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1987년 [문학정신]에 장편소설 『비어 있는 오후』가 당선되며 창작활동을 시작한 김재찬 작가는 이후 여러 편의 장편소설을 발간했다. 나는 누구이고 타자인 너는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천착한 작가는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사막의 꿈」에서 그동안의 소설의 물음을 적실하게 압축했다. 존재 이유와 정체에 관한 질문과 탐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문학이 본래 인간에 대한 질문과 탐구일진대 이에 대한 작가의 물음은 다소 비장하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인물과 예민하도록 자아를 의식하는 서술자가 대개의 소설 전반에서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비애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화자와 주요 서술자는 설명하지 않는, 어쩌면 설명하지 못하는(설명하기 어렵거나 화자와 서술자조차 인지하지 못하기에 설명할 수 없고,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 ‘서글픔’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첫 장편에서뿐만 아니라 신춘문예 당선작에서도 서술자에 의해 호출되는 정서인 동시에 주요 사건의 내적 동력이기도 하다. “서글프다”(「공생방식(共生方式)」, 2017)는 발화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가 하면 다른 소설 곳곳에서는 서술자이자 화자의 서글픈 감정과 관계의 정서가 직간접적으로 표출되며 전체 서사를 지배하고 있다.
기어코 나를 기대하는 슬픔
주로 서술자인 남성 화자가 아내 또는 사통하는 여성, 이웃 여인 등에게서 느끼는 서글픔은 화자의 불안한 자의식에서 발로한 것인데, 이는 표층적으로는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 서술자가 가족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도 위치(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의 근원은 어머니 부재를 비롯한 여타 문제로 인한 자아의 존재론적 불안이다. 굳이 작품에 투영되었을 작가의 자의식을 거두지 않는다면 작가에게 있는 장애, 소설가라는 업(業)에 대한 사유 또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이 축조한 서글픔은 견고해서 독자는 소설의 서사가 스스로 무너질 것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섭섭하고, 쓸쓸하고, 외로워서 슬프지만, 오히려 그 힘으로 일상을 도발하고 감각을 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삶의 정동을 움켜쥐고는 거듭, 또 거듭 서술자인 ‘나’를 기대하는 양상이다.
작가의 소설 속 서술자는 대개가 남성 주인공이며 동시에 화자이다. 주인공은 소설가, 화가 등 창작자로 정기적인 수입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생계를 책임지는 일반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그들의 아내는 직장, 아르바이트 등으로 가족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부부간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에 대한 존중의 마음과 태도까지 소거하고 있다.
“아내가 물어다 주는 먹이나 얻어먹으며 겨우 연명이나 하는, 무능하고 무력감에 빠진 내가 아내에게 도대체 무엇을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아내를 보면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실성기를 보이며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아무 곳에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곤 하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는 나중에 커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던 것. 그것은 내 아내 되는 여자를 어머니처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꼴은 무엇인가? 교묘하게 포장된 아내의 그 이상한 논리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나……”
- 「옆집 여자가 죽었다」(2008) 중
‘나’는 아내의 일상을 구성하는 존재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몸을 씻는 등의 일상과 한데 묶여 인식되지 않는, 존재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나’는 아내의 ‘신경에 거슬리는’ 일체의 행동을 삼가야 하고, 낮과 밤이 바뀐 작업(창작)과 ‘제때’ 끼니를 하지 않는 등 일반적인(다수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시간과 방식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은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데 개연성 없는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거나(「사막의 꿈」) 아내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외도를 하거나(「공생방식」),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는(『지난 삶에의 추억은 묻지 마라』, 솟대, 2014) 등의 강박적이고 반사회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특정 타자에게서 슬픔, 이보다 좀 더 복잡한 서글픔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는 연작 소설 형식의 장편소설 『낯선 거리를 편식한다』(다옴, 2007) 속 열다섯 편 소설의 남녀 주인공 관계에서도 두드러진다. 소설은 각각 서로에 대한 애증과 그로 인한 관계의 파국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어긋난 사랑의 감정과 관계의 외로움, 고독이란 하나의 주제를 향해 걸음 하며 개인의 외로움을 오롯하게 좌시하기를 과제로 끌어안는다. 소설은 ‘편식한다’라는 책 제목처럼 스스로 고립, 단절되기를 선택해 버린 현대인의 비애를 구체화하며 동시에 거듭 자신을 돌볼 것을 기대하게 한다.
