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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도 배려도 아닌 진정한 협업을 위하여

이슈 굳이 꺼내는 이야기들

  •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 등록일 2023-11-29
  • 조회수1241

이슈

대학로 민간 연극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장애인 관객 접근성에 대한 고민과 실천, 장애인 창작자와의 협업이 최근 1~2년 사이 국공립 공연단체와 공연장으로 흡수되고 대대적인 ‘배리어프리’ ‘무장애’ 기획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장애인 접근성과 관련된 흐름은 실체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커 보이는 효과와 함께,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 전체, 거기에 종사하는 공연예술인이 앞장서서 장애를 사고하고 신체-감각-신경다양성과 공존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이미지를 갖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미지 뒤에서 암암리에 떠도는 목격담, 경험담들이 있다. 공론화되면 장애 접근성 관련 움직임이나 장애인 창작자들과의 협업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실패를 두려워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원래대로 퇴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꾹꾹 담아뒀던 이야기들.

이 글에서는 공연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애예술인이자 관객, 장애인의 창작과 관람의 접근성 확보를 맡는 협업자이자 관객인 이들을 취재하여 이들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구색 맞추기’의 사례들을 정리했다.

#1.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의 구색
필요한 건 ‘배우 김OO’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

대부분의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에서 연출이나 안무, 소위 프로덕션의 ‘결정권’을 가진 역할은 비장애인이 맡고, 무대 위에서 디렉션을 ‘수행’하는 퍼포머 중 몇몇 역할을 ‘장애인’이 맡는 것이 현실이다. 기획 단계에서의 아름답고 올바른 의도와는 달리 창작 현장에서 장애인 퍼포머들은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때로는 지극히 차별적인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장애인 대 비장애인’, ‘연출자·안무가 대 퍼포머’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이중의 위계 공식 속에서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감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결국 장애인 퍼포머들은 자신의 ‘역량’과 ‘존재 의미’를 의심하기도 한다.

신체장애가 있는 퍼포머가 있었는데, 느린 움직임을 불편해하는데도 오히려 그런 움직임을 요구했다. 장애·비장애 퍼포머가 같이 서는 무대였는데, 장애 퍼포머들만 느린 움직임을 요구받을 때, 장애가 있는 몸을 부각하기 위한 연출이라고 느꼈다.

‘그 역할의 대사가 하나하나 잘 꽂혔으면 좋겠다’는 연출자의 요청이 있었다. 신체장애로 인한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에게 ‘정확한’ ‘똑 부러지는’ 발화라는 요구는 비장애인 중심의 디렉션이다.

뇌병변장애는 몸에 떨림이 있어 무게감 있는 소품을 선호하는데, 극장에 들어가서야 확인한 소품은 종이 재질이었다. 손 떨림이 있는데도 낭독공연 할 때 대본을 손으로 들고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할에 잘 어울리는 의상, 공연과 잘 맞는 ‘예쁜’ 의상은 장애가 있는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했다.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대사에 대한 의견을 말하자 ‘피해의식’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비장애인 배우에게는 표정, 대사의 톤, 뉘앙스까지 디렉션 하면서 왜 농인 배우에게는 디렉션을 주지 않느냐고 묻자 ‘수어를 몰라서’라고 대답했다.

구화소통이 가능한 농인 배우와 함께 하는 공연의 작품분석 회의에서 구화소통과 문자통역을 위해 가급적 종결형 어미를 쓰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말이 너무 빠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시 한번 요청하니 ‘이미 천천히, 쉽게 말하고 있는데?’라고 반응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연출이 농인 배우에게 ‘세상 좋아졌다. 헬렌 켈러가 왜 위대한지 아냐?’라고 말했고, 이를 수어통역으로 전해 들은 농인 배우는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농인 배우가 참여하는 공연의 극장 리허설 때 연출자가 암전 상태에서 마이크를 잡고 디렉션 했다. 수어통역자가 작업등을 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암전은 암전이어야 한다’고 했다. 암전 중에 큰 세트가 움직이는 위험한 상황이어서, 접근성 매니저와 연출자의 언성이 높아지며 갈등이 빚어졌다. 정작 농인 배우는 상황에 대한 정보 없이 깜깜한 무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장애인 캐릭터가 나오는 공연에서 비장애인이 연기했다. ‘안전상’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배우를 비장애인으로 바꾸는 선택 대신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주변 배우들도 장애인 배우가 의견을 제시하면 ‘그래, 네가 맞아’라며 다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연기한다.

