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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이음광장 쓴다

  • 밝은방 창작그룹
  • 등록일 2020-12-23
  • 조회수618

그는 쓴다.
종이와 펜을 향해 상체를 둥글게 웅크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또한 오묘하리만치 집중된 얼굴로, 그는 쓴다. 그날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돌았던 단어를, 말로는 발화하지 않는 언어,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 내려간다.

2019년 4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어떤 날은 교통수단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쓴다. 또 어떤 날은 곤충과 과일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쓴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쓰기도 하고, 분류 없이 떠오르는 대로 쓰기도 하며, 무한히 명사를 나열하다 문득 동사를 써서 크게 소리치기도 한다.

2019년 10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2020년 2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그런 다음 오린다. 쓴 것을 오린다. 쓸 때와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집중된 얼굴로, 가위를 쥔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해, 그는 오린다. 하나의 단어씩 오리기도 하고 단어의 종류대로 묶어 덩어리가 되도록 오리기도 하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게 오려진 글자는 버린다. 가차 없이 조각조각 잘라버린다. 어떤 한 단어가 마음에 들게 잘리지 않아 그 단어가 포함된 글자 덩어리를 모두 잘라버릴 때도 있고, 두 시간 내내 공들여 쓴 글 전부를 잘라버릴 때도 있다.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것을 태연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조각조각 잘라버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잘라버리지 않더라도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보관, 보존되는 것을 거부했다. 워크숍 시간이 끝나면 그의 책상 위에 남는 건 창작물이라기보단 어떤 창작의 흔적. 그 과정을 지켜본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집중되고 몰입된 시간의 흔적이었다. 반대로 그 과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냥 흐트러진 글자 조각에 불과할 수 있었다.

2019년 3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그가 자신이 만든 것을 창작물로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하는 것이 워크숍의 목표가 되었다. 말로는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적절한 순간마다 직접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다. 그가 오린 글자들을 책상 위에 임시로 배열해보는 순간마다 사진을 찍어 배열된 풍경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날의 글쓰기가 완성되면 일부러 옆에서 커다란 종이를 재단하여 그의 글자들을 소중히 포장하고 꼼꼼히 라벨을 붙여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글자를 아기처럼 소중히 다루는 내 모습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시간이 가면서 그가 자신의 작업물을 잘라버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자신이 배열한 글자가 풀질되어 종이에 붙고, 그 종이가 파일 속에 보관되는 것을 받아들었다. 한 장 한 장 작업물이 채워져 한 권의 두툼한 파일이 완성되는 경험을 하더니, 이후부터는 그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파일링했다. 글을 쓰고 오린 뒤, 곧장 파일 속지를 꺼내어 글자를 배열하여 붙이고는, 다시 파일에 끼워 넣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파일 속지에 글쓰기를 배열하는 모습(2020.7)

2020년 7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이제 차주환 창작자는 그날의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그동안 자신이 어떤 글쓰기를 했는지 죽 훑은 다음, 오늘의 글쓰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파일링이 가능해진 뒤로 배열이 다양해지고 밀도가 높아진 건 이러한 선행작업 덕분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에 차이와 변화도 생겨날 수 있었다.

2020년 3월 처음으로 완성된 글쓰기 파일

여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 1년은 그를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다음 1년은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한 방식을 찾아보는 시간이었고, 마지막 1년은 찾은 방식을 적용해보는 시간이었다. 그의 글쓰기를 본 누군가, 이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이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존재의 태도가 서서히 변화했던 시간이고 그 변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글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느리지만 분명히, 차주환 창작자와 그의 글쓰기는 변화하고 있다. 그가 펜을 쥐고 있는 한, 그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차주환 창작자는 현재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더스페셜아트:블루윙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밝은방

밝은방 

밝은방은 미술을 좋아하거나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작업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의 이름입니다. 지난 10년간 아르브뤼(Art Brut)와 에이블아트(Able-art) 분야에서 각종 예술워크숍, 전시, 출판물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김효나와 김인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brightworkroom.modoo.at
brightworkroom@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rightworkroom.modoo.at

밝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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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workroom@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rightworkroom.modoo.at

상세내용

그는 쓴다.
종이와 펜을 향해 상체를 둥글게 웅크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또한 오묘하리만치 집중된 얼굴로, 그는 쓴다. 그날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돌았던 단어를, 말로는 발화하지 않는 언어,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 내려간다.

