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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인 무용수의 엄마로 살아가기②

이음광장 자신의 세계로 엄마를 이끈 아들의 선물

  • 조은숙 언어치료사
  • 등록일 2023-01-11
  • 조회수505

이음광장

TV가 박스 안에 들어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예쁜 옷을 입은 외국인들이 나와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그 춤을 기억해서 손발을 이리저리 뻗으며 나만의 춤을 추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다가 어지러워 쓰러지기도 했다. 훗날 그것이 발레라는 것을 알았다.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난 그때도 그랬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혼자 있을 때 춤을 추곤 한다(교회에 다닌 후로는 CCM을 틀어놓고 나만의 워십 댄스를 춘다).

나는 인성교육을 중요시했던 가톨릭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학교는 점심 식사 후에는 영락없이 운동장 스피커에서 멕시코 음악 <베사메 무초>가 흘러나왔다. 매일 그 시간이 되면 다수의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친한 친구와 짝을 지어 20분씩 포크댄스를 추었고, 나도 빠지지 않고 그 시간을 즐겼다. 동아리 수업 중에 봉산탈춤, 현대무용 기초, 음악감상 등이 개설되었고, 그 과목을 한 학기씩 선택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가곡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클래식 100곡을 암기하게 했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풍부한 감성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매우 행복한 여고 시절을 보냈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 21세기의 학생들이 대입을 목표로 구성된 커리큘럼으로 교육받는 것을 보면 가슴 한편이 너무 시리고 아프다.

어른이 되면서 여고생의 감성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다운증후군 아들이 무용과 연을 맺게 되면서 ‘내 삶에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느끼는 일이 생겼다. 장애 무용수와 그들의 보호자가 함께하는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선생님의 제안을 받았다. 아들의 공개수업이나 워크숍을 멀리서 지켜볼 때, 흐르는 음악에 내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꾀를 부리거나 고집을 피우는 아들을 보면 ‘왜 저것밖에 표현을 못 하는 거야!’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론 집중하지 못한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안을 받았을 때 “할 수 있어요!”라고 주저없이 대답해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두 명의 어머님도 자녀들과 함께 무용을 한다는 것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함께 연습하면서, 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지도 않았던 아들의 아기 때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래 아기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아들의 손과 발을 흔들어주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주면서 매일 전신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뇌의 운동기능이 발달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24개월에 첫걸음을 뗐다. 그런 아기였던 아들이 작품 연습에서 나보다 세련되게 몸을 움직이고 높이 뛰었다. 고뇌하는 표정으로 낮은 자세에서 높은 자세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무용수가 되어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 지시나 허락을 받았던 아이가 나의 동작에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무용을 하며 우리의 관계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고, 선배가 된 아들은 어쭙잖은 나의 몸짓에 “그게 뭐야!”라고 핀잔을 주거나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날 따라 해봐”라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감사해서 울컥했다. 아들이 나보다 잘하는 것이 평생 없을 거라는 교만한 마음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연습하면서, 창조주는 모든 인간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선물을 공평하게 주셨다고 생각했다.

어깨를 부드럽게 흘러내리게 하고 꼿꼿하게 세운 몸을 60도로 기울이며 8박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반복할 수 있었다면, 난 지금 타고난 춤꾼이라 떠들며 내게 무용을 가르치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긴장된 어깨와 구부러진 등, 벌어진 걸음걸이와 오십견 탓에 올라가지 않는 팔로 마치 생명력을 잃은 뻣뻣한 나무 조각 같았다. 어깨를 내려라, 등을 세우고 가슴을 펴라, 턱을 당기고 정면을 바라보라는 말을 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습으로 인한 신체의 통증은 내 몸이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사용해야 하는 나 아닌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연습 기간이 지나고 나는 여섯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무대 위에 섰다.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던 <열두 개의 문>은 장애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많은 경험에 대한 감정과, 현재 내 앞에 놓인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이 보이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만들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열두 번째의 문을 열었으나, 나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강하고 환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주어진 질문인데도 다른 두 어머니도 “빛이 보인다”고 같은 대답을 했다. 장애청년들이 무용을 하며 갖게 된 희망이 보호자들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바라보지 않는다. 지난 많은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키우다 힘이 없어 쓰러져 있다가도 몸을 뒤집고 팔을 뻗고 무릎을 세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의 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빛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어둠을 덮어버렸고, 여섯 명의 무용수를 무대 위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세 명의 장애 무용수 자녀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무용의 세계로 이끌어 ‘무용린이’로 거듭나게 했다. 난 ‘무용린이’로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 아들이 무용을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과 ‘장애 무용수’라는 전문직업을 가진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돕는 장애인 부모로서의 삶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기 때문이다.

  • 어두운 무대 위 가운데만 조명이 비춘다. 세 명의 무용수가 각자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올라 서서 손을 한 데 모아 머리 위로 올렸고, 얼굴을 들어 시선도 손끝을 바라본다.
  • 어두운 무대 위. 맨발에 편한 복장을 한, 휠체어 장애인을 포함한 여섯 명의 남녀 무용수가 정면을 보며 서 있다.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개막작 <열두 개의 문>으로 장애 무용수 아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sjo64@daum.net

사진 제공. 필자

조은숙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sjo64@daum.net

상세내용

이음광장

TV가 박스 안에 들어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예쁜 옷을 입은 외국인들이 나와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그 춤을 기억해서 손발을 이리저리 뻗으며 나만의 춤을 추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다가 어지러워 쓰러지기도 했다. 훗날 그것이 발레라는 것을 알았다.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난 그때도 그랬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혼자 있을 때 춤을 추곤 한다(교회에 다닌 후로는 CCM을 틀어놓고 나만의 워십 댄스를 춘다).

