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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무용수의 엄마로 살아가기①

이음광장 엄마가 이끌지 않는, 자신의 길에 선 아들에게

  • 조은숙 언어치료사
  • 등록일 2022-12-14
  • 조회수620

이음광장

직업군인의 아내로 딸 하나를 키우며 살다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전까지 나의 시각에서 장애인이나 그들의 주변인은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 1996년 강원도에서 맞닥트린 이 사건을 나는 어떻게든 풀어나가야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즈음 전화 통신망을 이용하여 인터넷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장애아동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필요한 시설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부모 교육을 받기 위해 구불구불 굽은 산길로 왕복 두 시간을 달려야 했고, 짬짬이 책을 읽으며 장애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젖도 빨지 못하고, 항상 축 늘어져서 울지 않는 아이를 자극하기 위해 매일 발바닥을 때려야 하는 아픔은 나를 더 강한 엄마로 만들어갔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언어치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언어치료사가 되기 위해 전공과는 거리가 먼, 나에겐 생소한 책들을 들춰보며, 한글을 읽고 있는데도 새로운 문자를 만난 듯 어려움을 느꼈다. 아들은 나의 임상 치료 대상이 되었고, 그 덕으로 연수를 받은 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로 언어치료사가 되어 다른 장애아동을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병리학을 공부했다.

15년 동안 다양한 장애아동과 그들의 부모를 만나며 나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문제행동은 있었지만, 마음속엔 욕심과 악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의 눈이 너무 맑고 순진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들은 결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비장애인이 갖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신의 사랑을 받는 창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깨달음은 치료의 결과로도 나타났다. 보호자 상담에 있어서 나 또한 같은 입장이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격려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움을 드렸다. 그 사이 아들은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돼 있었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준도 목표도 세울 수 없었다. 어떤 것을 아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고, 많은 일은 아무런 결과물도 내지 않았지만 난 지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기쁨 두 배! 기대하지 않았을 때 내뱉는 한마디와 어제는 할 수 없었던 행동이 갑자기 나타날 때는 비장애 아동을 키울 때보다 두 배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몸도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새 성인이 되어버렸다. 키도 컸고 수염도 자랐다. 혼자 방에 있는 걸 좋아하고, 예쁜 연예인이나 예쁜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떨린단다. 겉모습이 어른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지·정·의가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자랐다면 아니, 모두 어릴 적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면 난 아들에게 항상 엄지척을 보이는 사랑 많은 엄마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내면에는 다섯 살부터 스물일곱 살의 지·정·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기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어와 행동의 연령 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상대하는 내 머리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접었고, 아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들은 두어 개의 직업 경험이 있는데, 두 번째 직장이던 요양병원에서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어르신들 모습에 아들이 경찰을 부른 적이 있다. 싸우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름은 문제해결을 해보려 한 듯하지만, 회사에 더 괜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사직서를 쓰게 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려고만 생각해서 아이에게 ‘안 된다, 하지 마라’라는 말만 들려주었다”던, 장애인 자녀를 둔 어느 어머님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즈음에 장애인 무용 연습생 모집공고를 보고 현대무용 부문에 지원서를 넣었다. 쓸데없는 짓일 거라는 생각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동안 갈등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떻게든 세상과 소통할 길을 찾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무용을 굳이 연관 짓는다면, 교회에서 장애인 예배를 드릴 때 율동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율동은 가사에 맞게 연상되는 동작을 하면 되지만, 현대무용은 ‘창작’이라는 또 다른 과정을 통해 추상적으로 작품을 구상해내야 한다. 그 과정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그 끈을 붙잡고 싶었다. 다운증후군 특징을 가진 이들은 모방을 잘한다. 유튜브에 ‘현대무용’을 검색하여 모방이 가능할 것 같은 영상을 아들에게 보여줬다. 몇 번을 보더니 감정을 잡고 흉내를 냈다. 얼마 후 아들은 오디션을 통과했고, 난 그렇게 장애 청년 무용수의 엄마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는 길로만 아들을 이끌어 왔기에 아들이 ‘무용’을 통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차 엄마가 안내하는 길이 아닌 스스로 배우며 적응해야 하는 길에 들어선 아들이 대견했고, 시간이 지나며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내가 가보지 않았던 그 길에 아이를 밀어 넣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로 인하여 전업주부에서 언어치료사로 내 이름을 갖고 살았듯이, 아들도 앞으로는 ‘장애 무용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내 안에 있다.

