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린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러코스터 같은 목소리와 방방 뛰는 듯한 발걸음. 한쪽 손에는 노란색 줄자를 들고 검은색 백팩을 둘러매고, 어깨에는 에코백을 걸친 승완 씨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승완 씨.
안녕하세요.

2~3번의 만남을 통해 우리 안엔 규칙이 생겼다. 2시 30분에 만나 한 시간 정도 그림을 그리다가 3시 50분부터 4시 13분까지 간식을 먹고 밖으로 나가 걷는다. 의자에 앉아 가방 속 표지판들을 책상에 쏟아낸다. 빨간색 테두리를 가진 동그라미 표지판들과 직사각형의 표지판들.
코팅된 것들과 코팅되지 않아 꾸깃꾸깃해진 표지판들이 뒤섞여 있다.
1.8m 1.9m 2.1m 2.2m 2.7m 3.1m 머리조심 머리조심 충돌주의 화물차 x

승완 씨는 얇은 빨간색 펜을 집어 들고는 동그라미를 더 동그랗게, 검은색 펜을 집어 들고는 숫자의 끝을 단단하게 각을 세우는 작업에 몰두한다. 맞은편에 앉아 승완 씨가 작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수많은 터치들이 겹쳐져 미묘한 명암의 차이와 번짐이 보인다. 긴 자와 짧은 자를 이용해서 글자와 글자의 간격을 확인하고 모자란 1mm를 채우기 위해 종이 위로 펜이 빠르게 지나간다. 승완 씨는 같은 2.1m 표지판을 그리지만, 매번 다른 2.1m 표지판을 그린다. 이 표지판들은 어디로 갈까?

승완_ 2019cm는 몇 m예요?
백구_ 20.19m요. 2019mm는 몇 cm예요?
승완_ 201.9cm.
백구_ 2019m는 몇 cm예요?
승완_ 201.900cm.

승완 씨는 cm를 m로 바꾸고, cm를 다시 mm로 단위를 바꾸며 숫자로 놀이를 즐긴다.

승완 씨.
........
승완 씨.
네.
이 표지판은 다 그리면 어떻게 하나요?
약수맨션에 붙일 거예요.
약수맨션은 어디에 있어요?
상도동에 있어요.

저도 같이 가볼 수 있을까요?
………
저도 같이 가볼 수 있을까요?
아니요. 혼자 하는 게 편해요.
아직 우리는 약수맨션을 같이 갈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승완 씨. 그러면 표지판 코팅은 어디서 해요?
미미문구.
코팅은 언제 해요?
일요일 날 교회 마치고, 시간 나면요.
나랑 같이 가요.
아니요. 내일 가든지 시간 나면 가든지 할 거예요.
그러니깐 다음 주에 저랑 같이 가도 되잖아요.
.........
미미문구는 어디에 있는데요?
월곡.
월곡 저도 잘 알아요. 다음 주에 저랑 같이 가요.
.........
승완 씨가 딴청을 피우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저랑 같이 갈 건가요?
(마지못해) 네.

승완 씨와 밖으로 나와 걸었다. 앞서 달리는 승완 씨를 부른다. “같이 가요.” 승완 씨가 뒷눈질로 나를 보곤 은근하게 속도를 늦춘다.

승완_ 21세기는 언제 끝나나요?
백구_ 글쎄요. 2100년이 22세기 시작이니깐.... 2099년 12월 31일이 아닐까요?
승완_ 2099년 1월 1일이 21세기 끝나기 시작. 21세기는 언제 끝나나요?
백구_ 언제 끝나는데요?
승완_ 2099년 1월 1일이 21세기 끝나기 시작.

승완 씨. 승완 씨는 왜 높이제한 표지판만 그려요? 다른 표지판도 많은데.
......
높이제한 표지판이 필요할 거 같나요?
네.
왜 필요할까요?
트럭이 지나가야 하니깐.
아, 트럭이 지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는 건가요?
네.

주자장 앞에 멈춰 선 승완 씨가 줄자를 뽑아 든다. 차르르.

몇 m예요?
2.2m.
cm로는요?
220cm.

홍제동을 누비며 측정한 높이: 2m, 4.8m, 70cm, 2m 20cm, 2.2m, 2.1m, 2m 80cm, 2.2m, 1.2m, 70cm, 2m 20cm, 3.6m

승완 씨는 표지판 계속 그릴 건가요?
네.
언제까지? 표지판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네.

승완 씨가 앞서 달린다.

김지영x최승완

김지영(백구)는미술 작업을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보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중심보다 주변부를 좋아하고 미끄러짐으로써 넓어지려고 합니다. 개인전을 했고, 미디어비엔날레에도 참여 했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과 서부장애인복지관에서 발달장애인들과 수업도 합니다.최승완은 표지판을 그리고 표지판을 붙이는 일을 합니다.늘 7.5m 줄자와 자신이 그린 2.0m 2.3m 높이제한 표지판들을 가방가득 들고 다닙니다. 걸음걸이가 빠르고 높이가 궁금한 장소에서는 거침없이 줄자를 뽑아듭니다. 과천 그리고 일산, 일산 그리고 과천을 바꿔 말하길 좋아하고 트럭에 올라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whitenight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