단역으로 나오는 장애인 배우에게 공연 프레스콜 후 인터뷰가 잡혔다. 어떤 의미였을까?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줄 알았다”는 관객 리뷰는 나에게 칭찬이 아니라 장애 혐오 발언이었다.

무대에서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역할로 공연에 참여했다. 팀에서 과연 배우 개인의 특징을 알고 역할을 정해 제안했던 걸까, 라는 의문이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필요했던 건 배우 김OO이 아니라 ‘그냥 장애 퍼포머’였던 것 같다.

역할하고 아무 상관 없이 장애인 배우가 섭외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럴 경우 대부분 ‘휠체어’ 장애인을 선호한다. 일종의 이미지 캐스팅이다.

장애인 혹은 장애여성을 개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대상화다.

장애예술인들과 작업하다가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을 해보니 공연이 만들어지는 전반적인 ‘속도’ 자체가 다르다. 이 속도가 고려되어야 한다.

기획 이후의 단계, 예를 들면 기술 파트나 하우스 쪽에서는 장애인 접근성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나?

‘공연장 안전교육’이라는 걸 하잖나. 그 내용에 장애예술인은 전제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많은 기관이 요구하는 ‘성평등·성폭력 예방교육’조차 모든 장애예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2. 장애인 관람 접근성 확보의 구색
“올 지도 몰라서” 혹은 “오든 말든”

장애인 관객의 관람 접근성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 운운하는 거대한 견해를 굳이 언급할 것도 없이, 공연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 장애가 있는 내 친구와 지인이 내 공연을 봐줬으면 좋겠다,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우리가 함께 만든 공연을 보고 즐기고 평가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관객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올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으로 홍보하는 활동, 공감 불가의 ‘배리어’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기획의 과정 역시 접근성 고민 안에 당연히 포함된다. 그런데 정작 장애인 관객은 빠져있고, 일단 공연장 객석까지 스스로 정보를 찾고 길을 찾아 도달한 장애인에 대한 접근성을 ‘표방’하고 ‘전시’하는 장치들만이 존재한다.

‘무대가 예쁘지 않다’는 연출자의 한마디에 수어통역자의 자리가 점점 구석으로 몰린다. 농인 관객에게 공연 중 수어통역자의 위치도 공지되지 않는다.

기왕 자막을 만드니 전 회차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연출이 “전 회차를 하면 자막을 선호하지 않는 (청인)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하게 되니 안 된다”라고 말하더라.

극장이 아무리 공연 관람에서의 ’배리어프리’를 기획하고 팀을 꾸렸다 해도, 연출자 한 사람이 장애 감수성이 없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 장애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하면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극의 위계성을 제대로 느꼈다.

여러 작품을 연속으로 공연하는 기획에서 어떤 작품에는 수어통역, 어떤 작품에는 음성해설, 어떤 작품에는 자막이 있다. 그 작품이 특정 장애 유형에 소구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보고서 쓸 때 그 기획은 완벽하게 여러 장애인 관람 접근성을 확보한 기획으로 남을 거다.

(농인이지만) 무대 위 배우를 보고 싶은데 자막과 수어통역 등의 정보량이 너무 많아 공연을 따라가기 너무 바쁘다. 그래서 차라리 수어통역을 보지 않고 배우만을 볼 때도 있다. 배우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수어통역자에게 의상과 분장을 배우와 똑같이 시키고 공연하게 하는 것도 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연에 여러 명의 수어통역자가 있으면 무조건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구어 사용자의 말투가 다르듯 수어통역자마다 사용하는 수어의 톤앤매너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어떤 행위를 하는 관객참여형 공연이었는데, 농인 관객이 참여하겠다고 나갔다. 옆에 앉아 있던 행사 안내 수어통역자가 같이 나가 통역하겠다고 했지만, 진행자가 농인 관객에게 ‘당신은 할 수 없으니 들어가 달라’고 했다.

공연 전날까지 수신기를 예약해야 음성해설을 들을 수 있고, 이동지원도 전날까지 신청해야 한다는 공연이 있다. 이런 안내는 모두 홈페이지나 예매사이트에만 기재되어 있다. 전화를 받는 곳은 담당자도 아니고 콜센터인데, 장애인에게 그 정보가 닿을까? 누구를 위한 접근성인가?

