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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 만화가

인터뷰 여기, 내가 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 박희정 기록활동가
  • 등록일 2021-07-28
  • 조회수1631

인터뷰

이해경 만화가

여기, 내가 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이해경 작가는 데뷔한 지 47년 된 만화가다. 13살에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23살에 당시 3대 아동 잡지 중 하나인 [새소년]에 ‘<현아의 외출>’을 실으며 작가로서 공식 이력을 쓰기 시작했다. [만화왕국] [르네상스] [소년 동아일보] [계간만화] [매주만화] 등의 만화잡지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연재했으며 일본 3대 만화출판사인 ‘슈에이샤’(集英社)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YOU]에서도 2년간 작품을 연재했다. <겨드랑이가 가렵다>로 2005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작으로는 2019년 발간한 『커피 로맨스』가 있다.

이해경 작가가 활동해온 긴 시간 동안 한국 만화계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부침을 겪으면서도 창작의 기쁨에 몰두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고집을 꼿꼿이 세우면서도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는 배움의 미덕을 잃지 않는 유연함을 지녔다. 71세에도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늘 ‘오늘’을 사는 만화가 이해경 작가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사람들의 꿈이 깃든 ‘만화’

한 인터뷰에서 “제도권 학벌은 3일”뿐이고 만화로 세상을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집이 아주 넉넉하지 않으면 학교에 가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는 5남매 중 맏이로 동생도 많은 데다가 장애가 있으니 더 어려웠다. 학교에 가려면 업혀서 다녀야 했으니까. 9살에 과외 한 달로 한글을 깨쳤고 그다음부터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만화책 안에는 사람들의 모든 꿈이 깃들어 있지 않나.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이 안에 다 있었다. 그래서 13살에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뭘 어떻게 하면 만화를 잘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다.”

13살에 자기 길을 세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저만해도 꿈이 많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만화가’에 확신을 하게 되었나?

“내 성격이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창작자들이 다 그런 면이 있지만. 그 당시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만화방에 가면 부모가 와서 데리고 가는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만화를 많이 빌려다 보셨다. 아버지는 철도원이었는데 종양이 생겨 다리를 절단하고 집에 계셨다. 그때는 장애인이 아예 사람대접을 못 받는 시대였다. 아버지가 만화책을 열심히 보셨다. 내가 소녀 만화보다 액션 만화나 전쟁 만화를 더 많이 본 게 아버지의 영향이다. 어머니는 재일교포로 교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셨고, 만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만화계에서 어머니를 ‘원로 만화가’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머니는 내가 일본 만화가들과 교류하고 일본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내가 만화를 하게 된 데에는 가족들의 특별한 지지가 바탕에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상추’ 누나

13살 이해경은 <형제 별>이라는 동요를 두 권의 만화책으로 만들었다. 딸이 직접 만든 만화책을 보고 놀란 부모는 전폭적으로 딸의 꿈을 지지해주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업고 유명 만화가들을 찾아다녔다. 만화가들은 그녀가 지닌 소질과 열정을 주목했다. 그중 누구도 소아마비로 인해 마비된 다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해경 작가는 1973년 만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재능과 열정을 가진 도전자의 입지전을 허용했다고 해서 만화가 ‘모두’에게 열린 세계인 것은 아니었다.

“960년대, 70년대 만화는 다 아동만화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층이나 소재에도 변화가 왔다. 기업 만화나 스포츠 만화가 크게 히트 치는 걸 본 거다. 그래서 청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출판사에 가져갔다. 뭐, 세상을 계몽하겠다거나 큰 뜻은 없었다. 그냥 내가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을 등장시켜본 거다. 출판사 사장이 보더니 장애인이 등장하면 안 된다는 거다. 왜냐고 물었더니 장사 안된다는 거다. (웃음) 그래서 그 친구(주인공)를 ‘말이 좀 없는 친구’로 바꿨다. 그다음부터는 장애인이 나오는 만화를 안 했다.”

그런데 이해경 작가는 2005년에 장애인만 잔뜩 나오는 만화를 펴낸다. 『겨드랑이가 가렵다』가 그것이다. 사고로 신체에 장애를 입게 된 중도장애인들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담아냈는데, 이해경 작가가 직접 취재한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2002년에 운전을 배우려고 국립재활원에 갔는데 휠체어가 너무 많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장애를 몰랐던 거다. 시설에 가본 적도 없고 장애인과 사귀어본 적도 없고. 가족이 나를 너무 공주 취급을 해서 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본 적도 없었다. 품위 떨어지니까 너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지. 척수장애인들은 경추, 흉추, 요추 번호로 서로를 소개한다. 몇 번이다, 그러면 상태가 대충 어떻다는 걸 아니까. 거기서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상추’ 누나였다. (웃음) 그래서 담뱃불도 붙여주고 커피도 뽑아주면서 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내가 만화가라고 하니까 자기들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삶을 잘 알게 되면 좋지 않겠냐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게 됐다. 이야기를 만들 때 특별한 고민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잘 아는 거라서. 장애인 이야기라고 특별히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했다. 어떻게 하면 만화적으로 재미를 줄까. 만화는 재밌어야 하니까. 내 역량이 좀 못 미칠 수는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애썼다.”

