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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옆작은학교의 함께 사는 예술수업

이슈 생기 돌고 가슴 뛰는 과정이면 충분하다

  • 김중미 동화작가
  • 등록일 2021-10-27
  • 조회수865

이슈

내가 1987년부터 살기 시작한 만석동은 일제강점기 때 병참기지였고,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기계 도시 은강의 무대이기도 했다. 만석동은 당시에도 몇 개의 쇠락한 부두를 끼고 있는 가난한 공업지대였다. 그곳에서 1988년 4월 공부방을 열었다. 골목마다 가득했던 아이들은 마땅한 공부방이 없이 11톤 트럭이 오가는 왕복 1차선 도로 위에서 공을 차고, 똥바다나 기찻길을 놀이터 삼아 지냈다. 나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디귿(ㄷ)자로 된 개량한옥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그때는 주인집이나 셋집이나 사는 게 다 엇비슷했다. 그래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살아갔다. 내가 공동체 생활을 선택한 데는 그때 다섯 가구가 서로 가족처럼 살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구마다 삼남매에서 오남매까지 있었으니 그 디귿(ㄷ)자 집에 학령기 아이들만 열댓 명이 되었다. 물론 골목 밖에도 같이 놀 아이들이 넘쳐났다. 우리는 남자 여자 나누지 않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다방구를 했고, 겨울이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러 신천으로 나갔다. 그때는 지금보다 눈이 많이 와서 겨울마다 동네 공터에서 눈을 다져 만든 눈 벽돌로 얼음집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소꿉놀이나 탐정놀이를 할 때는 놀이에 필요한 소품들을 직접 만들었다.

그때를 돌아보면 놀이가 창작이었고 예술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 중 하나는 종이인형놀이였다. 종이인형은 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도구였다.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인형은 긴 금발머리 여자 인형이 대부분이었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갈아입히며 놀게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공주풍의 머리나 옷을 싫어해서 종이인형을 사면 인형의 머리를 단발이나 커트로 바꾸고 머리색도 흑발로 만들었다. 드레스 옷도 다 버리고 내가 그린 옷으로 갈아입혔다. 내가 가진 종이인형은 스무 개 정도였는데 내가 부여한 인형의 캐릭터에 따라 인형의 이름, 옷 스타일이 정해졌다. 인형은 주로 책이나 영화에서 본 캐릭터를 빌려 와 상상을 더해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 종이인형놀이를 할 때면 나는 연출가가 되고, 미술감독이 되고, 배우가 되었다.

나는 공부방 아이들도 그렇게 놀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고, 함께하는 법을 알아가길 바랐다.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도록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고 옛이야기를 들려준 뒤, 연극이나 노래극, 인형극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연극 소품과 인형극 무대를 만들며 미술을 만나고, 노래와 춤을 만났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은 판잣집이었던 공부방 2층 한구석을 담요로 가린 무대에서 공연했다. 밤늦게 잔업을 마치고 모인 보호자들이 관객이 되었다. 타인들 앞에서 늘 위축이 되어 있던 아이들이 그 허름한 무대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며 우리는 큰 꿈을 꾸게 되었다. 후원금을 모으고 각자 주머니를 털어 공연장을 빌려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다.

기찻길옆작은학교 공연

처음에는 타악, 미술, 연극, 음악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이긴 했지만 가난한 아이들의 현실은 잘 몰랐다. 아이들은 쉽게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 위주의 활동이 되기 일쑤였다. 고민 끝에 공부방 이모삼촌들이 평소의 관심이나 재능에 따라 직접 타악, 사물, 춤, 미술, 판화, 악기, 영상 등을 하나씩 배워갔다. 아마추어였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기획을 하고 무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공부방 공연은 능력 있는 누군가가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공연은 우리 모두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다. 서로 다른 성향과 다른 재능,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는 이들이 모여 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서로의 욕구가 충돌하고, 자기주장을 높이게 돼 불협화음이 생긴다. 그 불협화음을 조절해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공부방의 예술 활동이 갖는 매력이다.

