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시선
지금은 8월이다. 진해 여좌천을 가득 채웠던 벚꽃은 모두 지고,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던 자리에는 짙은 초록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사진을 열어보면 진해의 봄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해 봄, 서울에서 KTX를 타고 마산역에 내렸다. 역에서 경남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진해로 향했다. 마산역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차창 밖으로 벚꽃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가에 몇 그루씩 서 있던 벚나무가 진해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도로 양쪽을 가득 채우더니 서로 가지를 맞대어 커다란 꽃 터널을 만들었다. 차가 달릴 때마다 눈앞으로 연분홍 꽃송이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와, 정말 진해에 왔구나.”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긴 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장애인콜택시로 갈아탄 피로도 어느새 잊었다. 진해의 봄은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벚꽃으로 가득한 길을 달리는 순간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팝콘처럼 피어난 여좌천
진해군항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벚꽃축제다. 1952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추모 행사에서 시작해, 1963년부터 문화예술행사와 벚꽃을 함께 즐기는 축제로 확대됐다. 군항제가 열리는 봄이면 여좌천과 경화역, 중원로터리와 제황산공원 등 진해 곳곳이 연분홍빛으로 물든다. 평소에는 출입이 제한되는 해군사관학교와 군부대 일부도 축제 기간에는 개방된다.
먼저 향한 곳은 여좌천이었다. 여좌천에 도착해 고개를 드는 순간 잠시 말을 잊었다. 하천 양쪽의 벚나무 길에는 팝콘처럼 피어난 꽃송이가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했다. 나뭇가지들은 하천 위로 길게 몸을 기울였고, 그 아래로 연분홍빛 터널이 이어졌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여좌천 산책로를 천천히 달렸다. 꽃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이 머리 위로 후드득 날렸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에 내려앉고, 전동휠체어 발판에도 살포시 쌓였다. 하천 아래에는 떨어진 꽃잎이 물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돌 사이에 소복하게 모인 꽃잎은 작은 분홍 섬처럼 보였다. 벚꽃이 나무 위에서 한 번 피고 물 위에서 또 한 번 피는 것 같았다.
여좌천에는 드라마 〈로망스〉의 촬영지로 알려진 ‘로망스다리’도 있다. 다리 위에서는 연인도, 가족도, 친구도 저마다 가장 예쁜 벚꽃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도 마음에 드는 곳마다 휠체어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어디에서든 카메라를 들어도 한 장의 그림이 됐다. 진해에서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모두가 사진작가가 되는 것 같았다. 눈앞의 풍경이 너무 화려해 잠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다.
‘있지만 없는’ 장애인화장실
벚꽃을 구경하다 화장실이 급해졌다. 장애인화장실이 있다는 안내를 보고 찾아갔다. 분명 문에는 휠체어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남녀 장애인화장실 모두 출입할 수 없도록 끈으로 묶여 있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급한 마음에 다른 화장실을 찾아나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벚꽃을 바라보며 천천히 달렸는데, 이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화장실 표지만 찾았다. 그날은 말 그대로 ‘화장실 찾아 삼만리’였다.
겨우 해군사관학교 입구 쪽에서 장애인화장실을 발견했다. 다행히 문은 열렸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시 당황했다. 변기 옆에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었고, 밀대와 대걸레 같은 청소도구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애인화장실이라기보다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가까웠다. 더 이상 다른 화장실을 찾아갈 수 없어 쓰레기봉투를 밀어내고 겨우 볼일을 봤다.
장애인화장실의 넓은 공간은 남는 공간이 아니다. 휠체어가 들어가 방향을 바꾸고 변기 옆으로 접근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곳을 쓰레기와 청소도구가 차지하면 휠체어 이용자는 변기에 다가갈 수도, 안전하게 몸을 옮길 수도 없다. 비장애인은 가까운 화장실에 들어가면 끝나는 일일 수 있겠지만, 휠체어 이용자는 입구에 턱이 없는지, 문은 충분히 넓은지, 내부에서 휠체어가 회전할 수 있는지까지 확인해야 한다. 화장실 하나로 여행의 동선이 완전히 달라지고, 심하면 여행을 중단해야 한다. 그래서 휠체어로 처음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장애인화장실 한 곳만 확인하면 안 된다. 목적지 주변에서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두세 곳 정도 미리 알아두고, 현장에서도 실제 개방돼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도 속 휠체어 표시는 출입 가능성을 알려줄 뿐, 그 안의 상태까지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좌천 로망스다리
여좌천 장애인화장실
저상버스를 타고 다시 열린 길
진해군항제에서 해군사관학교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벚꽃과 해군사관학교 깃발이 어우러진 풍경도 보고, 군함과 여러 체험 행사도 직접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전, 처음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찾아갔던 날에는 입구에서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사관학교 안으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던 셔틀버스는 계단이 있는 일반버스였다. 전동휠체어를 탄 사람은 버스에 오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보행로를 따라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인은 누구도 보행로를 통해 들어갈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셔틀버스를 탈 수도, 보행로로 갈 수도 없었다. 눈앞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가면 해군사관학교인데, 나와 일행은 계단 몇 칸 때문에 그 앞에서 멈춰야 했다.