장애인으로 오래 살았지만 ‘장애’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시간이 되셨겠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달라.

“나는 휠체어 타면 다 똑같이 대해줄 줄 알았다. 거기에 사격팀이라고 근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다. 중도장애인은 나처럼 척추가 휘지 않으니까 앉아 있으면 근사해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나 사격 되게 좋아하는데’ 했더니 ‘소아마비는 안 받아요.’ 헐. 이게 인간의 세계구나. 인간은 누구나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하구나 싶었죠.”

그래서 내가 모른다는 점을 책 속에서 솔직히 드러내는 작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후배나 제자한테 솔직하게 물어본다. 배워야 된다. 아는 척 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웃음)

다양한 결을 포착하고 모으는 특별한 힘

이해경 작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는 주눅 들지 않았다. 성인 여성 취향의 작품을 그리게 되면서 국내에서 연재 처를 찾기 힘들자, 1966년 일본 슈에이사가 발간하는 성인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잡지 [YOU]의 문을 직접 두드린다. “외국인은 쓰지 않겠다”라는 편집기자를 향해 이해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내가 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나를 써라.”

작가의 시선 때문에 작품 안 장애인의 삶과 문화가 현실감 있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다. 당사자라서 당사자 이야기를 꼭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당사자만이 가지는 관점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이 내 책을 보고 ‘장애인들이 왜 맨날 담배를 피우냐’고 묻는 거다. 아니 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냐?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신다. 욕도 하고 여자도 밝힌다. 장애인은 별세계 사람인 줄 아느냐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장애인의 솔직한 삶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하더라. 주변의 비장애인들은, 선생님은 장애인이니까 만화 그리기가 더 쉽지 않나, 집에 앉아서 어디 안 나가도 되니까 라고 말한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만화를 더 잘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고 엉덩이 붙이고 그림만 그린다? 아니다. 작가는 많은 걸 경험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오히려 장애 때문에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정릉 골짜기 개발되지 않은 곳을 소재로 삼겠다 하면 보통은 만화가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찍는다. 자기가 원하는 구도를 찍어와야 하니까. 나는 그게 어렵다. 그래서 내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날아다닌다든가, 뭔가 구체적인 실제 상황보다는 환상적인 것들을 많이 쓰게 된다.”

그러나 이해경 작가가 만드는 이야기는 아주 구체적인 삶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현실의 다양한 결을 포착하는 눈이 깊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자신에게로 모이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한국 만화 시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출판만화 중심에서 웹툰으로 이동했고, 출판만화에 오래 익숙해졌던 작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작업이 어려워진 이해경 작가는 경제적 곤란을 타개하고자 2008년에 카페를 개업했지만 2010년에 폐업한다. 돈을 벌진 못했지만 이야기는 남아 <커피 로맨스>가 태어났다.

2019년 이해경 작가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제9대 이사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장애인으로서 최초였고, 여성으로서도 최초였다. 최근 2년 임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시, 창작자 이해경의 삶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작품을 할 생각이다. 자료조사를 해야 하는데 메타버스(Metaverse) 안에서 전시를 하려고 한다. 내가 갖고 있던 이야기들을 호흡이 긴 글로 써볼 생각도 있다. 척추 수술 이후 통증이 있고 어깨도 좋지 않아 잘 될진 모르겠다. 지구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말한다. 오늘도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이해경

1974년 [새 소년]에 <현아의 외출>로 만화계에 데뷔했다. [만화왕국] [르네상스] [어린이 동산] [계간만화] [코믹타운] [YOU] [매주만화] 등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연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다다의 요리일기> <잠들지 못하는 여자> <만남> <커피 로맨스> 등이 있으며, 2005년 『겨드랑이가 가렵다』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창작학과 강사로 3년간 강단에 섰으며,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9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희정

드러나지 않는 삶을 주목하고, 국가와 사회적 폭력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밀양을 살다』 『숫자가 된 사람들』 『나는 숨지 않는다』를 함께 썼다. [주간경향]에 ‘만화로 본 세상’을 연재하고 있으며,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izuminoa@naver.com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2021. 8월 (22호)