2020년 30회 정기공연을 준비하던 중 코로나19를 맞았다. 이미 석 달 동안 춤, 타악, 밴드, 인형극을 준비하던 우리는 얼떨떨한 채 연습을 멈췄다. 처음 몇 달은 그 이상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점점 떨어지는 아이들의 학습만 보완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고립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장애가 있거나 보호자가 외국인인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커졌다. 우리는 예전처럼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마스크를 쓰고 공부방 근처의 바닷가로 나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공부방 밖 좁은 공간에서라도 목공을 시작했다. 무대에서 하는 활동은 못했지만 대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 공부방과 가까운 청소년상담센터의 도움으로 상담을 병행해 나갔다. 그러자 아이들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위기가 아이들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나마 여력이 되는 보호자들과 그림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목공을 하고, 영상을 만들었다. 그 시간은 서로가 소통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주었다. 11월부터 위드 코로나로 간다는 소식이 들린다. 공부방 아이들은 이모삼촌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우리 공연 다시 할 수 있어요?”

아직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땀 흘리며 춤을 추고, 인형을 다시 만들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우리 공부방 식구들에게 예술교육은 예술가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사는’ 과정이다.

김중미

동화작가.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지역운동을 해왔으며,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기찻길옆작은학교’의 농촌 공동체를 꾸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1999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화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행운이와 오복이』, 청소년소설 『조커와 나』 『모두 깜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나의 동두천』,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강연집 『존재, 감』 등을 냈다.
mansuk99@hanmail.netm

사진제공. 필자

2021년 11월 (25호)

상세내용

이슈

내가 1987년부터 살기 시작한 만석동은 일제강점기 때 병참기지였고,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기계 도시 은강의 무대이기도 했다. 만석동은 당시에도 몇 개의 쇠락한 부두를 끼고 있는 가난한 공업지대였다. 그곳에서 1988년 4월 공부방을 열었다. 골목마다 가득했던 아이들은 마땅한 공부방이 없이 11톤 트럭이 오가는 왕복 1차선 도로 위에서 공을 차고, 똥바다나 기찻길을 놀이터 삼아 지냈다. 나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디귿(ㄷ)자로 된 개량한옥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그때는 주인집이나 셋집이나 사는 게 다 엇비슷했다. 그래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살아갔다. 내가 공동체 생활을 선택한 데는 그때 다섯 가구가 서로 가족처럼 살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구마다 삼남매에서 오남매까지 있었으니 그 디귿(ㄷ)자 집에 학령기 아이들만 열댓 명이 되었다. 물론 골목 밖에도 같이 놀 아이들이 넘쳐났다. 우리는 남자 여자 나누지 않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다방구를 했고, 겨울이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러 신천으로 나갔다. 그때는 지금보다 눈이 많이 와서 겨울마다 동네 공터에서 눈을 다져 만든 눈 벽돌로 얼음집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소꿉놀이나 탐정놀이를 할 때는 놀이에 필요한 소품들을 직접 만들었다.

그때를 돌아보면 놀이가 창작이었고 예술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 중 하나는 종이인형놀이였다. 종이인형은 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도구였다.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인형은 긴 금발머리 여자 인형이 대부분이었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갈아입히며 놀게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공주풍의 머리나 옷을 싫어해서 종이인형을 사면 인형의 머리를 단발이나 커트로 바꾸고 머리색도 흑발로 만들었다. 드레스 옷도 다 버리고 내가 그린 옷으로 갈아입혔다. 내가 가진 종이인형은 스무 개 정도였는데 내가 부여한 인형의 캐릭터에 따라 인형의 이름, 옷 스타일이 정해졌다. 인형은 주로 책이나 영화에서 본 캐릭터를 빌려 와 상상을 더해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 종이인형놀이를 할 때면 나는 연출가가 되고, 미술감독이 되고, 배우가 되었다.

