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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세우기

이슈 매끄러운 장애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 문영민 장애예술 연구자
  • 등록일 2022-06-29
  • 조회수1153

이슈

최근 장애인의 건강 경험을 수집하는 인터뷰를 하러 다니고 있다. 인터뷰에서 ‘어느 날 아침’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을 자주 만났다. 어느 날 아침 한쪽 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거나, 어느 날 아침 한쪽 다리가 퉁퉁 부어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거나,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일상이 180도 변화했다는 이야기들. 장애를 가진 몸은 갑작스럽게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 예측 불가능함을 가정하고 일상이 구성된다. 집 근처에 접근 가능한 병원을 알아두고, 가능한 정보와 네트워크로 안전망을 만들고,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쓰기 위해 일상생활을 루틴화한다. 그러나 몸의 예측 불가능함을 매끄럽게 조정해서 일상을 꾸려나가는 데 도가 튼 장애인일지라도, 장애를 가진 몸의 시간과 속도와 어긋나 돌아가는 세상에 진입하면 다시 일상이 삐걱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고 10분을 기다려야 할지, 2시간 기다려야 할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던 누군가는 서비스 조사 기준의 변화로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반 토막 난 서비스 시간으로 일상을 꾸려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몸에서, 나의 몸과 세상이 만나는 경계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지는 혼란으로부터 일상을 어떻게 매끄럽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예측 불가능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 전문기자인 룰루 밀러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평온하던 일상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경험한 후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조던은 평생을 바쳐 수집한 어류와 그 이름들이 담긴 수백 개의 표본 유리단지가 어느 날 아침 지진으로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한다. 그 혼란의 순간에도 조던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바늘을 집어 들고 구해낼 수 있는 물고기와 이름표들을 실로 꿰어 연결했다. 혼란 속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내가 늘 가지고 싶던 삶의 태도이다.

***

대학교를 졸업하고 2013년까지, 나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차를 운전하고 퇴근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이렇게 평생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며 30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괴로웠다. 그 시기에 연극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장애예술에 대한 고민을 확장하기 위해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을 만들었다. 첫해부터 여러 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근사한 연극도 만들었다. 그해 겨울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왜 회사를 그만두고 연극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인생에 도약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늘 끌려다녔다고 생각해온 인생에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고 선택했던 일이다.

‘짓’은 해를 세 번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애예술과 미학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장애를 가진 배우의 역량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훈련의 방법론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있었다. 장애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특정한 지점에서 부딪혔다. 장애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모였기에 마찰은 불가피했던 것 같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이라면 그 갈등을 잘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우리의 신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결합한다면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극 몇 편과 보고서 몇 권을 남기고, 2017년 ‘짓’은 공식적으로 폐업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장애예술 영역에서 창작자로 참여할 일이 더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고, 작업하며 고민했던 질문들, 경험들도 ‘짓’의 폐업과 함께 모두 휘발해버린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0set 프로젝트’의 공연장 접근성 프로젝트와 만났다. 공연에 창작자로 참여한다는 것이 또 다른 실패나 오점이 될까 봐, 삶에 또 다른 혼란을 만드는 일일까 봐 두려웠다. 신념이나 확신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저 즐겁게 공연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느슨한 결합이,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과의 멋진 만남으로, 연구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2022년의 내가 [이음 온라인]의 기획위원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것이 내가 확신을 가지고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

룰루 밀러는 조던의 확신이 조던 자신과 타인의 삶에 상처를 남겼을 뿐 아니라, 조던이 평생을 바쳐 분류했던 ‘어류’라는 종이 사실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250쪽)로 닦인다고 말한다. 나 역시 예측 불가능한 삶에 필요한 것은 ‘확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예술 담론이 확대되며 장애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동의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눈이 반짝반짝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아름답고 윤리적인 만남으로만 가득한 매끄럽게 닦여있는 길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은 갈등과 충돌로 가득 찬 까끌까끌한 비포장도로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걸어가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다정한 연결들과 만나게 된다. 올해의 웹진 [이음]이 당신이 까끌까끌한 장애예술이라는 오솔길 입구에 접어들었을 때,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문영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서 장애인 공연예술, 장애정체성, 장애인의 몸, 장애인의 건강 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 극단 0set의 공연 <연극의 3요소> <불편한 입장들>에 참여하였고, 공연으로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알리는 활동에 관심이 있다. 『나는, 휴먼』을 공동번역했다.
saojungym@daum.net