음성해설은 시각장애인 관객이 어디에 앉는지도 고려해 대본을 쓴다. 시각장애인 관객이 예매 시 안내할 지정 객석에 대해 질문하니, ‘그런 건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장애인 할인 예매자 중에 (시각장애인이) 몇 분은 있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당황했다. 시각장애인이 온다는 현실적인 상정조차 없이 음성해설을 의뢰한 것이다.

음성해설도 작품의 일부이며 관객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작업임에도 팀에 기본적인 정보조차 전달되지 않아, ‘이거 대체 뭐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연출부, 배우에게 너무 많이 받았다.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 연출도 있다. 음성해설 대본 작업자가 왜 연습실에 와있는지 모르고 알 생각도 관심도 없다. 연출부에 어떤 질문을 하면 일단 불편해한다. 자신들의 작업에 문제가 될까 봐, 혹은 잘 모른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진다. 배우의 동선이 사소하게 바뀌어도 음성해설이 달라져야 하는데, 누구도 전달해 주지 않았다.

실제 공연에서 배우들이 몸과 말의 애드리브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음성해설이나 자막을 통해 관람하던 장애인 관객들은 옆 사람이 왜 웃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터치 투어를 준비했지만, 신청자가 없었다. 그런데 리허설을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거다. ‘누구에게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정안인인 담당 프로듀서가 자기 팔꿈치를 내밀더라. 심지어 중간쯤에 그만해도 된다는 거다. 사진 다 찍었다고.

장애인의 몸과 장애를 주시하지 않는다. 주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발달한 상체만을 언급할 뿐, 절단된 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금기인 것처럼. 그러다 보니 비평에서조차 장애인 배우가 무대에 있기만 해도 좋은 작품이라는 식으로 귀결된다.

장애인 관람 접근성에 대한 평가라는 것은 오직 ‘자막의 위치’ ‘수어통역의 위치’로만 판단된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좋은 일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공연계에서 너도나도 수어통역을 원하다 보니 자격증조차 없는 학생이 공연 수어통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경력직이어도 수어 수준이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통역자도 있고. 그런데 이 수어를 평가할 만한 사람이 공연팀 안에는 없다. 일부 수어통역자들에게 지금의 연극계는 ‘긴장할 필요도 없는 대목’인 셈이다.

비장애인 관객이 음성해설을 듣고 ‘역시 무장애 공연!’이라고 리뷰를 남겼다. ‘무장애 공연, 완벽했다’라는 기사도 나오고. 프레스콜을 보면서 기자들이 눈물을 흘린 건 내용 때문이었다고 믿고 싶다.

#3. 접근성 매니저라는 구색
할 일과 책임만 많고 권한은 없는 만능캐

늘 새로운 역할들이 생겨나고 개발되는 공연예술계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역할이 ‘접근성 매니저’가 아닐까. 최근에는 접근성 프로듀서, 접근성 디렉터, 접근성 코디네이터 등으로도 변주되고 있다. 실제로 공연 홍보 전단에 ‘접근성 매니저’라는 크레딧이 기재되어 있으면 안심하게 된다는 장애인 관객도 없지는 않으며, 장애인 관객을 고려하는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 크레딧이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이 모든 장애인 접근성을 고민하고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을까. 혹여 팀이 스스로 고민하거나 떠맡기 어려운, 혹은 싫은 일을 몰아주는 창구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접근성 매니저의 역할이 모호하다. 또한 음성해설 작가가 ‘시각장애인 담당’, 수어통역자가 ‘청각장애인 담당’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접근성 매니저도 모두 비장애인이다. 기획 단계부터 결합해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한계가 있다. 모든 장애의 문화, 특징, 언어를 아는 접근성 매니저는 없다. 매니저마다 특별히 관심과 경험이 풍부한 장애 유형이 있다. 그런데도 접근성 매니저를 ‘만능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권한은 없고 외부에서 필요한 조력자를 아웃소싱하는 역할이다.

접근성 매니저나 수어통역자가 배우처럼 시간을 공연에 투여하지 않는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데 배우만큼 접근성 매니저나 수어통역자를 존중하고 배우 개런티만큼의 사례비를 책정하는 프로덕션도 없다.

다들 돈만 있으면 장애인 관객의 관람 접근권이 보장될 것으로 생각한다. 돈 몇 푼 쥐여 주면 해결할 수 있는 미션이 되어버렸다. 돈으로 접근성 매니저를 고용하고 많은 통역자를 쓴다. 그리고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금을 요구한다.