상세내용

인터뷰

이해경 만화가

여기, 내가 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이해경 작가는 데뷔한 지 47년 된 만화가다. 13살에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23살에 당시 3대 아동 잡지 중 하나인 [새소년]에 ‘<현아의 외출>’을 실으며 작가로서 공식 이력을 쓰기 시작했다. [만화왕국] [르네상스] [소년 동아일보] [계간만화] [매주만화] 등의 만화잡지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연재했으며 일본 3대 만화출판사인 ‘슈에이샤’(集英社)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YOU]에서도 2년간 작품을 연재했다. <겨드랑이가 가렵다>로 2005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작으로는 2019년 발간한 『커피 로맨스』가 있다.

이해경 작가가 활동해온 긴 시간 동안 한국 만화계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부침을 겪으면서도 창작의 기쁨에 몰두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고집을 꼿꼿이 세우면서도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는 배움의 미덕을 잃지 않는 유연함을 지녔다. 71세에도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늘 ‘오늘’을 사는 만화가 이해경 작가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사람들의 꿈이 깃든 ‘만화’

한 인터뷰에서 “제도권 학벌은 3일”뿐이고 만화로 세상을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집이 아주 넉넉하지 않으면 학교에 가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는 5남매 중 맏이로 동생도 많은 데다가 장애가 있으니 더 어려웠다. 학교에 가려면 업혀서 다녀야 했으니까. 9살에 과외 한 달로 한글을 깨쳤고 그다음부터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만화책 안에는 사람들의 모든 꿈이 깃들어 있지 않나.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이 안에 다 있었다. 그래서 13살에 만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뭘 어떻게 하면 만화를 잘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다.”

13살에 자기 길을 세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저만해도 꿈이 많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만화가’에 확신을 하게 되었나?

“내 성격이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창작자들이 다 그런 면이 있지만. 그 당시는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만화방에 가면 부모가 와서 데리고 가는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만화를 많이 빌려다 보셨다. 아버지는 철도원이었는데 종양이 생겨 다리를 절단하고 집에 계셨다. 그때는 장애인이 아예 사람대접을 못 받는 시대였다. 아버지가 만화책을 열심히 보셨다. 내가 소녀 만화보다 액션 만화나 전쟁 만화를 더 많이 본 게 아버지의 영향이다. 어머니는 재일교포로 교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셨고, 만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만화계에서 어머니를 ‘원로 만화가’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머니는 내가 일본 만화가들과 교류하고 일본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내가 만화를 하게 된 데에는 가족들의 특별한 지지가 바탕에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상추’ 누나

13살 이해경은 <형제 별>이라는 동요를 두 권의 만화책으로 만들었다. 딸이 직접 만든 만화책을 보고 놀란 부모는 전폭적으로 딸의 꿈을 지지해주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업고 유명 만화가들을 찾아다녔다. 만화가들은 그녀가 지닌 소질과 열정을 주목했다. 그중 누구도 소아마비로 인해 마비된 다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해경 작가는 1973년 만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재능과 열정을 가진 도전자의 입지전을 허용했다고 해서 만화가 ‘모두’에게 열린 세계인 것은 아니었다.

“960년대, 70년대 만화는 다 아동만화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층이나 소재에도 변화가 왔다. 기업 만화나 스포츠 만화가 크게 히트 치는 걸 본 거다. 그래서 청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출판사에 가져갔다. 뭐, 세상을 계몽하겠다거나 큰 뜻은 없었다. 그냥 내가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을 등장시켜본 거다. 출판사 사장이 보더니 장애인이 등장하면 안 된다는 거다. 왜냐고 물었더니 장사 안된다는 거다. (웃음) 그래서 그 친구(주인공)를 ‘말이 좀 없는 친구’로 바꿨다. 그다음부터는 장애인이 나오는 만화를 안 했다.”

그런데 이해경 작가는 2005년에 장애인만 잔뜩 나오는 만화를 펴낸다. 『겨드랑이가 가렵다』가 그것이다. 사고로 신체에 장애를 입게 된 중도장애인들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담아냈는데, 이해경 작가가 직접 취재한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2002년에 운전을 배우려고 국립재활원에 갔는데 휠체어가 너무 많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장애를 몰랐던 거다. 시설에 가본 적도 없고 장애인과 사귀어본 적도 없고. 가족이 나를 너무 공주 취급을 해서 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본 적도 없었다. 품위 떨어지니까 너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지. 척수장애인들은 경추, 흉추, 요추 번호로 서로를 소개한다. 몇 번이다, 그러면 상태가 대충 어떻다는 걸 아니까. 거기서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상추’ 누나였다. (웃음) 그래서 담뱃불도 붙여주고 커피도 뽑아주면서 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내가 만화가라고 하니까 자기들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삶을 잘 알게 되면 좋지 않겠냐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게 됐다. 이야기를 만들 때 특별한 고민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잘 아는 거라서. 장애인 이야기라고 특별히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늘 하던 대로 했다. 어떻게 하면 만화적으로 재미를 줄까. 만화는 재밌어야 하니까. 내 역량이 좀 못 미칠 수는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애썼다.”