이는 서술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슬픔과 불안이 상대에게 투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슬픔과 불안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나거나 정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괴감, 자기비하적 태도의 생성물이다. 그러나 감정의 층층한 결을 살펴보면 서술자의 불안과 슬픔은 어머니 부재, 신체 훼손과 결핍 등의 작동과 역동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부재의 현실은 빈번하고도 강렬하게 서술자의 불안을 추동하고 있다. 때문에 서술자는 빈도 높은 각성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자기 파괴와 모멸감으로 귀결된 존재가 아니라 내면에 슬픔을 가진 존재로서 슬픔을 기대하는 존재로 존재론적 변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모순과 역설의 정동
등단 이후 현재까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서글픔의 계보는 상실과 그로 인한 부재의 현실로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글픔의 정서는 주체의 지극한 애도를 통해 생성, 강화되었다. 즉,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어머니를 닮은 여성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어머니의 병증을 유발했던 요소(남편의 부재, 외도)를 계승한 여성을 애도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주체의 애도 방식은 프로이트가 개념화한 멜랑콜리아(Melancholia)(주1)의 정동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주체의 그치지 않는 애도의 본질은 상실한 대상과의 동일시에 기반한 애착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상태이다. 상실의 슬픔에 집중한 병리적 감정의 경험이 곧 멜랑콜리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소설 속 주체는 상실한 대상을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서고 상실한 대상이 주체, 즉 자기의 내면과 행동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소설 속 주체의 서글픔은 상실의 슬픔과 애도의 행위로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주체의 고뇌와 사색을 북돋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는 상실을 인식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마침(끝) 없는 자아 인식의 물음과 고뇌를 명령한다. 때문에 작가의 소설은 고독하고 무겁다. 주체의 내면을 탐색하는 일련의 걸음이 빈번하게 길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종결을 기대할 수 없는 자아에 대한 반복적 절망과 탐색은 이미 작가의 등단작에서부터 잉태되었다. 장편소설 『비어 있는 오후』(열음사, 1998)는 유흥업소 출신 어머니, 자신의 출생에 관한 세상의 멸시와 차별의 시선으로부터 탈주하고자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감정과 행위가 매우 역동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낮의 거리를 채운 빛을 ‘햇빛투성이’로 지칭하며 그것이 자신의 과거를 “누설시키겠다는 듯”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에 주인공은 급히 지하도로 달려간다. “발가벗겨”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은 오히려 침착하고도 냉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의 존재를 의식하게 이끈다. 주인공은 멜랑콜리아의 지속적 환원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인두로 이마를 지지는 듯한 한낮의 햇빛,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도 풀 한 포기 없는 모래펄, 한도 끝도 없는 지평. 이따금씩 버려져 있는 새까만 드럼통, 이등변 삼각 구도로 놓여 있는 앙상한 동물의 뼈…… 그리고 그 끝에 보여지는 달맞이꽃 한 송이…… 그것들이 자신도 모를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고, 그러노라면 나는 그 일부가 되어 허적대고 있는 듯한 느낌이곤 했는데”
- 「사막의 꿈」(1994) 중
다시, 한 번 더 작가의 초기 소설로 돌아가 보자. 열사의 땅, 마른강물을 감각하는 꿈속에서 주체는 곧 생경하리만치 낯선 풍경, 달맞이꽃을 맞닥트린다. 그것은 주인공이 택지조성지에서 실제로 본 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광막한 사막과 광폭한 공사장이 중첩된 것 같으나 그 끝, 달맞이꽃이 핀 땅속에 꽃을 피워낸 지하 연못이 내게도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미래와 바람은 확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주체에게는 거듭 고뇌하고 고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이는 「바람(風)에의 목도(目睹)」(2020)의 ‘안형욱’이 자신의 부요한 환경을 거부하고 거리를 떠돌다가 부모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의 죽음 이후 더욱 철저히 거리 생활을 지속하면서 떠난 연인을 애도하는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자기파괴의 방식으로 연인 상실을 애도하는 멜랑콜리아의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형욱의 노숙 방식의 완전성을 서술하며 멜랑콜리아의 정동을 통한 다르고, 또 어쩌면 같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보하고 있었다. 