2019년 4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어떤 날은 교통수단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쓴다. 또 어떤 날은 곤충과 과일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쓴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모든 종류에 대해 쓰기도 하고, 분류 없이 떠오르는 대로 쓰기도 하며, 무한히 명사를 나열하다 문득 동사를 써서 크게 소리치기도 한다.

2019년 10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2020년 2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그런 다음 오린다. 쓴 것을 오린다. 쓸 때와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집중된 얼굴로, 가위를 쥔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해, 그는 오린다. 하나의 단어씩 오리기도 하고 단어의 종류대로 묶어 덩어리가 되도록 오리기도 하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게 오려진 글자는 버린다. 가차 없이 조각조각 잘라버린다. 어떤 한 단어가 마음에 들게 잘리지 않아 그 단어가 포함된 글자 덩어리를 모두 잘라버릴 때도 있고, 두 시간 내내 공들여 쓴 글 전부를 잘라버릴 때도 있다.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것을 태연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조각조각 잘라버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잘라버리지 않더라도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보관, 보존되는 것을 거부했다. 워크숍 시간이 끝나면 그의 책상 위에 남는 건 창작물이라기보단 어떤 창작의 흔적. 그 과정을 지켜본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집중되고 몰입된 시간의 흔적이었다. 반대로 그 과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냥 흐트러진 글자 조각에 불과할 수 있었다.

2019년 3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그가 자신이 만든 것을 창작물로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하는 것이 워크숍의 목표가 되었다. 말로는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는 일이니 나는 적절한 순간마다 직접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다. 그가 오린 글자들을 책상 위에 임시로 배열해보는 순간마다 사진을 찍어 배열된 풍경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날의 글쓰기가 완성되면 일부러 옆에서 커다란 종이를 재단하여 그의 글자들을 소중히 포장하고 꼼꼼히 라벨을 붙여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글자를 아기처럼 소중히 다루는 내 모습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시간이 가면서 그가 자신의 작업물을 잘라버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자신이 배열한 글자가 풀질되어 종이에 붙고, 그 종이가 파일 속에 보관되는 것을 받아들었다. 한 장 한 장 작업물이 채워져 한 권의 두툼한 파일이 완성되는 경험을 하더니, 이후부터는 그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파일링했다. 글을 쓰고 오린 뒤, 곧장 파일 속지를 꺼내어 글자를 배열하여 붙이고는, 다시 파일에 끼워 넣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파일 속지에 글쓰기를 배열하는 모습(2020.7)

2020년 7월 차주환 창작자의 글쓰기

이제 차주환 창작자는 그날의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그동안 자신이 어떤 글쓰기를 했는지 죽 훑은 다음, 오늘의 글쓰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파일링이 가능해진 뒤로 배열이 다양해지고 밀도가 높아진 건 이러한 선행작업 덕분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에 차이와 변화도 생겨날 수 있었다.

2020년 3월 처음으로 완성된 글쓰기 파일

여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 1년은 그를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다음 1년은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한 방식을 찾아보는 시간이었고, 마지막 1년은 찾은 방식을 적용해보는 시간이었다. 그의 글쓰기를 본 누군가, 이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이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존재의 태도가 서서히 변화했던 시간이고 그 변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글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느리지만 분명히, 차주환 창작자와 그의 글쓰기는 변화하고 있다. 그가 펜을 쥐고 있는 한, 그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차주환 창작자는 현재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더스페셜아트:블루윙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김효나(밝은방 공동대표)
소설가이자 창작그룹 밝은방의 공동대표이다.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소설집 『2인용 독백』을 썼고, <노트소년들>, <날것1_고립의 텍스트>, <날것2_환상자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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