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난 5월, 2019년 페루 리마에서 초연한 이후 세계 40개 도시를 순회한 테아트로 라 플라사(Teatro La Plaza)의 연극 〈햄릿〉이 모두예술극장 기획초청 공연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왕관을 쓴 여덟 명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저 위대하고 역사적인 정신의 드라마를 몸의 에너지가 충만한 공연으로 뒤바꿨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배우들이 자기 리듬으로 〈햄릿〉을 횡단하는 동안,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라는 질문은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이냐의 문제로 옮아가고, 극중극의 메타포는 원작을 훌쩍 넘어 극장을 넘실거린다. 스페인어와 영어가 뒤섞인 언어는 한국말로 곧장 와닿는 대신, 〈햄릿〉의 수많은 복사본을 미끄러지며 차이와 지연 속에서 도착했다가 사라진다. 관객을 객석에서 일으키고 “이봐, 눈을 뜨고 위를 바라봐. 삶이 선물한 좋은 것들을 즐겨봐.”라고 쓰인 자막 밑에서 함께 춤추게 하는 이 공연의 잔상을 어떻게 음미하면 좋을까.
공연을 연출한 첼라 데 페라리(Chela De Ferrari)는 “삶인가, 죽음인가? 무지인가, 편견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프로그램북에 썼지만, 이 공연을 신경다양성을 지닌 장애인이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의 문제로만 읽기엔 어딘가 아쉽다. 물론 배우들이 각자의 실존적 고민을 담아내고 원작의 언어를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테아트로 라 플라사가 이 공연을 얼마나 오랫동안 평등하고 상호협력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왔는지를 언급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연극의 묘미는 그러한 의도의 여백에서 생성되는 비규범적/비드라마 ‘형식’(주1)의 창안에서 온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아마 관객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이안 맥켈런이 AI 형상처럼 스크린을 통해 등장했을 때였을까, 아니면 로렌스 올리비에의 독백을 흉내 내는 하이메 크루스 뒤로 커다랗게 영화의 장면이 영사될 때, 알바로 톨레도가 올리비에를 따라 하지 말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하라고 일갈할 때였을까. 이 연극의 전복성은 햄릿이라는 인물의 정통연기를 배반하는 일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햄릿에 덧씌워진 이상적인 백인-비장애인-남성-이성애주의자의 형상을 무람없이 깨뜨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 햄릿들은 즐겁고,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자유롭다. 수없이 반복 재생된 ‘고뇌하는 햄릿’은 웃통을 벗고 랩을 하는 일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햄릿‘들’은 유령의 명령에 짓눌리지도, 왕의 권위에 맞서지도 않고, 다만 당연하다는 듯, 왕관을 쓴다. 배우들은 아마도 신경다양인을 고려하여 푹신하고 보드라운 재질로 만들어졌을 이 왕관을 여럿이 돌아가며 바꿔 썼다가,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거꾸로 쓰기도 한다. 배우들은 왕관을 쓰는 행위가 배우-되기의 규칙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움직인다. 가령 공연 초반에 던져진 “넌 누구야?”라는 질문에 하이메는 “하이멜릿”, 즉 햄릿이면서 하이메라고 대답한다. 이 연극에서 제기되는 (장애인의) 정체성은 “나는 아들, 친구, 형제, 학생, 극장 안내원, 다운증후군협회 활동가, 연인, 배우, 그리고 덴마크 왕자”와 같은 복수(複數, plurality)의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나아가 망토를 걸친 세 명의 오필리어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오필리어에게 가해진 부당하고 단선적인 이미지를 깨뜨리는 젠더적 재해석이다. 여덟 아이의 엄마 오필리어, 독립적인 여자 오필리어, 비장애인 남자친구가 있는 오필리어, 일본어로 사랑을 말하는 오필리어…. 이들을 향해 배우들은 말한다. “전 이 세상의 모든 오필리어와 춤을 출 거예요.” 그리고 무대 위에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인 호레이쇼와 죽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관을 나눠 쓴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춘다. 각자의 몸으로,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추는 ‘존재론적 안무’(주2)를.
리마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길고 흥겨운 춤을 함께 추기까지, 배우들의 요청에 화답하며 무대로 나간 관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극의 중간, 햄릿이 선왕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시도한 극중극 〈쥐덫〉 장면에서 즉흥적으로 무대로 나간 네 명의 관객은 나무와 달, 왕의 귀에 독약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장면은 금세 중단된다. “그게 아니야. 우리가 빠졌잖아. 무대에 올라온 관객들이 마치 다운증후군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해. 우리 같아 보여야 한다고.”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그들은 방법을 모르잖아. 제대로 못 할 거야.” “그럼 잘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주자.” 비장애인에 의해 장애를 연기해 온 오랜 관습을 전복시키는 이 대목에서 (아마도 비장애인일) 관객은 배우들의 몸짓을 따라 하며 장면을 완성한다.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무지의 베일이 벗겨지는 걸지도요.”와 같은 〈햄릿〉의 대사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얻는다.
테아트로 라 플라사의 〈햄릿〉은 장애를 규정하는 질서화된 형식을 배반하는 미학적·정치적 형식을 제안한다. 장애예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에게도 더 많은 형식이, 또 그 형식을 떠받칠 문화적 역동성이 필요하다. 그러니 연극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던 햄릿은 이제 다른 고민에 빠질 차례다. “죽느냐, 자느냐, 깨어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주3)
주2.김슬기·김지수,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가망서사, 2022, 197쪽. 도나 헤러웨이의 말을 인용하여 쓴 “장애와 젠더, 계급, 연령, 그 모든 경계와 범주를 가로질러 다양한 이들이 함께 만들어갈 ‘존재론적 안무’”
주3.따옴표 안에 인용된 대사는 공연 대본 한글 자막에서 가져온 것이다.

햄릿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 2025.5.23.~5.25.|모두예술극장
다운증후군 배우 8명이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각색된 〈햄릿〉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좌절을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배우들의 삶이 맞닿는 이 작품은,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간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25년 모두예술극장 기획초청 공연 〈햄릿〉을 제작한 페루 극단 테아트로 라 플라사(Teatro La Plaza)는 2003년 리마의 창작공간을 거점으로 현실을 탐구하고 해석하며 공동체와 소통하는 비판적 시각을 만들어간다. 질문을 던지고 도발하며,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품을 통해 지역사회와 깊이 연결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양근애
연극평론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화의 미학적, 정치적 수행성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쓴다. 「다른 몸들, 복수의 언어, 감각의 분별」, 「드러냄과 머묾의 미학적 실천」, 「장애연극의 시간성과 극장 바깥의 연극」, 「장애연극의 접근성과 재현의 딜레마」 등을 썼다.
rootsfly@hanmail.net
사진 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모두예술극장
2025년 6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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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전통적인 <햄릿>의 틀을 완전히 깨고, 다운증후군 배우들이 자신만의 리듬과 방식으로 무대를 채운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왕관을 여러 명이 나눠 쓰거나 거꾸로 쓰는 장면, 그리고 각자의 정체성을 복수적으로 드러내는 대사들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해체하며 깊은 울림을 주었어요. 관객이 무대에 올라 함께 장면을 완성하는 순간은 장애를 연기하는 오래된 관습을 전복하면서, 공연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젠더와 장애, 존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론적 안무’와 스크린을 활용한 메타포도 신선했고, ‘죽느냐, 자느냐, 깨어있느냐’라는 대사가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기존의 <햄릿>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다채로운 햄릿들의 모습이 관객에게 큰 감동과 사유를 남긴 멋진 공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