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공연장, 전시장을 찾아가는 ‘길’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특히,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이미지가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우선 군중 자체의 이미지가 나를 압도하며, (백색소음이라고 불리지만 나에겐 그냥 소음 그 자체인) 지하철 바퀴와 레일의 마찰음,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 나는 타격음, 안내 방송, 사람들의 말소리 등등 모든 것이 나를 자극한다. 견딜 수 없을 때 종종 쓰러질 것만 같고, 구역감이 들 때면 어딘가에 걸터앉아 눈을 감는다. 내가 온전한 나로서 머물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공간은 없을까.
매드에 참여하기
미친존재감 프로젝트 〈매드 어사일럼 : 폐쇄병동에 대항하는 공간〉(주1) 공연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터라 전시를 다 둘러보기도 전에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퍼포먼스는 총 3부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영신대학교 제8회 미친포럼’이었고, 두 번째는 ‘신비의 집: 투명불투명 함께 있기’, 그리고 마지막은 ‘미쳐 날뛰는 토크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퍼포먼스에서 정영신은 국공립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담, 워크숍 등을 그대로 모방한다. 진지한 태도와 개념들을 가져오는 주류 예술계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 하기에 발생하는 통쾌한 웃음 포인트가 있었다. 그들은 웃기기 위해 애쓰지 않았고, 웃음을 주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이런 것이 진정한 유머가 아닐까. 정상사회에서 말하는 유머와 웃음 유발 장치들은 나에게 종종 불편함을 발생시킬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차례인 유선은 관객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유선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조현병이 시작되었는지, 누굴 만나고, 어떤 것을 느꼈는지…. 그리고 신비의 집에 모인 친구들과 함께 원형의 춤을 춘다. 서로에게 발맞춰 동그랗게 도는 강강술래. 춤에 참여한 이들은 줄지어 “우리 천천히 함께 갈래요?”라는 말을 건네며 변화하는 음악에 맞춰 움직인다. 원형의 춤인 강강술래(주2)는 서로에게 의지하여 우리만의 속도를 찾아 함께 걸어 나가는 수행적 실천이기도 하다. 원형의 춤을 추며, 우리는 이곳에 현전하지 못한 유령들까지 소환한다. 나에게 그 원형의 춤은 누군가를 소환하는 행위처럼 비쳤다. 유선이 매번 소환하는 환각들을 우리가 함께 보듬어 주는 춤이었다. 유선은 한동안 춤을 추다 멈춘 뒤, 자신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에 누워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청한다.
유선은 신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신비는 유선이 품었던 ‘(투명) 아이’다. 나는 신비의 집에서 그녀의 몸속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쩌면 유선은 우리 모두를 자신의 내부 공간에 초대하여 아이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환청같이 들릴지도 모를 신비와 비슷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는 믿음과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초대되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만의 문화를 구축”(주3)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듣기’(주4)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실제 소리인지 환청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매드를 긍정하기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진정한 ‘집’과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집’이라고 생각되는 공간 자체에서조차 종종 ‘집’이라는 감각이 사라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집이 아니에요…. 어떤 장소, 건물…, 그러니까… 나무, 벽돌, 돌, 그런 것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는 거죠.”(주5)
물론 내가 쉬고,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온전히 머물고 오롯이 ‘나’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집은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매드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러한 사회가 필요하다. 매드(mad) 그 자체로 ‘인정’(주6)받게 될 때, 진정한 ‘환대’가 가능해질 때, 사회적 돌봄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실패할지도 모를 대화를 계속해서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을 용기, 그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매드 프라이드·포지티브 운동(activism)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매드 어사일럼은 그 출발을 선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매드 프라이드 운동을 우려스럽게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긍정’이라는 말을 좋게 받아들여달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신이 ‘미친 상태’ 그 자체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타인’의 모습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이다. 그 대화에 응해달라는 요구이다. 우리의 대화가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매드 프라이드 운동(주7)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공연 시작 전 [오늘의 느낌]을 얘기하는 참여자들
보이지 않는 장벽. 안쪽 면에는 차별, 억압, 고통, 슬픔, 실패가 있고, 바깥쪽에는 돌봄이 있다.
‘꾸깃꾸깃 퍼포먼스’ 신비의 집 : 투명불투명 함께 있기
‘미쳐 날뛰는 토크쇼’ 실패(돌봄)양면 빙고 : 미래의 미친 공간
주2.강강술래에 덧붙여져 있는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탈락시킨 상태로 ‘강강술래’ 자체의 수행적 의미를 상상해보길 권한다. 오민, 『스코어 스코어』, 작업실유령, 2017, 33쪽.
주3.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송승연·유기훈 옮김,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 오월의 봄, 2023, 85쪽.
주4.“훌륭한 경청은 그 말에 드리운 그림자를 빼앗지 않는 것이다.” 김애령, 『듣기의 윤리: 주체와 타자, 그리고 정의의 환대에 대하여』, 봄날의박씨, 2020, 12쪽.
주5.이-푸 투안, 윤영호·김미선 옮김, 『공간과 장소: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 사이, 2020, 61쪽.
주6.“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07쪽.
주7.여기서 말하는 운동은 행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운동의 형태는 연극, 음악, 춤, 퍼포먼스, 낭독, 놀이 등 다양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서수빈
우리 삶 속에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늘 의심하고 질문하며 살아간다. 전통예술(국악)을 공부하며 사회 속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예술적 실천에 주목하고, 소수자 담론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공허한 선언을 외치기보다는 침묵하게 된 목소리들에 주목하며 이들과 함께 망명하는 비평가가 되고 싶다.
tjtnqls991005@gmail.com
사진 제공.미친존재감 프로젝트(사진 이서염)
썸네일 사진.필자
2025년 12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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