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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경계 짓는 법들, 허무는 판타지들

  • 김원영 작가, 변호사
  • 등록일 2022-05-11
  • 조회수750

이슈

<소극장판-타지>는 장애예술을 주제로 한 국립극단 작품개발 사업에서 시작된 연극으로, 공연 접근성에 대해 고민해온 강보름 연출이 장애인·비장애인 배우(고애리, 김지우, 안정우, 이성수)와 함께 만들었다. 이 공연의 무대 위에는 수어통역사 두 사람(신선아, 장진석)이 등장하고, 관객 전체에게 개방된 음성해설이 중간중간 제공된다. 무대를 둘러싼 사면에 앉은 관객을 위해 통역사는 배우의 동선을 따라 영리하게 위치를 이동하고, 방향을 바꾸거나 특정한 포즈를 취하는데(배우와 같이 누워 있다 배우가 대사를 하면 일어나 앉은 채 수어를 한다), 무대가 그야말로 ‘말’에 의해 공간적으로 변주된다. 어떤 순간에는 여전히 통역사의 모습이 가려질 수 있지만, 그 시점을 섬세하게 포착해 문자통역이 제공되는 두 개 면의 스크린 위에 통역사의 얼굴과 손이 등장한다. 물론 영상 수어통역의 역할은 보조적이다. 수어통역은 음성정보의 시각적 번역에 그치지 않고 무대 위의 ‘몸들’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퍼포먼스로 등장한다.

***

만약 어떤 정치인이 수어통역에 매료되어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공연법’을 만든다고 해보자. 이 법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XX조 제1항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하거나 설립한 공연장 또는 예술단은 제작공연 프로그램의 10% 이상에서 한국수어 통역을 제공해야 한다.” 정도가 (대략) 떠오른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위와 같은 법률이 제정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공연에서 수어통역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도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공연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음가들을 내뱉는 방식으로 고전적인 연극을 극화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들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외치는 “나는 파멸했어! …나도 도스토옙스키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대사를 “코끼리 끼리끼리 이음 웹진! 17세기 근대인 저작권 JLPT!!”라는 대사로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그해에 그들이 공연하는 극장은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공연을 법률상 기준만큼 무대에 올리지 않았고, 연말 진행되는 이 공연팀의 공연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하기로 약속된 터였다. 이들은 ‘배리어프리 공연법’을 지켜야 할까?

어떤 공연자는 위의 대사들이 맥락상 의미가 없지만 각 단어들은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므로, 당연히 통역사가 배치되어서 “코끼리!” “이음 웹진!” 따위를 아무 맥락 없이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연출가는, 사실 단 하나의 의미도 전달되기를 원치 않았는데, 대사를 쓰다가 본의 아니게 뜻이 있는 단어를 활용했고, 수어통역 배치를 고민하자 각각의 단어가 가진 ‘의미’가 부각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대사를 “ㅇᄅᆞㅓ매어라얼 g ㅣ아ㅓ아ᅟᅥᆫ래너” 따위로, 완전히 의미를 파괴해버리기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 구성원은, 그와 같은 무의미한 음소의 나열도 당연히 수어로, 그러니까 의미를 파괴한 손짓을 이용해서 표현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출은 그 말도 타당하다고 인정했는데, 그러자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수어통역사가 꼭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냥 우리 팀 ○○씨가 하고 통역비를 받을 수 있게 해주자. 제작비도 많이 부족하니까.” 이 사실을 들은 정치인은 법률 조항을 추가하기로 했다. XX조 제2항 “제1항의 한국수어 통역은 한국농아인협회가 인증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공연의 의미전달을 위해 진행하는 통역 행위로서…”

***

다소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법이란 언제나 특정하게 구획된(‘경계가 지어진’) 개념 안으로 현실의 사태들을 포섭하며, 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실천은 예외 규정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특정한 아이디어나 실천을 법제화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거대하게 구획된 경계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배리어프리’에 관한 규정 중 휠체어 관람석에 관한 법령(「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을 보자. 우리나라의 휠체어 관람석 법령은 관람석의 크기와 위치를 정하고, 0.8미터 이하의 안전바를 설치하며 이동식 의자 등을 둘 것을 규정한다. 이러한 기준을 마련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휠체어 관람석을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같이 간 사람이 함께 앉을 수도 없게 설치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의 접근성을 보장하라는 여러 목소리가 있었고, 보건복지부는 2018년에 시야가 확보되고 동반자도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휠체어 관람석 세부 기준을 상세히 추가한 개정법령을 시행했다.