입구에서 한동안 방법을 찾아달라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던 그날. 함께 갔던 일행들과 집으로 돌아온 뒤 민원을 제기했다. 우리만 특별히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곳을 찾을 다른 휠체어 이용자는 같은 이유로 돌아서지 않기를 바랐다.
그 후 다시 진해군항제를 찾았다. 해군사관학교 입구에 도착하자 셔틀버스 사이로 저상버스가 보였다. 버스 문이 열리고 바닥에서 경사판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벅차올랐다. 전동휠체어를 탄 채 경사판을 올라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휠체어를 안전하게 고정하자 버스가 천천히 출발했다. “드디어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입구에서 돌아서야 했던 길을, 이번에는 내 전동휠체어 그대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벚꽃이 따라 흘러갔다. 그 사이로 해군사관학교 깃발이 봄바람에 펄럭였다. 파란 하늘과 하얀 벚꽃, 힘차게 흔들리는 깃발이 어우러진 풍경은 진해에서만 만날 수 있는 봄처럼 느껴졌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창밖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 길 위의 벚꽃 한 송이까지 더 반갑고 소중했다. 해군사관학교 안에서 군함과 여러 전시·체험 행사를 둘러봤다. 해군 헌병 체험장에서는 커다란 군용 오토바이 앞에서 헌병들과 사진도 찍었다. 사진 속 내 얼굴에는 아이처럼 신난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 번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그 안에서 보낸 시간은 더욱 특별했다.
물론 우리가 제기한 민원 하나로 저상버스가 운행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겪었던 불편을 알렸고, 이후 현장에서 달라진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민원은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거나 단순히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아니다. 다음에 오는 사람이 같은 문턱 앞에서 돌아서지 않도록 길을 조금 더 넓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해군사관학교 저상셔틀버스
해군헌병체험장
꽃은 지지만 길은 남는다
해군사관학교까지 즐겁게 둘러보고 이제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간 동료의 전동휠체어 타이어가 펑크 났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동차 타이어에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정비소를 찾으면 되지만, 전동휠체어는 낯선 여행지에서 바로 수리할 곳을 찾기 어렵다. 휠체어 수리 업체를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길가에 있는 오토바이 수리점을 발견했다. 여행 중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비상용 휠체어 타이어를 가지고 있었고, 사장님은 낯선 전동휠체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기꺼이 수리를 시작했고, 잠시 후 바퀴가 다시 장착됐다. 낯선 여행지에서 꼼짝없이 멈출 것 같았던 휠체어가 낯선 분의 손길 덕분에 다시 길 위에 섰다. 사장님은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감사했지만 그냥 돌아올 수는 없었기에 근처 마트에서 음료 두 박스를 사다 드렸다. 도움을 공짜로 받았다는 이야기로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이 내어준 시간과 기술, 수고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진해에서 나는 꽃만 본 것이 아니다. 닫힌 길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배웠고, 작은 변화가 만들어내는 기쁨을 만났다. 낯선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멈춰 선 여행을 다시 이어주는 순간도 보았다. 벚꽃은 피었다가 진다. 그러나 한 번 열린 길은 다시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애인화장실이 있다는 안내가 실제 이용으로 이어지고, 관광객에게 개방된 공간이라면 휠체어를 탄 사람도 같은 설렘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봄, 진해의 벚꽃길에서는 누구도 문턱 앞에서 돌아서지 않기를 바란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
진해군항제
경화역공원, 여좌천, 중원로터리, 제황산공원,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진해 곳곳에서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축제 일정과 군부대 개방 방식은 해마다 달라지므로, 방문 전 해당 연도의 공식 안내와 벚꽃 개화 상황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해군사관학교와 축제장 곳곳에 장애인화장실이 있다. 중원로터리 장마당과 축제장 주변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만날 수 있다.
기타 정보
- 교통편 : KTX를 이용할 경우 마산역에서 하차한 뒤 콜택시나 저상버스 162번 진해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경남 장애인 통합콜(1566-4488)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경상남도장애인이동지원센터 홈페이지 바로가기)
- 전동휠체어 준비 : 출발 전 배터리 잔량, 타이어 공기압과 마모 상태, 수동 전환 방법을 점검해 두자. 충전기와 비상용 튜브, 기본 공구를 챙기고, 휠체어 제조사와 여행지 인근 수리업체 연락처를 휴대전화에 저장해 두면 도움이 된다.

하석미
장애 인식개선 강사이자 여행작가, 문화접근성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국내외를 여행하며 무장애 환경과 문화적 권리를 알리고, 여행 정보를 공유해 장애인의 이동권 확대에 힘쓰고 있다. 현재 한국무장애여행연구센터 대표로서 방송, 강연, 집필 활동을 통해 모두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chanmee07@naver.com
사진 제공.필자
2026년 8월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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