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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 예술가의 고유성

이슈 탁자와 바이올린, 비자동화를 향한 기술

  • 김원영 작가
  • 등록일 2021-06-30
  • 조회수1438

이슈

기술과 예술, 예술가의 고유성

탁자와 바이올린, 비자동화를 향한 기술

글. 김원영 작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칼 헤르만 운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바이올리니스트 칼 헤르만 운탄은 1842년 양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바이올린을 탁자에 고정해 발로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훈련을 거듭해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 진학했고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연주자가 되었다. 호기심 가득한 관객 앞에서 자신의 공연이 ‘서커스’나 ‘프릭쇼’(기이한 신체 특성을 가진 사람을 전시하던 당대 엔터테인먼트)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1) 운탄의 일상은 수행자처럼 훈련의 연속이었는데, 그렇게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정, 혐오에 가까운 시선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장애인 연주자 헤르만 운탄의 이야기는 21세기 장애와 예술을 다루는 맥락에서는 조금 구시대적인 사례로 보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서 장애를 극복하는 일이 인간으로서 혹은 예술가로서 대단한 미덕이라고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의지로 몸의 고유성을 극복한다면, 그 몸으로만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이나 감각을 기대하지 못하리라고 오히려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몸의 제약을 투지로 초월하지 않아도 우리 시대는 기술로 보완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첨단 의수나 고기능 보청기, 시력교정장치 수준이 아니다. 우리 시대 로봇공학이나 정보통신기술은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일을 보조할 수 있고,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어떤 운동을 전혀 다른 운동으로 ‘번역’하는 일도 가능하다. 시각장애인도 특정한 디지털기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이미지를 소리나 촉각의 대상으로 전환해 경험할 수 있다.2) 3D프린팅은 이미지를 3차원의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출력하고, 햅틱스 테크놀로지3)는 조만간 태블릿 표면에 촉각을 구현할 것이다. 청각장애인이 음악을 진동과 빛의 형태로 ‘번역’해주는 장치(진동 의자)로 작곡을 하거나 콘서트를 즐기는 일은 이미 우리나라의 일부 배리어프리 공연에서 이뤄진다.4) 근골격계에 손상이 있는 장애아동은 메타버스 속 아바타로 자신만의 움직임에 기초해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되는 꿈을 꿀 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호들갑이거나 과장일 때가 많지만, 2021년 지금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어쩐지 나는 구식으로만 생각되던 헤르만 운탄의 바이올린 연주에 마음이 쓰인다. 그는 일종의 장인이었다.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에 의하면 장인이란, 대상을 완전히 내면화함으로써 그것을 종국에는 ‘비자동화’할 만큼 숙달하는 사람이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는 강도 높은 연습을 통해 “바이올린과 한 몸이 될 정도로 혼연일체의 자동성을 획득하는데, 이 자동성을 통해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신체 외적 기관과 융합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몸이라는 신체 내적 기관들을 재조직”한다. 이렇게 자동화에 이른 후부터가 중요하다. 장인은 “습득한 자동성에서 시작하여 자동성 너머의 다른 사람은 만들어낸 적이 없는 즉흥성, 갈래, 해석을 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5)

두 팔이 없던 바이올리니스트 헤르만 운탄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그것을 고정할 탁자가 필요했다. 그는 탁자-바이올린-두 발을 오랜 시간의 연습으로 ‘자동화’시켜야 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탁자는 장애를 가진 그가 연주의 장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기관(기술)이었다. 이것이 19세기의 장애인이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에 불과한가? 신체 외적인 도구와 장애를 가진 몸을 결합해 자기 몸을 ‘자동화’하고 비로소 비자동화의 단계로 나아간, ‘(장애)예술가’의 훌륭한 사례는 아닌가?

우리 시대 첨단 기술은 19세기 헤르만 운탄의 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 몸이 일정한 훈련과 시간을 거쳐 어떤 기술과 완전히 융합되고(자동화되고), 우리가 가진 고유성에 기반하여 ‘비자동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떤 기술과 만나도 장애를 가진 몸은 창작의 중심이 아닌 기술계의 흥미로운 소재에 그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탁자나 장애가 아니라, 탁자와 장애가 하나로 융합되는 데 필요한 숙달의 기회, 시간, 노력, 자원일 것이다.

1) 칼 헤르만 운탄(Carl Herman Unthan)의 이야기는 다음 책의 2장을 참조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오월의 봄, 2021.

2) 성균관대학교 조준동 교수 연구팀은 한빛예술단 소속 시각장애인 연주자들과 함께 명화 속 컬러를 음향의 형태로 전환하는 코딩 작업을 수행했고, 2020년 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ArtTouch: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중감각 예술 체험전시」, 『전시디자인연구』 2020, vol.17, no.2, 통권 34호 pp. 41-54.

3) 햅틱스(haptics)는 디스플레이 표면에 촉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서피스 햅틱스부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에서 현실감을 향상하는 것까지 아우르는 기술 분야의 용어다.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전자 점자 단말기가 실용화된 햅틱스의 한 예이다. 관련 내용으로는 다음의 책을 참조했다. 리넷 존스, 『햅틱스』, 김영사, 2020.

4) ‘페스티벌 나다’가 대표적이다.