사진 제공. 필자

2022년 7월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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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최근 장애인의 건강 경험을 수집하는 인터뷰를 하러 다니고 있다. 인터뷰에서 ‘어느 날 아침’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을 자주 만났다. 어느 날 아침 한쪽 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거나, 어느 날 아침 한쪽 다리가 퉁퉁 부어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거나,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일상이 180도 변화했다는 이야기들. 장애를 가진 몸은 갑작스럽게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 예측 불가능함을 가정하고 일상이 구성된다. 집 근처에 접근 가능한 병원을 알아두고, 가능한 정보와 네트워크로 안전망을 만들고,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쓰기 위해 일상생활을 루틴화한다. 그러나 몸의 예측 불가능함을 매끄럽게 조정해서 일상을 꾸려나가는 데 도가 튼 장애인일지라도, 장애를 가진 몸의 시간과 속도와 어긋나 돌아가는 세상에 진입하면 다시 일상이 삐걱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고 10분을 기다려야 할지, 2시간 기다려야 할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던 누군가는 서비스 조사 기준의 변화로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반 토막 난 서비스 시간으로 일상을 꾸려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몸에서, 나의 몸과 세상이 만나는 경계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지는 혼란으로부터 일상을 어떻게 매끄럽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예측 불가능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 전문기자인 룰루 밀러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평온하던 일상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경험한 후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조던은 평생을 바쳐 수집한 어류와 그 이름들이 담긴 수백 개의 표본 유리단지가 어느 날 아침 지진으로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한다. 그 혼란의 순간에도 조던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바늘을 집어 들고 구해낼 수 있는 물고기와 이름표들을 실로 꿰어 연결했다. 혼란 속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딛는 것, 그것이 내가 늘 가지고 싶던 삶의 태도이다.

***

대학교를 졸업하고 2013년까지, 나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차를 운전하고 퇴근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이렇게 평생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며 30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괴로웠다. 그 시기에 연극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장애예술에 대한 고민을 확장하기 위해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을 만들었다. 첫해부터 여러 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근사한 연극도 만들었다. 그해 겨울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왜 회사를 그만두고 연극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인생에 도약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늘 끌려다녔다고 생각해온 인생에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고 선택했던 일이다.

‘짓’은 해를 세 번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애예술과 미학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장애를 가진 배우의 역량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훈련의 방법론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있었다. 장애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특정한 지점에서 부딪혔다. 장애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모였기에 마찰은 불가피했던 것 같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이라면 그 갈등을 잘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우리의 신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결합한다면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극 몇 편과 보고서 몇 권을 남기고, 2017년 ‘짓’은 공식적으로 폐업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장애예술 영역에서 창작자로 참여할 일이 더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고, 작업하며 고민했던 질문들, 경험들도 ‘짓’의 폐업과 함께 모두 휘발해버린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0set 프로젝트’의 공연장 접근성 프로젝트와 만났다. 공연에 창작자로 참여한다는 것이 또 다른 실패나 오점이 될까 봐, 삶에 또 다른 혼란을 만드는 일일까 봐 두려웠다. 신념이나 확신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저 즐겁게 공연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느슨한 결합이,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과의 멋진 만남으로, 연구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2022년의 내가 [이음 온라인]의 기획위원으로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것이 내가 확신을 가지고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

룰루 밀러는 조던의 확신이 조던 자신과 타인의 삶에 상처를 남겼을 뿐 아니라, 조던이 평생을 바쳐 분류했던 ‘어류’라는 종이 사실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250쪽)로 닦인다고 말한다. 나 역시 예측 불가능한 삶에 필요한 것은 ‘확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예술 담론이 확대되며 장애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동의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눈이 반짝반짝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아름답고 윤리적인 만남으로만 가득한 매끄럽게 닦여있는 길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은 갈등과 충돌로 가득 찬 까끌까끌한 비포장도로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걸어가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다정한 연결들과 만나게 된다. 올해의 웹진 [이음]이 당신이 까끌까끌한 장애예술이라는 오솔길 입구에 접어들었을 때,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문영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서 장애인 공연예술, 장애정체성, 장애인의 몸, 장애인의 건강 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음온라인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 극단 0set의 공연 <연극의 3요소> <불편한 입장들>에 참여하였고, 공연으로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알리는 활동에 관심이 있다. 『나는, 휴먼』을 공동번역했다.
saojungym@daum.net

사진 제공. 필자

2022년 7월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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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1 1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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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방향이 같아 함께 모였는데 돌발변수, 상황의 변화 등에 대처하는 것들에 대해서 정말 다른 다양한 생각들이 나오더라구요. 대부분 다수결로 결과를 도출하여 진행해 나갔지만 결국 소수의 개성과 특성이 강한 활동가들의 주장이 묻히기도 하다보니 조직은 흔들리게 되고...맞고 틀리고는 없고 과정에서 다양함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게 중요한데 장애의 세계에서도 서로 다른 장애에 대한 이해의 벽은 존재하더라구요 매끄러운 장애예술은 없다는데 공감합니다. 날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적절한 타협도 필요한 세상입니다

2022-06-30 14: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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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실패는 새로운 '짓'으로 보상받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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