  •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들이 23세에 무용을 시작했다.
    발레바를 잡고 하는 기본기를 연습하는 모습

  • 익숙한 움직임과 새로운 움직임을 생각하며 표현하기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sjo64@daum.net

사진 제공. 필자

조은숙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sjo64@daum.net

상세내용

이음광장

직업군인의 아내로 딸 하나를 키우며 살다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전까지 나의 시각에서 장애인이나 그들의 주변인은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 1996년 강원도에서 맞닥트린 이 사건을 나는 어떻게든 풀어나가야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즈음 전화 통신망을 이용하여 인터넷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장애아동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필요한 시설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부모 교육을 받기 위해 구불구불 굽은 산길로 왕복 두 시간을 달려야 했고, 짬짬이 책을 읽으며 장애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젖도 빨지 못하고, 항상 축 늘어져서 울지 않는 아이를 자극하기 위해 매일 발바닥을 때려야 하는 아픔은 나를 더 강한 엄마로 만들어갔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언어치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언어치료사가 되기 위해 전공과는 거리가 먼, 나에겐 생소한 책들을 들춰보며, 한글을 읽고 있는데도 새로운 문자를 만난 듯 어려움을 느꼈다. 아들은 나의 임상 치료 대상이 되었고, 그 덕으로 연수를 받은 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로 언어치료사가 되어 다른 장애아동을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병리학을 공부했다.

15년 동안 다양한 장애아동과 그들의 부모를 만나며 나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문제행동은 있었지만, 마음속엔 욕심과 악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의 눈이 너무 맑고 순진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들은 결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비장애인이 갖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신의 사랑을 받는 창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깨달음은 치료의 결과로도 나타났다. 보호자 상담에 있어서 나 또한 같은 입장이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와 격려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움을 드렸다. 그 사이 아들은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돼 있었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준도 목표도 세울 수 없었다. 어떤 것을 아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고, 많은 일은 아무런 결과물도 내지 않았지만 난 지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기쁨 두 배! 기대하지 않았을 때 내뱉는 한마디와 어제는 할 수 없었던 행동이 갑자기 나타날 때는 비장애 아동을 키울 때보다 두 배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몸도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느새 성인이 되어버렸다. 키도 컸고 수염도 자랐다. 혼자 방에 있는 걸 좋아하고, 예쁜 연예인이나 예쁜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떨린단다. 겉모습이 어른스럽게 보이는 것처럼 지·정·의가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자랐다면 아니, 모두 어릴 적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면 난 아들에게 항상 엄지척을 보이는 사랑 많은 엄마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내면에는 다섯 살부터 스물일곱 살의 지·정·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기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어와 행동의 연령 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아들을 상대하는 내 머리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접었고, 아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들은 두어 개의 직업 경험이 있는데, 두 번째 직장이던 요양병원에서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어르신들 모습에 아들이 경찰을 부른 적이 있다. 싸우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름은 문제해결을 해보려 한 듯하지만, 회사에 더 괜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사직서를 쓰게 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려고만 생각해서 아이에게 ‘안 된다, 하지 마라’라는 말만 들려주었다”던, 장애인 자녀를 둔 어느 어머님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타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즈음에 장애인 무용 연습생 모집공고를 보고 현대무용 부문에 지원서를 넣었다. 쓸데없는 짓일 거라는 생각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동안 갈등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떻게든 세상과 소통할 길을 찾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무용을 굳이 연관 짓는다면, 교회에서 장애인 예배를 드릴 때 율동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율동은 가사에 맞게 연상되는 동작을 하면 되지만, 현대무용은 ‘창작’이라는 또 다른 과정을 통해 추상적으로 작품을 구상해내야 한다. 그 과정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그 끈을 붙잡고 싶었다. 다운증후군 특징을 가진 이들은 모방을 잘한다. 유튜브에 ‘현대무용’을 검색하여 모방이 가능할 것 같은 영상을 아들에게 보여줬다. 몇 번을 보더니 감정을 잡고 흉내를 냈다. 얼마 후 아들은 오디션을 통과했고, 난 그렇게 장애 청년 무용수의 엄마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는 길로만 아들을 이끌어 왔기에 아들이 ‘무용’을 통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차 엄마가 안내하는 길이 아닌 스스로 배우며 적응해야 하는 길에 들어선 아들이 대견했고, 시간이 지나며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내가 가보지 않았던 그 길에 아이를 밀어 넣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로 인하여 전업주부에서 언어치료사로 내 이름을 갖고 살았듯이, 아들도 앞으로는 ‘장애 무용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내 안에 있다.

  •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들이 23세에 무용을 시작했다.
    발레바를 잡고 하는 기본기를 연습하는 모습

  • 익숙한 움직임과 새로운 움직임을 생각하며 표현하기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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