장애인으로 오래 살았지만 ‘장애’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시간이 되셨겠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달라.

“나는 휠체어 타면 다 똑같이 대해줄 줄 알았다. 거기에 사격팀이라고 근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다. 중도장애인은 나처럼 척추가 휘지 않으니까 앉아 있으면 근사해 보였다.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나 사격 되게 좋아하는데’ 했더니 ‘소아마비는 안 받아요.’ 헐. 이게 인간의 세계구나. 인간은 누구나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하구나 싶었죠.”

그래서 내가 모른다는 점을 책 속에서 솔직히 드러내는 작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후배나 제자한테 솔직하게 물어본다. 배워야 된다. 아는 척 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웃음)

다양한 결을 포착하고 모으는 특별한 힘

이해경 작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는 주눅 들지 않았다. 성인 여성 취향의 작품을 그리게 되면서 국내에서 연재 처를 찾기 힘들자, 1966년 일본 슈에이사가 발간하는 성인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잡지 [YOU]의 문을 직접 두드린다. “외국인은 쓰지 않겠다”라는 편집기자를 향해 이해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내가 하고 싶은 만화가 있다. 나를 써라.”

작가의 시선 때문에 작품 안 장애인의 삶과 문화가 현실감 있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다. 당사자라서 당사자 이야기를 꼭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당사자만이 가지는 관점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이 내 책을 보고 ‘장애인들이 왜 맨날 담배를 피우냐’고 묻는 거다. 아니 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냐?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신다. 욕도 하고 여자도 밝힌다. 장애인은 별세계 사람인 줄 아느냐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장애인의 솔직한 삶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하더라. 주변의 비장애인들은, 선생님은 장애인이니까 만화 그리기가 더 쉽지 않나, 집에 앉아서 어디 안 나가도 되니까 라고 말한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만화를 더 잘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고 엉덩이 붙이고 그림만 그린다? 아니다. 작가는 많은 걸 경험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오히려 장애 때문에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정릉 골짜기 개발되지 않은 곳을 소재로 삼겠다 하면 보통은 만화가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찍는다. 자기가 원하는 구도를 찍어와야 하니까. 나는 그게 어렵다. 그래서 내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날아다닌다든가, 뭔가 구체적인 실제 상황보다는 환상적인 것들을 많이 쓰게 된다.”

그러나 이해경 작가가 만드는 이야기는 아주 구체적인 삶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현실의 다양한 결을 포착하는 눈이 깊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자신에게로 모이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한국 만화 시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출판만화 중심에서 웹툰으로 이동했고, 출판만화에 오래 익숙해졌던 작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작업이 어려워진 이해경 작가는 경제적 곤란을 타개하고자 2008년에 카페를 개업했지만 2010년에 폐업한다. 돈을 벌진 못했지만 이야기는 남아 <커피 로맨스>가 태어났다.

2019년 이해경 작가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제9대 이사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장애인으로서 최초였고, 여성으로서도 최초였다. 최근 2년 임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시, 창작자 이해경의 삶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작품을 할 생각이다. 자료조사를 해야 하는데 메타버스(Metaverse) 안에서 전시를 하려고 한다. 내가 갖고 있던 이야기들을 호흡이 긴 글로 써볼 생각도 있다. 척추 수술 이후 통증이 있고 어깨도 좋지 않아 잘 될진 모르겠다. 지구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말한다. 오늘도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이해경

1974년 [새 소년]에 <현아의 외출>로 만화계에 데뷔했다. [만화왕국] [르네상스] [어린이 동산] [계간만화] [코믹타운] [YOU] [매주만화] 등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연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다다의 요리일기> <잠들지 못하는 여자> <만남> <커피 로맨스> 등이 있으며, 2005년 『겨드랑이가 가렵다』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창작학과 강사로 3년간 강단에 섰으며,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제9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희정

드러나지 않는 삶을 주목하고, 국가와 사회적 폭력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밀양을 살다』 『숫자가 된 사람들』 『나는 숨지 않는다』를 함께 썼다. [주간경향]에 ‘만화로 본 세상’을 연재하고 있으며,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izuminoa@naver.com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hanmail.net
사진. 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2021. 8월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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