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예술가는 어떤 질문으로 예술을 할까? 예술가로서 자신을 성장하게 한 것은 무엇이고 그 속에는 어떤 기회와 과정이 있었을까? 장애예술가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오랫동안 꾸준히 예술 활동을 해오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예술 활동 이력과 의미를 들어본다.
불이(不二)
2024년 3월 30일 급성 호흡부전으로 코마 상태에 빠지면서 생사를 오간 적이 있다. 이후 재활한 지 2개월이 지날 때쯤 청탁 전화를 받았다. 문학을 향한 나의 태도는 아무리 힘들어도 죽을힘을 다해서 시를 쓰는 것이었다. 산소포화도가 30%를 오르내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겨지고 나니 시는 더욱 간절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시·서·화(詩·書·畵)가 동원(同原)”이고 그간 살아온 일상의 삶에서 달팽이처럼 짊어진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본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산 통도사에 있는 ‘불이문(不二門)’처럼 예술은 일상에서 빚어지는 ‘찰나’에 자신을 스스로 ‘자각’하는 해탈문을 지나게 돕는 것 같다. 이렇듯 내 안과 밖을 꺼내 놓아야 하는 아픈 글쓰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인연(因緣)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은 태어나 유년을 보낸 고향이다. 아버지는 ‘대목’이셨고 어머니는 ‘칠장이’셨다. 나는 생후 8개월에 장애를 얻었고 열네 살까지 손에 신발을 끼고 기어다녔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만들어 준 목발을 짚고 비로소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다. 천륜의 품을 벗어나 ‘직립보행’ 이후 지금껏 나에게 있어 문학은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지팡이였다. 그렇게 스물다섯에 떠난 고향과 정착한 대전은 동질감과 이질감이 깃들어 있다.
1993년에 첫 시집 『낮달의 춤』을 출간하고, 『사인행』(2006), 시선집 『섬진이야기』(2008), 시집 『연가부』(2008) 등 꾸준히 작품을 쓰고 공모전에 출품해 선정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 계간 [시로 여는 세상]에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물그림자』(2012), 2인 시집 『동박새』, 『도마시장』(2014), 『新 금강별곡』(2016), 『모성의 만다라』(2017), 공동시집 『반추하다』(2018), 『꽃길』(2018), 『자복』(2019), 『노동의 꽃』(2020), 『기억 속 벌교의 문양』(2020), 시선집 『사라쌍수 열두 그루』(2021), 『흑꼬리도요』(2021), 『갈참나무 숲에 깃든 열네 살』(2021), 『금강에 백석의 흰 당나귀가 지나갔다』(2022),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들어앉은 긴수염고래』(2023)에 이르기까지 매년 거르지 않고 작품집을 발표했다. 하마터면 2024년 발표를 앞둔 시집 『여자만의 달과 지리산 칸타타』는 유고 시집이 될 뻔하였다.
고향을 떠난 후 새로운 인연의 결이 생겼다. 결혼 후 두 아이와 두 분의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이다. 서예가이자 전각의 대가인 석헌 임재우 선생님과 지금은 소천하신 문인화가 자헌 이성순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두 분 스승님의 문하에서 많은 선후배 동료와 함께한 서른 이후 늦깎이 공부는 17년간 이어지고 나서야 독립하게 되었다. 문학은 독학하였으나 서예, 문인화, 전각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혜량할 수 없는 깊은 기쁨을 맛보았다.
이렇듯 고향과 부모 품을 떠난 사승 관계에 기대어 공부하는 것과 아이 키우는 기쁨은 새로운 집을 하나 짓는 것과 같았다.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미술협회, 대전문인협회, 대전미술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는 충남 시인협회가 자양분이 되었다. 또한 자헌 이성순 선생이 활동하던 장애인 미술 선교를 돕게 되면서 예술이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로 스며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 후로 2004년 전문예술단체 ‘장애인인식개선 오늘’을 설립했다. 단체를 통해 ‘장애인 문화운동’을 시작하면서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함께’가 되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 나의 장애는 많은 인연을 통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도록 하였다. 텅 빈 세상에서 오늘을 견딘다는 것은 길 한가운데서 장대비를 만나는 것과 같다. 장애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헌법적 지위를 사회적 함의로, 온전한 대의를 위해 겨자씨만큼의 이해당사자로서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필로그
인연은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코끼리 무덤처럼 깊은 슬픔이 쌓이기도 한다. 나의 장애는 부모의 가슴에 대못이 되었고, 그것이 그분들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평생이 불행했다. 대물림된 가난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없었지만, 장애로 인해 사회에서 목도하게 되는 부조리에 대한 통점은 ‘예술’을 통해 잊을 수 있었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국가가 국민을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이분화하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거리에서 혹은 자신이 가지고 노력하는 자리에서 많은 장애예술가와 활동가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장애인 박재홍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다. 중년의 길목에서 독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한남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많은 장애인이 ‘창작’을 하지만 발표할 지면을 확보하거나 학술적으로 이론화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결국 “궁한 놈이 우물 판다”고,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마음을 장애인 문화운동을 통해 다지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내 생의 한가운데서 절박하게 매달렸던 것이 문학이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고 나서야 만난 새벽녘 창밖을 향한 눈길 속에서 시는 힘들지 않고 더욱 간절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불이문을 지나고서 묵언 수행했던 것을 오늘에야 내 설움처럼 내어놓는다. “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 백 척 높이의 흔들리는 장대 위에서 한 발 더 내디디면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을 좌우명으로 삼아 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며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위해 정진하겠다.
박재홍
쉼 없이 시·서·화·각(詩·書·畵·刻)을 한다. 전문예술단체 ‘장애인인식개선오늘’ 대표이자 반년간지 [문학마당] 발행인 겸 주간이다. 현재 한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1993년 첫 시집 『낮달의 춤』 발표 이후 2010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했다. 『도마시장』 외 19권의 작품집을 발표했다. 그 외 실천문학에서 발표한 시집 『갈참나무 숲에 깃든 열네 살』은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와 꼬꼬북 추천작가 그리고 연가곡집으로 발표되었다. 희곡 「연심」은 2020년에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 2004년 장애인인식개선 오늘 설립 이후 현재까지 장애인 문학의 확산·보급, 공연과 전시 및 포럼 개최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장애인 문화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pjh2147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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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필자
2024년 8월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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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시인의 오랜 예술 활동 이력을 들으면서, 그는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자신의 예술적 자원으로 삼아 새로운 표현 방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깊은 통찰과 감정을 담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 활동은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장애예술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