나는 공부방 아이들도 그렇게 놀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고, 함께하는 법을 알아가길 바랐다. 활자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도록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고 옛이야기를 들려준 뒤, 연극이나 노래극, 인형극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연극 소품과 인형극 무대를 만들며 미술을 만나고, 노래와 춤을 만났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은 판잣집이었던 공부방 2층 한구석을 담요로 가린 무대에서 공연했다. 밤늦게 잔업을 마치고 모인 보호자들이 관객이 되었다. 타인들 앞에서 늘 위축이 되어 있던 아이들이 그 허름한 무대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며 우리는 큰 꿈을 꾸게 되었다. 후원금을 모으고 각자 주머니를 털어 공연장을 빌려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다.

기찻길옆작은학교 공연

처음에는 타악, 미술, 연극, 음악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이긴 했지만 가난한 아이들의 현실은 잘 몰랐다. 아이들은 쉽게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 위주의 활동이 되기 일쑤였다. 고민 끝에 공부방 이모삼촌들이 평소의 관심이나 재능에 따라 직접 타악, 사물, 춤, 미술, 판화, 악기, 영상 등을 하나씩 배워갔다. 아마추어였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기획을 하고 무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공부방 공연은 능력 있는 누군가가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공연은 우리 모두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다. 서로 다른 성향과 다른 재능,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는 이들이 모여 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서로의 욕구가 충돌하고, 자기주장을 높이게 돼 불협화음이 생긴다. 그 불협화음을 조절해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공부방의 예술 활동이 갖는 매력이다.

2020년 30회 정기공연을 준비하던 중 코로나19를 맞았다. 이미 석 달 동안 춤, 타악, 밴드, 인형극을 준비하던 우리는 얼떨떨한 채 연습을 멈췄다. 처음 몇 달은 그 이상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점점 떨어지는 아이들의 학습만 보완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고립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장애가 있거나 보호자가 외국인인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커졌다. 우리는 예전처럼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마스크를 쓰고 공부방 근처의 바닷가로 나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공부방 밖 좁은 공간에서라도 목공을 시작했다. 무대에서 하는 활동은 못했지만 대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 공부방과 가까운 청소년상담센터의 도움으로 상담을 병행해 나갔다. 그러자 아이들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위기가 아이들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나마 여력이 되는 보호자들과 그림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목공을 하고, 영상을 만들었다. 그 시간은 서로가 소통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주었다. 11월부터 위드 코로나로 간다는 소식이 들린다. 공부방 아이들은 이모삼촌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우리 공연 다시 할 수 있어요?”

아직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고, 땀 흘리며 춤을 추고, 인형을 다시 만들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우리 공부방 식구들에게 예술교육은 예술가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사는’ 과정이다.

김중미

동화작가.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지역운동을 해왔으며,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기찻길옆작은학교’의 농촌 공동체를 꾸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1999년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화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행운이와 오복이』, 청소년소설 『조커와 나』 『모두 깜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나의 동두천』,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강연집 『존재, 감』 등을 냈다.
mansuk99@hanmail.netm

사진제공. 필자

2021년 11월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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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3 11: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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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고 하면 재능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애초에 예술 활동을 지원해줄 경제적 여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처럼 여겼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있고 심미에 대한 욕구가 있듯이 나 역시도 늘 예술가를 꿈꿨었던 것 같다. 현실에 치여 살다보면 예술이 사치처럼 느껴져 내 인생엔 한 번도 예술적 면모가 없다는 듯이 살아갈 때가 있는데 "나는 공부방 아이들도 그렇게 놀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고, 함께하는 법을 알아가길 바랐다." 라는 말에 '예술이 무엇일까?'라는 원초적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 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 나만의 놀이를 찾다보면 만들어진 예술가가 아닌 삶 그 자체를 예술로 살아가는 예술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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