<소극장판-타지>가 열린 공연장은 위 규정이 직접 적용되는 규모의 극장이 아니었지만, 나는 휠체어를 타고 큰 불편함이 없이 공연을 보다가, 무대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들은 내려와서 쉬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층 아래 무대 쪽 객석으로 다가갔다. 만약 이 공연이 바닥 면적 합계 300제곱미터 이상의 공연장에서 열리고, 그래서 휠체어 관람석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면, 공연팀이 휠체어 이용자에게 지정된 관람석으로부터 이탈하라는 요청을 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관람석은 법률로 규율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배리어프리’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서로의 감각과 경험의 경계를 초월하는 데에는 여전히 방해될 수도 있다.

휠체어 관람석을 위한 현실적인 기준은 물론 필요하다.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의 제공도 공연 현장의 특성과 창작자의 자유를 잘 고려해서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식으로 법제화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감각과 신체, 삶의 차이를 가로지르려는 시도는 바로 극장에서, 공연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공연에서 수어통역 제공을 의무로 규정한 법률이 진작에 있었다면, 우리는 <소극장판-타지> 같은 공연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접근 가능한 문화예술이라는 이상을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법이나 권리와는 먼 세계의 목표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법과 권리의 언어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정치적이고 도전적인 현실이, 우리 앞의 무대에 있다. 법은 현실과 다르고, 판-타지는 결코 판타지가 아닌 것이다.

김원영

법, 장애, 공연에 관심을 두고 산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등의 책을 썼다.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예술가편> <무용수-되기>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greece815@gmail.com

사진 제공. 국립극단(촬영 김신중)

2022년 5월 (30호)

상세내용

이슈

<소극장판-타지>는 장애예술을 주제로 한 국립극단 작품개발 사업에서 시작된 연극으로, 공연 접근성에 대해 고민해온 강보름 연출이 장애인·비장애인 배우(고애리, 김지우, 안정우, 이성수)와 함께 만들었다. 이 공연의 무대 위에는 수어통역사 두 사람(신선아, 장진석)이 등장하고, 관객 전체에게 개방된 음성해설이 중간중간 제공된다. 무대를 둘러싼 사면에 앉은 관객을 위해 통역사는 배우의 동선을 따라 영리하게 위치를 이동하고, 방향을 바꾸거나 특정한 포즈를 취하는데(배우와 같이 누워 있다 배우가 대사를 하면 일어나 앉은 채 수어를 한다), 무대가 그야말로 ‘말’에 의해 공간적으로 변주된다. 어떤 순간에는 여전히 통역사의 모습이 가려질 수 있지만, 그 시점을 섬세하게 포착해 문자통역이 제공되는 두 개 면의 스크린 위에 통역사의 얼굴과 손이 등장한다. 물론 영상 수어통역의 역할은 보조적이다. 수어통역은 음성정보의 시각적 번역에 그치지 않고 무대 위의 ‘몸들’과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퍼포먼스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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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정치인이 수어통역에 매료되어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공연법’을 만든다고 해보자. 이 법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XX조 제1항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하거나 설립한 공연장 또는 예술단은 제작공연 프로그램의 10% 이상에서 한국수어 통역을 제공해야 한다.” 정도가 (대략) 떠오른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위와 같은 법률이 제정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공연에서 수어통역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도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공연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음가들을 내뱉는 방식으로 고전적인 연극을 극화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들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외치는 “나는 파멸했어! …나도 도스토옙스키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대사를 “코끼리 끼리끼리 이음 웹진! 17세기 근대인 저작권 JLPT!!”라는 대사로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그해에 그들이 공연하는 극장은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공연을 법률상 기준만큼 무대에 올리지 않았고, 연말 진행되는 이 공연팀의 공연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하기로 약속된 터였다. 이들은 ‘배리어프리 공연법’을 지켜야 할까?

