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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노래하는 바다① 나는 끝내 노래를 부른다

  • 염경례 물빛소리 합창단 단원
  • 등록일 2025-07-30
  • 조회수 79

이음광장

그해 겨울 내가 들은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이대목동병원 안 교수님은 내게 삼중음성유방암 3기라고 선언하듯 내뱉었다. 이 무시무시한 말이 나에게 한 말일까? 시각장애인인 나는 적막이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직감하고 이내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아직 인정할 수 없으니까. 교수님은 머뭇거림도 없이 삼중음성유방암의 난처함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다만 질책하는 말투가 내내 거슬렸을 뿐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나에게 닥친 질병의 심각성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노래를 계속 부를 수 있을지 합창단 지휘자와 단원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나는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물빛소리 합창단 단원이었고 매일 만나는 나의 소중한 동료들은 가족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코웨이에서 물빛소리 합창단을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창력은 자신 없었지만 단지 노래가 좋아 입단 면접을 보았다. 가창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나마 무난한 〈에델바이스〉를 선곡하여 면접관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증명하고 싶은 건 가창력이 아니라 노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의 진심을 어떻게 짧은 시간에 면접관 앞에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날 내가 노래에 애착이 있고 나의 노래가 개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운 좋게 물빛소리 합창단에 입단했다. 창단 초기 어드밴티지였을까. 어떻든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입단하고 마주한 현실은 동료들의 대단한 가창력에 놀라고 긴장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과 긴장은 이내 바라봄이 아니라 함께함으로 바뀌었고, 우리 합창단은 정말 한 몸같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동료 단원들과 함께 노래하는 것이 정말 좋았고 무척 즐거운 나날이었다. 서울시청 근처 예주랑예술학교 연습실을 향해 케인(흰지팡이)을 짚고 복도를 걸어갈 때면 점점 들려오는 동료 단원들의 수다 소리, 휴게실에서 모닝커피 한잔과 밝은 웃음소리로 날 반겨주던 시간들….

그런 소박한 기쁨은 독성 항암제가 내 몸에 투입되던 그날부터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온몸 군데군데에서 통증이 시작되었다. 기력은 반나절이면 다 소진되고 말았다. 지금 내 몸속 세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시각장애라는 시련에 암이라는 질병까지, 나에게 불어닥친 공포를 속절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겪어야 할 것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것에 익숙할 무렵, 내 몸의 세포가 나의 노래에 반응한다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세포가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일까? 세포는 나의 노래를 호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통증도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노래는 세포가 들을 수 있는 언어인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빛소리 합창단 단원들도 나처럼 각자의 이야기가 각자의 신비가 있으리라. 노래 연습을 마치고 나면 동료 단원들과 런치타임을 가지며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로 채우고 있었다. 그 시간에 정작 소리 없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각자의 회복과 소망과 특별함이 음색에 담겨 노래로 청중에게 퍼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청중이 듣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대에 서면 청중은 장애인이 보여주는 뜻밖의 실력과 뛰어난 가창력에 어김없이 감탄과 환호로 호응해 주곤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반전 서사가 왠지 불편하다. 우리 단원 개개인에게는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장애인이 아닌 삶이 있었으며, 노래에 스며있는데 왜 그것을 듣지 못했을까? 감동이라는 강박이 평안과 휴식과 즐거움이라는 노래의 위력을 잊게 만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노래도 더욱 숙성되고 다듬어져 압력이 없는 넉넉한 여유로 성장할 것이다.

나의 통증도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통증은 나를 귀 기울이게 했고 소리 없는 노래도 듣게 했으니까. 가창력만이 음악의 성취라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할 것이 없다. 나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나의 노래가 세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 이야기는 종종 아플 것이다. 또 화가 나기도 할 것이며, 다짐했던 말을 부정하기도 하겠지. 그게 암 투병의 서사다. 그럼에도 나는 끝내 노래를 부른다. 나의 소중한 청중에게 나의 신비한 세포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하니까. 내가 노래를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무대에 선다.

  • 코웨이 물빛소리 합창단이 무대에서 공연중이다. 앞줄에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단원들이, 뒷줄에는 흰색 턱시도를 입은 남성단원들이 서 있고, 무대 중앙에는 지휘대가 있다.

    코웨이 물빛소리 합창단 공연 중인 필자

  • 세 명의 합창단원이 흰색 드레스를 입고 건물 내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세 사람 모두 하얀 드레스에 파란색 꽃 장식을 달고 있다.

    코웨이 물빛소리 합창단 단원들과 필자

염경례

염경례

코웨이 물빛소리 합창단에서 바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다. 맑고 밝은 소리가 되어 누군가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되고 싶다.
soriel1016@daum.net

사진 제공.필자

2025년 7월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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