5)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아리엘 키루,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문학과 지성사, 2018, 66-67쪽

김원영

법, 장애, 공연에 관심을 두고 산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등의 책을 썼다.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예술가편>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greece815@gmail.com

2021년 7월 (21호)

상세내용

이슈

기술과 예술, 예술가의 고유성

탁자와 바이올린, 비자동화를 향한 기술

글. 김원영 작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칼 헤르만 운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바이올리니스트 칼 헤르만 운탄은 1842년 양팔이 없이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바이올린을 탁자에 고정해 발로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훈련을 거듭해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 진학했고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연주자가 되었다. 호기심 가득한 관객 앞에서 자신의 공연이 ‘서커스’나 ‘프릭쇼’(기이한 신체 특성을 가진 사람을 전시하던 당대 엔터테인먼트)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1) 운탄의 일상은 수행자처럼 훈련의 연속이었는데, 그렇게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정, 혐오에 가까운 시선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장애인 연주자 헤르만 운탄의 이야기는 21세기 장애와 예술을 다루는 맥락에서는 조금 구시대적인 사례로 보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서 장애를 극복하는 일이 인간으로서 혹은 예술가로서 대단한 미덕이라고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의지로 몸의 고유성을 극복한다면, 그 몸으로만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이나 감각을 기대하지 못하리라고 오히려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몸의 제약을 투지로 초월하지 않아도 우리 시대는 기술로 보완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첨단 의수나 고기능 보청기, 시력교정장치 수준이 아니다. 우리 시대 로봇공학이나 정보통신기술은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일을 보조할 수 있고,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어떤 운동을 전혀 다른 운동으로 ‘번역’하는 일도 가능하다. 시각장애인도 특정한 디지털기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이미지를 소리나 촉각의 대상으로 전환해 경험할 수 있다.2) 3D프린팅은 이미지를 3차원의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출력하고, 햅틱스 테크놀로지3)는 조만간 태블릿 표면에 촉각을 구현할 것이다. 청각장애인이 음악을 진동과 빛의 형태로 ‘번역’해주는 장치(진동 의자)로 작곡을 하거나 콘서트를 즐기는 일은 이미 우리나라의 일부 배리어프리 공연에서 이뤄진다.4) 근골격계에 손상이 있는 장애아동은 메타버스 속 아바타로 자신만의 움직임에 기초해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되는 꿈을 꿀 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호들갑이거나 과장일 때가 많지만, 2021년 지금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어쩐지 나는 구식으로만 생각되던 헤르만 운탄의 바이올린 연주에 마음이 쓰인다. 그는 일종의 장인이었다.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에 의하면 장인이란, 대상을 완전히 내면화함으로써 그것을 종국에는 ‘비자동화’할 만큼 숙달하는 사람이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는 강도 높은 연습을 통해 “바이올린과 한 몸이 될 정도로 혼연일체의 자동성을 획득하는데, 이 자동성을 통해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신체 외적 기관과 융합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몸이라는 신체 내적 기관들을 재조직”한다. 이렇게 자동화에 이른 후부터가 중요하다. 장인은 “습득한 자동성에서 시작하여 자동성 너머의 다른 사람은 만들어낸 적이 없는 즉흥성, 갈래, 해석을 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5)

두 팔이 없던 바이올리니스트 헤르만 운탄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그것을 고정할 탁자가 필요했다. 그는 탁자-바이올린-두 발을 오랜 시간의 연습으로 ‘자동화’시켜야 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탁자는 장애를 가진 그가 연주의 장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기관(기술)이었다. 이것이 19세기의 장애인이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에 불과한가? 신체 외적인 도구와 장애를 가진 몸을 결합해 자기 몸을 ‘자동화’하고 비로소 비자동화의 단계로 나아간, ‘(장애)예술가’의 훌륭한 사례는 아닌가?

우리 시대 첨단 기술은 19세기 헤르만 운탄의 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 몸이 일정한 훈련과 시간을 거쳐 어떤 기술과 완전히 융합되고(자동화되고), 우리가 가진 고유성에 기반하여 ‘비자동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떤 기술과 만나도 장애를 가진 몸은 창작의 중심이 아닌 기술계의 흥미로운 소재에 그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탁자나 장애가 아니라, 탁자와 장애가 하나로 융합되는 데 필요한 숙달의 기회, 시간, 노력, 자원일 것이다.

1) 칼 헤르만 운탄(Carl Herman Unthan)의 이야기는 다음 책의 2장을 참조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오월의 봄, 2021.

2) 성균관대학교 조준동 교수 연구팀은 한빛예술단 소속 시각장애인 연주자들과 함께 명화 속 컬러를 음향의 형태로 전환하는 코딩 작업을 수행했고, 2020년 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ArtTouch: 시각장애인을 위한 다중감각 예술 체험전시」, 『전시디자인연구』 2020, vol.17, no.2, 통권 34호 pp. 41-54.

3) 햅틱스(haptics)는 디스플레이 표면에 촉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서피스 햅틱스부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에서 현실감을 향상하는 것까지 아우르는 기술 분야의 용어다.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전자 점자 단말기가 실용화된 햅틱스의 한 예이다. 관련 내용으로는 다음의 책을 참조했다. 리넷 존스, 『햅틱스』, 김영사, 2020.

4) ‘페스티벌 나다’가 대표적이다.

5)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아리엘 키루,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문학과 지성사, 2018, 66-67쪽

김원영

법, 장애, 공연에 관심을 두고 산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등의 책을 썼다.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예술가편>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greece815@gmail.com

2021년 7월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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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6 16: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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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1-07-01 17: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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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근데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그의 책을 검색해서 살펴보니 무척이나 두껍네요. 활자가 작은 건 아닌지요? ㅠ

이음온라인2021-07-01 17:28:52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음 온라인의 글씨가 작게 느껴지시면, 우측 상단에 큰 글자 기능을 사용해봐주세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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