어떤 공연자는 위의 대사들이 맥락상 의미가 없지만 각 단어들은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므로, 당연히 통역사가 배치되어서 “코끼리!” “이음 웹진!” 따위를 아무 맥락 없이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연출가는, 사실 단 하나의 의미도 전달되기를 원치 않았는데, 대사를 쓰다가 본의 아니게 뜻이 있는 단어를 활용했고, 수어통역 배치를 고민하자 각각의 단어가 가진 ‘의미’가 부각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대사를 “ㅇᄅᆞㅓ매어라얼 g ㅣ아ㅓ아ᅟᅥᆫ래너” 따위로, 완전히 의미를 파괴해버리기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 구성원은, 그와 같은 무의미한 음소의 나열도 당연히 수어로, 그러니까 의미를 파괴한 손짓을 이용해서 표현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출은 그 말도 타당하다고 인정했는데, 그러자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수어통역사가 꼭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그냥 우리 팀 ○○씨가 하고 통역비를 받을 수 있게 해주자. 제작비도 많이 부족하니까.” 이 사실을 들은 정치인은 법률 조항을 추가하기로 했다. XX조 제2항 “제1항의 한국수어 통역은 한국농아인협회가 인증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공연의 의미전달을 위해 진행하는 통역 행위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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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법이란 언제나 특정하게 구획된(‘경계가 지어진’) 개념 안으로 현실의 사태들을 포섭하며, 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실천은 예외 규정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특정한 아이디어나 실천을 법제화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거대하게 구획된 경계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배리어프리’에 관한 규정 중 휠체어 관람석에 관한 법령(「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을 보자. 우리나라의 휠체어 관람석 법령은 관람석의 크기와 위치를 정하고, 0.8미터 이하의 안전바를 설치하며 이동식 의자 등을 둘 것을 규정한다. 이러한 기준을 마련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휠체어 관람석을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같이 간 사람이 함께 앉을 수도 없게 설치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공연장이나 영화관 등의 접근성을 보장하라는 여러 목소리가 있었고, 보건복지부는 2018년에 시야가 확보되고 동반자도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휠체어 관람석 세부 기준을 상세히 추가한 개정법령을 시행했다.

<소극장판-타지>가 열린 공연장은 위 규정이 직접 적용되는 규모의 극장이 아니었지만, 나는 휠체어를 타고 큰 불편함이 없이 공연을 보다가, 무대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들은 내려와서 쉬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층 아래 무대 쪽 객석으로 다가갔다. 만약 이 공연이 바닥 면적 합계 300제곱미터 이상의 공연장에서 열리고, 그래서 휠체어 관람석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면, 공연팀이 휠체어 이용자에게 지정된 관람석으로부터 이탈하라는 요청을 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관람석은 법률로 규율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배리어프리’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서로의 감각과 경험의 경계를 초월하는 데에는 여전히 방해될 수도 있다.

휠체어 관람석을 위한 현실적인 기준은 물론 필요하다. 수어통역이나 문자통역의 제공도 공연 현장의 특성과 창작자의 자유를 잘 고려해서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식으로 법제화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감각과 신체, 삶의 차이를 가로지르려는 시도는 바로 극장에서, 공연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공연에서 수어통역 제공을 의무로 규정한 법률이 진작에 있었다면, 우리는 <소극장판-타지> 같은 공연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접근 가능한 문화예술이라는 이상을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법이나 권리와는 먼 세계의 목표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법과 권리의 언어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정치적이고 도전적인 현실이, 우리 앞의 무대에 있다. 법은 현실과 다르고, 판-타지는 결코 판타지가 아닌 것이다.

김원영

법, 장애, 공연에 관심을 두고 산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공저) 등의 책을 썼다. 연극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예술가편> <무용수-되기>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greece815@gmail.com

사진 제공. 국립극단(촬영 김신중)

2022년 5월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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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13: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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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돌아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그간 소식이 잠시중단되어 아쉽고 이음을 읽으며 보이지않게 소통하던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새로운소식은 현실 법의 괴리에대한 다소 무거운 주제였으나 김원영님의 마지막 글에서 저는 희망을찾을수가있었습니다. 법과 권리로 담을수없는 도전적인 현실이 우리앞에있다. 이부분에서 저는 희망적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휠체어 전용석이라 하지만 사실은 불편하고, 수어 표현시 언어사용의 처음본질을 빗겨나간 현실을 우리가 잘풀어나가서 본질을 발휘할수있도록 노력해볼수있다!라고말입니다 항상 어디서나 장애의 불편함이 덜해지도록 함께응원하며,작은힘 보태어봅니다 이벤트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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