형욱의 종결되지 않을 자기부정과 형벌로서의 거리 생활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어내며 그를 더 깊이 고독하도록 이끌 것은 자명하다. 그리하여 인간 존재의 모순과 역설의 정동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계속되고 깊어질 수 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상실의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그리움의 속성과 그 내밀한 상처를 기꺼이 수용해 왔다. 그리고 성실하게 고독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 고뇌와 고독을 짊어진 까닭은 존재에 대한 지독한 애정이고 어쩌면 애증일 것이다. 나와 너, 우리의 존재에 대한 집요하고도 지독한 물음이 등단 이후 4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이후로도 멈추지 않을 것은 글쓰기를 다짐한 처음부터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리라.
“인생에 대한 답이 한 가지로 주어진다면, 그래서 명확한 답이 얻어진다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은 인생은 살아갈 필요가 없을 것 아닌가?” ([E美지], 한국장애예술인협회, 2026년 여름호, 58면)
작가의 말이 무겁고 따뜻하다.
김재찬, 『비어있는 오후』(열음사, 1988)
김재찬, 『낯선 거리를 편식한다』(다옴, 2007)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김재찬, 『지난 삶에의 추억은 묻지 마라』(솟대, 2014)
주1.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검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멜랑(melan)’과 ‘담즙’이라는 뜻의 ‘콜레(cole)’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검은 담즙’이란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의 4체액설에 따르면 흑담즙이 과잉될 때 나타나는 상태로 ‘우울’이나 ‘비애’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울증을 뜻하는 멜랑콜리아는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서 느끼는 일반적인 슬픔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슬픔이 아닌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이를 멜랑콜리아의 정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의 상실은 대상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역, 「슬픔과 우울증」, 홍지웅・홍예빈 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20, 243-247면 참조)

김재찬
소설가. 충남 공주 출생. 1987년 [문학정신] 창간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비어 있는 오후』가 당선되었고, 1994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막의 꿈」이 당선되었다. 1997년 중편 「폭풍주의보」로 심훈문학상, 2000년 단편 「돌아오는 길」로 당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단편 「옆집 여자가 죽었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저서로 『비어 있는 오후』(열음사, 1988), 『낯선 거리를 편식한다』(다옴, 2007), 『남자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계간문예, 2010) 등이 있다. 전자책으로 『마침내 다 이루었다』(블루프린트, 2012), 『황홀한 모독』(블루프린트, 2012), 『남자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를 출간했다. 이밖에도 주요 작품으로 「지붕 위의 호수」 「處容의 暗號」 「夢幻의 하루」 「붉은 섬」 「벽화 속으로 가다」 「바람이 있는 풍경」 「지난 삶에의 추억은 묻지 마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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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정
경희대학교 HK연구교수로 장애인 서사를 공부하고 연구한다. 문예지에 장애인문학 비평을 게재하고 KBS 제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 만들기〉에서 장애와 장애인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을 다시 읽는 등 장애인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장애인문학평론집 『상실의 욕망』과 논문 「<아베의 家族>의 (비)언어 행위와 그 의미」 외 몇 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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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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