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가만히 앉아 캔버스를 바라본다. 텅 빈 공간, 그 안에 감춰진 수많은 가능성. 아니 수많은 막막함. 지나간 오랜 세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면서 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보다는 한계, 벽을 더 의식했던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불편하게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내 몸은 나에게 너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늘 낯설고 어렵다. 특히 그 몸을 타인이 바라보는 시선 속에 둘 때, 그 불편함은 사회적 억압이 되어 나를 다시 구속한다. 그런 나에게 예술, 특히 그리기는 내 몸에서 탈출하는 경험이자, 나 자신으로 회복하는 행위이다.
내 몸에서 힘은 약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고 원활하게 나의 지시를 따라주는 왼팔과 작업을 더 잘하고 싶은 바람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보다는 내 ‘몸’의 힘겨움에 숨을 고르는 허덕임이 항상 앞서곤 했다. 그럼에도 그림은 수십 년간 포기할 수 없는, 나와 함께하는 내 몸이었다는 사실을 요즘 절실히 느끼곤 한다. 비장애인보다 조금 더 느리고 다르게 움직이는 이 몸으로, 다양한 몸을 그리고, 콜라주로 오리고 찢고 붙이고 떼어내며 우연의 질서를 펼쳐 캔버스 위에 세계를 그려왔다. 내게 예술이란 ‘표현’ 이전에 ‘경험’이다. 붓질 하나에도 내 숨결이 묻고, 몸의 리듬이 스며든다. 그림은 늘 나와 닮아있다. 나의 작업은 나의 몸짓, 그리고 그 몸짓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제약과 감각으로부터 탄생한다.
근래 장애인이 하는 예술 작업에 따라붙어 수식하는 ‘장애예술’, ‘장애예술인’이라는 표현이 참 버거웠고 거부감이 컸다. 굳이? 내 몸에 따라붙는 라벨 같았다. 아니, ‘낙인’이라는 말이 감정적으로 더 맞을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부정하던 어휘였는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변화한다. 불편한 내 몸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장애예술’이란 용어에 익숙해졌다.
나의 예술세계와 신체의 이야기는 단순히 “장애에도 불구하고”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이기 때문에 가능한 독창성과 감각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나의 창작 행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나는 장애가 있는 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 몸의 움직임과 호흡, 제약과 가능성은 나의 작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누군가는 묻는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러나 나는 이제 깨닫는다. 불편이라 불리는 이 몸이, 오히려 나만의 선과 감각, 그리고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장애로 인해 어떤 기능이 결여되었더라도, 그 결여는 새로운 신체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차이를 창조하는 주체적 과정에 이르게 한다”라고 말한 작가가 있다. 이런 내용은 다른 데서도 자주 들었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장애 있는 내 몸과 그리는 행위에 대해 갖는 제한적 인식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데 한 문장이 정말이지 코끼리 덩치만큼 크게 나를 덮쳤다. 『코끼리를 만지면』이라는 그림책을 만났다. 보고 읽고 느꼈다. 인식의 변화를 이루는 철학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인 엄정순 현대미술 작가는 10여 년 넘게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하는 미술교육 프로젝트 ‘코끼리 만지기’를 이끈다. 모두미술공간에서 열린 개관전 《감각한 차이》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녀는 말한다.
“장애는 감각의 결핍이 아닌, 예민한 감수성으로 발현되는 창의성”이라고,
“창조의 세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핍도 무거워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고민한 ‘창작’이라는 화두에 눈을 뜬 느낌이랄까. 나의 장애와 창작은 일종의 콜라보 작업임을 깨닫는다. 창작이라는 나의 미술 세계를 확장하는 말이었다. 내 장애의 몸을 포용하는 말이었다. 창조의 행위란 결국,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다름을 통해 어떻게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가의 문제 아닐까 싶다. 내 몸은 다수를 차지하는 ‘비장애’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그러나 이 다름이야말로 내 작업의 개성이고, 내가 나로서 예술을 할 수 있는 독특한 기반이다. 몸이 다르기에 선도 다르다. 그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차이’다. 나는 그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차이가 나를 예술가로 만든다. 장애는 창작의 방해물이 아니라, 다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문법이다. 나는 이 몸으로 느끼고, 이 몸으로 사유하고, 이 몸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곧 예술이며, 나의 존재 방식이라는 ‘유레카!’다.
나는 붓을 들고 있지만, 때로는 붓이 나를 움직인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든다. 어떤 때는 선 하나가 몸의 곡선을 훑고 지나가며 생명을 얻고, 어떤 날은 종잇조각 하나가 예기치 않은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나는 ‘몸’을 그린다. 정형화되지 않은 몸, 기울고, 흘러내리고, 뒤틀린 몸. 그 안에서 인간의 서사와 존재의 깊이를 들여다본다. 몸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낸 기억이자, 우리가 아직 살아가는 중이라는 증거다. 이어 붙인 콜라주와 선, 색은 다양한 몸들이다.
즉흥성과 우연 속에서 뜻밖의 조화를 발견할 때, 나는 세상이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느 순간, 내가 그리고 있는지, 아니면 그림이 나를 그리고 있는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 흐릿한 틈에서 나는 ‘호접지몽’을 떠올린다. 장자의 이야기, ‘호접지몽’이 내 작업과 삶을 가만히 감싸준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깨고 나니 자신이 나비인지 장자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순간처럼, 나 역시 한 겹의 현실을 넘어서 또 다른 차원의 리듬 속에 잠긴다. 나비가 된 장자처럼, 나는 작업에 몰입할 때 현실의 무게를 잊고 경계 없는 세계를 유영한다. 그림이 나를 그리기 시작하고, 나는 어느새 움직임과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한다. 그 순간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이다.
창작이란 어쩌면,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를 기꺼이 꿈꾸는 일이 아닐까. 그림 속에서는 육체도 장애도, 경계도 사라진다. 나는 어떤 고정된 틀도 요구받지 않는다. 그곳엔 단지 ‘존재’만이 있고, 그 존재가 피워낸 색과 형태가 있을 뿐이다. 무언가 완성되었을 때 느껴지는 기쁨은, 단순한 결과의 성취가 아니다. 그건 그동안의 몰입과 사유, 그리고 꿈꾸듯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작품 속에 조용히 눌어붙은 것이다. 장애는 결코 방해물이 아니라, 창작의 또 다른 문법이자 다양성을 드러내는 독창성이다. 나는 오늘도 이 몸으로 생각하고, 이 몸으로 사유하고, 이 몸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오늘도 한 줄의 선 위에 나비처럼 앉는다. 그것이 나에게 예술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다.
문은주 〈비움으로 채우기1〉 72.7×60.6, 캔버스에
큐빅과 아크릴, 2024문은주 〈Circular Composition-2〉, 90.9×72.7,
캔버스에 혼합매체와 아크릴, 2024

문은주
미술작가. 선사랑드로잉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사)대한민국휠체어합창단, (사)한국미술협회 회원.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복지관 문화학교 미술강사로 활동했고, KBS 제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 만들기_문은주 화가가 들려주는 그림이야기’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경기도 지체장애인협회 사회적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로 유치원, 초중고에서 강의하고 있다. 평소 즐기는 음악감상의 확장으로 합창단 활동도 하며 정기공연, 해외공연 등에 참여하고 있다. 40대까지는 주로 개인 작업에 몰입하였고, 40대 중반 이후부터 사회와 장애계와의 연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함께하고 있다.
mglori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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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필자
2025년 7월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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