공연 홍보 전단의 크레딧에 ‘수어통역, 문자통역, 접근성 매니저’를 적는 것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작업이 ‘피씨함(정치적 올바름)’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는 예술인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은 특정한 예술인, 특정한 예술기관, 특정한 기획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요즘에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러나 예산이 확보된다는 전제하에 고민하게 되는 장애인-비장애인 협업과 장애인 관람 접근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어떻게’ 장애인 창작자와 협업하고자 하는가, ‘왜’ 장애인 접근성을 고민하게 되었을까. 혹여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도 못한 채, 누군가는 자조적으로 ‘패션’이라고도 표현한 이 흐름에 동참했다면, 지금이라도 잠깐 숨을 고르며 함께 작업하고 싶은 협업자와 관객에 대해 고민하자는 제안이다.

나아가 누군가의 위험을 알면서도 왜 칠흑 같은 암전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소품의 무게가 어차피 허구인 무대의 진정성을 정말 그렇게나 훼손하는 것인지, 설령 속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한다손 치더라도 ‘자유’라는 명목으로 그 생각을 타인에게 발화해도 되는지, 누군가 한 명의 차별적인 언행조차 내부적으로 거르거나 문제시하고 논의하지 않는 창작의 현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와 함께 만들고 볼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잘’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연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우리가 공연에 관해 굳게 믿어왔던 신념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보자는 제안이다.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사유하게 하는, 우리가 공연을 내보이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실천하게 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다시 고민할 기회가 지금 주어졌다.

공연 같은 공동의 작업이 서로 다른 신체, 정신, 신경의 조건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진행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실패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순간 변화는 멈추게 되지 않을까. 멈추지 않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실수와 실패와 오류를 아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와 ‘정상성’에 대해 질문Question을 던지고 ‘별난Queer’ 존재들의 삶을 응시하는 ‘플랜Q프로젝트’(2019~현재)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breeeeze@naver.com

2023년 12월 (48호)

상세내용

이슈

대학로 민간 연극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장애인 관객 접근성에 대한 고민과 실천, 장애인 창작자와의 협업이 최근 1~2년 사이 국공립 공연단체와 공연장으로 흡수되고 대대적인 ‘배리어프리’ ‘무장애’ 기획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장애인 접근성과 관련된 흐름은 실체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커 보이는 효과와 함께, 연극을 비롯한 공연예술 전체, 거기에 종사하는 공연예술인이 앞장서서 장애를 사고하고 신체-감각-신경다양성과 공존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이미지를 갖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미지 뒤에서 암암리에 떠도는 목격담, 경험담들이 있다. 공론화되면 장애 접근성 관련 움직임이나 장애인 창작자들과의 협업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실패를 두려워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원래대로 퇴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꾹꾹 담아뒀던 이야기들.

이 글에서는 공연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애예술인이자 관객, 장애인의 창작과 관람의 접근성 확보를 맡는 협업자이자 관객인 이들을 취재하여 이들이 직접 겪거나 목격한 ‘구색 맞추기’의 사례들을 정리했다.

#1.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의 구색
필요한 건 ‘배우 김OO’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

대부분의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에서 연출이나 안무, 소위 프로덕션의 ‘결정권’을 가진 역할은 비장애인이 맡고, 무대 위에서 디렉션을 ‘수행’하는 퍼포머 중 몇몇 역할을 ‘장애인’이 맡는 것이 현실이다. 기획 단계에서의 아름답고 올바른 의도와는 달리 창작 현장에서 장애인 퍼포머들은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때로는 지극히 차별적인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장애인 대 비장애인’, ‘연출자·안무가 대 퍼포머’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이중의 위계 공식 속에서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감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결국 장애인 퍼포머들은 자신의 ‘역량’과 ‘존재 의미’를 의심하기도 한다.

신체장애가 있는 퍼포머가 있었는데, 느린 움직임을 불편해하는데도 오히려 그런 움직임을 요구했다. 장애·비장애 퍼포머가 같이 서는 무대였는데, 장애 퍼포머들만 느린 움직임을 요구받을 때, 장애가 있는 몸을 부각하기 위한 연출이라고 느꼈다.

‘그 역할의 대사가 하나하나 잘 꽂혔으면 좋겠다’는 연출자의 요청이 있었다. 신체장애로 인한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에게 ‘정확한’ ‘똑 부러지는’ 발화라는 요구는 비장애인 중심의 디렉션이다.