나는 인성교육을 중요시했던 가톨릭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학교는 점심 식사 후에는 영락없이 운동장 스피커에서 멕시코 음악 <베사메 무초>가 흘러나왔다. 매일 그 시간이 되면 다수의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친한 친구와 짝을 지어 20분씩 포크댄스를 추었고, 나도 빠지지 않고 그 시간을 즐겼다. 동아리 수업 중에 봉산탈춤, 현대무용 기초, 음악감상 등이 개설되었고, 그 과목을 한 학기씩 선택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가곡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클래식 100곡을 암기하게 했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풍부한 감성을 갖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매우 행복한 여고 시절을 보냈다는 느낌이 든다. 반면, 21세기의 학생들이 대입을 목표로 구성된 커리큘럼으로 교육받는 것을 보면 가슴 한편이 너무 시리고 아프다.

어른이 되면서 여고생의 감성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다운증후군 아들이 무용과 연을 맺게 되면서 ‘내 삶에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느끼는 일이 생겼다. 장애 무용수와 그들의 보호자가 함께하는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선생님의 제안을 받았다. 아들의 공개수업이나 워크숍을 멀리서 지켜볼 때, 흐르는 음악에 내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꾀를 부리거나 고집을 피우는 아들을 보면 ‘왜 저것밖에 표현을 못 하는 거야!’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론 집중하지 못한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안을 받았을 때 “할 수 있어요!”라고 주저없이 대답해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두 명의 어머님도 자녀들과 함께 무용을 한다는 것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함께 연습하면서, 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지도 않았던 아들의 아기 때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래 아기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아들의 손과 발을 흔들어주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주면서 매일 전신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뇌의 운동기능이 발달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24개월에 첫걸음을 뗐다. 그런 아기였던 아들이 작품 연습에서 나보다 세련되게 몸을 움직이고 높이 뛰었다. 고뇌하는 표정으로 낮은 자세에서 높은 자세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무용수가 되어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 지시나 허락을 받았던 아이가 나의 동작에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무용을 하며 우리의 관계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고, 선배가 된 아들은 어쭙잖은 나의 몸짓에 “그게 뭐야!”라고 핀잔을 주거나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날 따라 해봐”라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감사해서 울컥했다. 아들이 나보다 잘하는 것이 평생 없을 거라는 교만한 마음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연습하면서, 창조주는 모든 인간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선물을 공평하게 주셨다고 생각했다.

어깨를 부드럽게 흘러내리게 하고 꼿꼿하게 세운 몸을 60도로 기울이며 8박의 동작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반복할 수 있었다면, 난 지금 타고난 춤꾼이라 떠들며 내게 무용을 가르치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긴장된 어깨와 구부러진 등, 벌어진 걸음걸이와 오십견 탓에 올라가지 않는 팔로 마치 생명력을 잃은 뻣뻣한 나무 조각 같았다. 어깨를 내려라, 등을 세우고 가슴을 펴라, 턱을 당기고 정면을 바라보라는 말을 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습으로 인한 신체의 통증은 내 몸이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사용해야 하는 나 아닌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연습 기간이 지나고 나는 여섯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무대 위에 섰다.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던 <열두 개의 문>은 장애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많은 경험에 대한 감정과, 현재 내 앞에 놓인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이 보이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만들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열두 번째의 문을 열었으나, 나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강하고 환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주어진 질문인데도 다른 두 어머니도 “빛이 보인다”고 같은 대답을 했다. 장애청년들이 무용을 하며 갖게 된 희망이 보호자들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바라보지 않는다. 지난 많은 시간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키우다 힘이 없어 쓰러져 있다가도 몸을 뒤집고 팔을 뻗고 무릎을 세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의 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빛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어둠을 덮어버렸고, 여섯 명의 무용수를 무대 위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세 명의 장애 무용수 자녀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무용의 세계로 이끌어 ‘무용린이’로 거듭나게 했다. 난 ‘무용린이’로 매우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 아들이 무용을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과 ‘장애 무용수’라는 전문직업을 가진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돕는 장애인 부모로서의 삶으로 만족하며 감사하기 때문이다.

  • 어두운 무대 위 가운데만 조명이 비춘다. 세 명의 무용수가 각자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올라 서서 손을 한 데 모아 머리 위로 올렸고, 얼굴을 들어 시선도 손끝을 바라본다.
  • 어두운 무대 위. 맨발에 편한 복장을 한, 휠체어 장애인을 포함한 여섯 명의 남녀 무용수가 정면을 보며 서 있다.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개막작 <열두 개의 문>으로 장애 무용수 아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조은숙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의사의 부정적인 소견을 듣고, 배고플 때 “밥 달라”는 소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대학원에서 언어치료를 공부했다. 이 일을 통해 장애아동의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모님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역할도 했다. 말 한마디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어엿한 무용수가 되었고, 아들 덕분에 <열두 개의 문>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며 ‘무용린이’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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