 건 ‘안다’는 착각과 자만을 경계하는 일이다. 안다는 착각과 자만은 귀를 막고 듣기를 방해한다. 나 역시 꾀꼬리 소리를 안다고 착각했지만, ‘새 하는 중’에 그 착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꾀꼬리는 구애할 때와 경계할 때 다른 종이라 느껴질 정도로 판이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꾀꼬리의 소리였고, 그 꾀꼬리만의 소리이기도 했다. 새도 사람처럼 기분과 상황에 따라 수많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오늘 내게 소리를 들려준 꾀꼬리도 내일은 다른 소리를 들려줄 수도 있다. 사람이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란 걸 알지만, 수어가 전 세계 공통어인 줄 알던 때가 있었다. 점자가 전 세계 공용어냐는 질문을 받고 어이없어했음에도 말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시각장애인이라도 전맹이나 저시력처럼 정도가 다른 시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온전히 알기 어렵다. 하물며 다른 유형의 장애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안다는 착각과 자만을 버리고 지레짐작하는 대신 질문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이성직 작가의 작별 인사가 도착했다. 날기 연습을 하는 새를 봤다고 했다. 그 만남을 반가워하면서도 그는 새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탐조 활동이 새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습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지향점이 ‘탐조’를 넘어서 ‘새 하는 중’인 이유도 그럴 것이다. 새의 이름을 갖고 새가 되어 보았던 시간이 새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새의 입장을 생각해볼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다 함께 새가 되기 위해 나누었던 고민과 실천 또한 공연이 끝난 후에도 내게 남았다. 듣고 싶은 대상이 생겼을 때나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할 때, 나는 ‘○○ 하는 중’을 시도할 것이다.

‘새 하는 중’은 시각장애인인 나를 배려하는 공연이기도 했지만 내게 배려하는 법을 상기시키는 공연이기도 했다. 작가의 시선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면서도 따뜻하고 세심했다. 작가의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기존의 것들을 어떻게 다시 담을지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다.

  • 필자는 큰부리까마귀라는 새이름을 얻었다.
    몸에서 새와 닮은 부분인 날개뼈를 만져보는 필자(왼쪽)

  • 창경궁에서 진행한 ‘새 듣기’ 편.
    사람들에게 새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알려준다.

렛츠 버딩!

이성직 | 2022.5.19.~5.22. | 노들장애인야학-창경궁-노들장애인야학

[2021년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에서 쇼케이스로 개발한 프로그램을 듣고 보는 감각으로 나누어 관객을 만난다. 새에 관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새의 몸을 흉내 내본다. 새를 찾기 위해 이동하거나 기다리고, 새를 보거나 듣거나 촬영하거나 녹음한다. 새의 이름을 조류도감에서 찾아보고, 새에 관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찰흙으로 새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새와 우리를 연결하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새 하는 중’이다. 관객이 다양한 감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드는 예술가 이성직이 제작했다. 대표작으로 <렛츠 버딩!> <만성탈수 간병하기> <감자전 www.gamja-geon.com> <김장하다> <아프면 낫는다 건강백세!>가 있다.

전시정보. <렛츠 버딩!> 바로가기(링크)
<렛츠 버딩!> 영상 보기(링크)

김시락

공연예술가. 창작집단 선넘어선 소속. 제약을 넘어선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창작자이고, 볼 수 없어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을 포착해내는 소시민이다. 예술을 매개로 제약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활동을 한다. 코끼리들이 웃는다 <커뮤니티 대소동> 공동기획·출연, 서울문화재단 소리창작 워크숍 <상상경작> 공동기획·운영, 서울문화재단 움직임워크숍 <봉인해제> 공동기획·운영에 참여했다.
qpseh0113@naver.com

사진 제공. 이성직(ⓒTJ CHOE)

2022년 7월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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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03: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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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기 위해 잘 경청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스스로 안다는 착각을 내려놓고 사회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듣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들음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우리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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