뇌병변장애는 몸에 떨림이 있어 무게감 있는 소품을 선호하는데, 극장에 들어가서야 확인한 소품은 종이 재질이었다. 손 떨림이 있는데도 낭독공연 할 때 대본을 손으로 들고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할에 잘 어울리는 의상, 공연과 잘 맞는 ‘예쁜’ 의상은 장애가 있는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했다.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대사에 대한 의견을 말하자 ‘피해의식’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비장애인 배우에게는 표정, 대사의 톤, 뉘앙스까지 디렉션 하면서 왜 농인 배우에게는 디렉션을 주지 않느냐고 묻자 ‘수어를 몰라서’라고 대답했다.

구화소통이 가능한 농인 배우와 함께 하는 공연의 작품분석 회의에서 구화소통과 문자통역을 위해 가급적 종결형 어미를 쓰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말이 너무 빠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시 한번 요청하니 ‘이미 천천히, 쉽게 말하고 있는데?’라고 반응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연출이 농인 배우에게 ‘세상 좋아졌다. 헬렌 켈러가 왜 위대한지 아냐?’라고 말했고, 이를 수어통역으로 전해 들은 농인 배우는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농인 배우가 참여하는 공연의 극장 리허설 때 연출자가 암전 상태에서 마이크를 잡고 디렉션 했다. 수어통역자가 작업등을 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암전은 암전이어야 한다’고 했다. 암전 중에 큰 세트가 움직이는 위험한 상황이어서, 접근성 매니저와 연출자의 언성이 높아지며 갈등이 빚어졌다. 정작 농인 배우는 상황에 대한 정보 없이 깜깜한 무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장애인 캐릭터가 나오는 공연에서 비장애인이 연기했다. ‘안전상’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배우를 비장애인으로 바꾸는 선택 대신 안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주변 배우들도 장애인 배우가 의견을 제시하면 ‘그래, 네가 맞아’라며 다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연기한다.

단역으로 나오는 장애인 배우에게 공연 프레스콜 후 인터뷰가 잡혔다. 어떤 의미였을까?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줄 알았다”는 관객 리뷰는 나에게 칭찬이 아니라 장애 혐오 발언이었다.

무대에서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역할로 공연에 참여했다. 팀에서 과연 배우 개인의 특징을 알고 역할을 정해 제안했던 걸까, 라는 의문이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필요했던 건 배우 김OO이 아니라 ‘그냥 장애 퍼포머’였던 것 같다.

역할하고 아무 상관 없이 장애인 배우가 섭외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럴 경우 대부분 ‘휠체어’ 장애인을 선호한다. 일종의 이미지 캐스팅이다.

장애인 혹은 장애여성을 개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대상화다.

장애예술인들과 작업하다가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을 해보니 공연이 만들어지는 전반적인 ‘속도’ 자체가 다르다. 이 속도가 고려되어야 한다.

기획 이후의 단계, 예를 들면 기술 파트나 하우스 쪽에서는 장애인 접근성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나?

‘공연장 안전교육’이라는 걸 하잖나. 그 내용에 장애예술인은 전제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많은 기관이 요구하는 ‘성평등·성폭력 예방교육’조차 모든 장애예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2. 장애인 관람 접근성 확보의 구색
“올 지도 몰라서” 혹은 “오든 말든”

장애인 관객의 관람 접근성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 운운하는 거대한 견해를 굳이 언급할 것도 없이, 공연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 장애가 있는 내 친구와 지인이 내 공연을 봐줬으면 좋겠다,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우리가 함께 만든 공연을 보고 즐기고 평가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관객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올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으로 홍보하는 활동, 공감 불가의 ‘배리어’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기획의 과정 역시 접근성 고민 안에 당연히 포함된다. 그런데 정작 장애인 관객은 빠져있고, 일단 공연장 객석까지 스스로 정보를 찾고 길을 찾아 도달한 장애인에 대한 접근성을 ‘표방’하고 ‘전시’하는 장치들만이 존재한다.

‘무대가 예쁘지 않다’는 연출자의 한마디에 수어통역자의 자리가 점점 구석으로 몰린다. 농인 관객에게 공연 중 수어통역자의 위치도 공지되지 않는다.

기왕 자막을 만드니 전 회차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연출이 “전 회차를 하면 자막을 선호하지 않는 (청인)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하게 되니 안 된다”라고 말하더라.

극장이 아무리 공연 관람에서의 ’배리어프리’를 기획하고 팀을 꾸렸다 해도, 연출자 한 사람이 장애 감수성이 없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 장애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하면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극의 위계성을 제대로 느꼈다.

여러 작품을 연속으로 공연하는 기획에서 어떤 작품에는 수어통역, 어떤 작품에는 음성해설, 어떤 작품에는 자막이 있다. 그 작품이 특정 장애 유형에 소구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보고서 쓸 때 그 기획은 완벽하게 여러 장애인 관람 접근성을 확보한 기획으로 남을 거다.

(농인이지만) 무대 위 배우를 보고 싶은데 자막과 수어통역 등의 정보량이 너무 많아 공연을 따라가기 너무 바쁘다. 그래서 차라리 수어통역을 보지 않고 배우만을 볼 때도 있다. 배우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수어통역자에게 의상과 분장을 배우와 똑같이 시키고 공연하게 하는 것도 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연에 여러 명의 수어통역자가 있으면 무조건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구어 사용자의 말투가 다르듯 수어통역자마다 사용하는 수어의 톤앤매너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어떤 행위를 하는 관객참여형 공연이었는데, 농인 관객이 참여하겠다고 나갔다. 옆에 앉아 있던 행사 안내 수어통역자가 같이 나가 통역하겠다고 했지만, 진행자가 농인 관객에게 ‘당신은 할 수 없으니 들어가 달라’고 했다.

공연 전날까지 수신기를 예약해야 음성해설을 들을 수 있고, 이동지원도 전날까지 신청해야 한다는 공연이 있다. 이런 안내는 모두 홈페이지나 예매사이트에만 기재되어 있다. 전화를 받는 곳은 담당자도 아니고 콜센터인데, 장애인에게 그 정보가 닿을까? 누구를 위한 접근성인가?

음성해설은 시각장애인 관객이 어디에 앉는지도 고려해 대본을 쓴다. 시각장애인 관객이 예매 시 안내할 지정 객석에 대해 질문하니, ‘그런 건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장애인 할인 예매자 중에 (시각장애인이) 몇 분은 있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당황했다. 시각장애인이 온다는 현실적인 상정조차 없이 음성해설을 의뢰한 것이다.

음성해설도 작품의 일부이며 관객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작업임에도 팀에 기본적인 정보조차 전달되지 않아, ‘이거 대체 뭐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연출부, 배우에게 너무 많이 받았다.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 연출도 있다. 음성해설 대본 작업자가 왜 연습실에 와있는지 모르고 알 생각도 관심도 없다. 연출부에 어떤 질문을 하면 일단 불편해한다. 자신들의 작업에 문제가 될까 봐, 혹은 잘 모른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진다. 배우의 동선이 사소하게 바뀌어도 음성해설이 달라져야 하는데, 누구도 전달해 주지 않았다.

실제 공연에서 배우들이 몸과 말의 애드리브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음성해설이나 자막을 통해 관람하던 장애인 관객들은 옆 사람이 왜 웃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터치 투어를 준비했지만, 신청자가 없었다. 그런데 리허설을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거다. ‘누구에게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정안인인 담당 프로듀서가 자기 팔꿈치를 내밀더라. 심지어 중간쯤에 그만해도 된다는 거다. 사진 다 찍었다고.

장애인의 몸과 장애를 주시하지 않는다. 주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발달한 상체만을 언급할 뿐, 절단된 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금기인 것처럼. 그러다 보니 비평에서조차 장애인 배우가 무대에 있기만 해도 좋은 작품이라는 식으로 귀결된다.

장애인 관람 접근성에 대한 평가라는 것은 오직 ‘자막의 위치’ ‘수어통역의 위치’로만 판단된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좋은 일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공연계에서 너도나도 수어통역을 원하다 보니 자격증조차 없는 학생이 공연 수어통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경력직이어도 수어 수준이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통역자도 있고. 그런데 이 수어를 평가할 만한 사람이 공연팀 안에는 없다. 일부 수어통역자들에게 지금의 연극계는 ‘긴장할 필요도 없는 대목’인 셈이다.

비장애인 관객이 음성해설을 듣고 ‘역시 무장애 공연!’이라고 리뷰를 남겼다. ‘무장애 공연, 완벽했다’라는 기사도 나오고. 프레스콜을 보면서 기자들이 눈물을 흘린 건 내용 때문이었다고 믿고 싶다.

#3. 접근성 매니저라는 구색
할 일과 책임만 많고 권한은 없는 만능캐

늘 새로운 역할들이 생겨나고 개발되는 공연예술계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역할이 ‘접근성 매니저’가 아닐까. 최근에는 접근성 프로듀서, 접근성 디렉터, 접근성 코디네이터 등으로도 변주되고 있다. 실제로 공연 홍보 전단에 ‘접근성 매니저’라는 크레딧이 기재되어 있으면 안심하게 된다는 장애인 관객도 없지는 않으며, 장애인 관객을 고려하는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 크레딧이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이 모든 장애인 접근성을 고민하고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을까. 혹여 팀이 스스로 고민하거나 떠맡기 어려운, 혹은 싫은 일을 몰아주는 창구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접근성 매니저의 역할이 모호하다. 또한 음성해설 작가가 ‘시각장애인 담당’, 수어통역자가 ‘청각장애인 담당’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접근성 매니저도 모두 비장애인이다. 기획 단계부터 결합해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한계가 있다. 모든 장애의 문화, 특징, 언어를 아는 접근성 매니저는 없다. 매니저마다 특별히 관심과 경험이 풍부한 장애 유형이 있다. 그런데도 접근성 매니저를 ‘만능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봤자 권한은 없고 외부에서 필요한 조력자를 아웃소싱하는 역할이다.

접근성 매니저나 수어통역자가 배우처럼 시간을 공연에 투여하지 않는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데 배우만큼 접근성 매니저나 수어통역자를 존중하고 배우 개런티만큼의 사례비를 책정하는 프로덕션도 없다.

다들 돈만 있으면 장애인 관객의 관람 접근권이 보장될 것으로 생각한다. 돈 몇 푼 쥐여 주면 해결할 수 있는 미션이 되어버렸다. 돈으로 접근성 매니저를 고용하고 많은 통역자를 쓴다. 그리고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금을 요구한다.

공연 홍보 전단의 크레딧에 ‘수어통역, 문자통역, 접근성 매니저’를 적는 것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작업이 ‘피씨함(정치적 올바름)’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는 예술인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은 특정한 예술인, 특정한 예술기관, 특정한 기획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요즘에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러나 예산이 확보된다는 전제하에 고민하게 되는 장애인-비장애인 협업과 장애인 관람 접근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기 위함이다. 애초에 ‘어떻게’ 장애인 창작자와 협업하고자 하는가, ‘왜’ 장애인 접근성을 고민하게 되었을까. 혹여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도 못한 채, 누군가는 자조적으로 ‘패션’이라고도 표현한 이 흐름에 동참했다면, 지금이라도 잠깐 숨을 고르며 함께 작업하고 싶은 협업자와 관객에 대해 고민하자는 제안이다.

나아가 누군가의 위험을 알면서도 왜 칠흑 같은 암전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소품의 무게가 어차피 허구인 무대의 진정성을 정말 그렇게나 훼손하는 것인지, 설령 속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한다손 치더라도 ‘자유’라는 명목으로 그 생각을 타인에게 발화해도 되는지, 누군가 한 명의 차별적인 언행조차 내부적으로 거르거나 문제시하고 논의하지 않는 창작의 현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와 함께 만들고 볼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잘’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연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우리가 공연에 관해 굳게 믿어왔던 신념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보자는 제안이다.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사유하게 하는, 우리가 공연을 내보이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실천하게 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다시 고민할 기회가 지금 주어졌다.

공연 같은 공동의 작업이 서로 다른 신체, 정신, 신경의 조건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진행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실패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순간 변화는 멈추게 되지 않을까. 멈추지 않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실수와 실패와 오류를 아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자.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연극의 확장과 새로운 연극의 발생을 시도하는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와 ‘정상성’에 대해 질문Question을 던지고 ‘별난Queer’ 존재들의 삶을 응시하는 ‘플랜Q프로젝트’(2019~현재)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breeeeze@naver.com

2023년 12월 (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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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6 10: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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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색이라도 맞춰야 하는 게 시작일지도 모르겠네요. 구색이라는 말을 앎과 실천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봅니다. 아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생각하고 얼마나 깊이 고민하는지가 실천에서 보이는 거라.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많은 분들의 목소리를 담아주셔서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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