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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질병을 쓰고 읽는 긴장 관계③

이음광장 [장애 알림] 인식할 수 없는 파일 포맷입니다

  • 소연 작가
  • 등록일 2023-02-08
  • 조회수491

이음광장

나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흔한 내 이름은 정체성의 합계로 자주 치환되었다. 세상에 내 이름을 가진 ‘나’는 유일하니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를 설명할 때면 남이 나를 설명하는 말을 끌어다 쓰는 듯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를 이루는 것이 어떤 ‘카테고리’의 중첩으로 말해지는 것 같았다.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호남 출신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호남 출신 정신병자 페미니스트. 끝없이 무언가 덧붙여지고 그 무한이 ‘수렴하는’ 수식의 결괏값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쓰든 단지 그 수식의 값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췄다. 모든 것이 흩어진, 아무것도 아니어서 아무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라벨도 붙지 않는 자리로 슬쩍 가보고 싶었다.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빈칸으로, 공백 속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은 다시 쓰기 시작했다. 고료를 받는다는 강력한 이유를 차치하자면, 그러니까, 나는 초대하고 싶었다. 선혈로 물든 분노의 세계로, 흔해 빠졌지만 너무 자주 반복되는 바람에 남들과 다른 무늬를 새기게 한, 검열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병신년’이 설쳐대는 꼴을 잔뜩 흩뿌리고 싶었다. 나의 말이 어디에서 나와서 무엇으로 읽히든 나는 ‘병신년’의 역동을 읽는 이에게 어떻게든 쑤셔 넣고 싶었다. 다시 글을 쓰면서 아문 상처가 다시 베어지는 것을 각오했다. 칼로 찔러서 피가 나야 살아있다는 걸 보일 수 있듯이 나는 스스로를 베었다. 날카롭게 벼린 ‘병신년’이라는 말로 나를 호명하면서 그렇지 않은 글쓰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를 악물고 껴안고 나 자신을 착취했다. 오카 마리가 썼듯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특권적인 행위”이자 “지배의 한 형태”니까.(주1) 이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재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습관처럼 단어로 뜨개질하듯이 많은 것을 쓰고, 때때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어지러운 손뜨개의 더미를 깔고 앉아서 내가 쓰는 것은 마침내 초대장이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비장애인의 배를 갈라 지하철 승강장과 출입문의 틈 사이에 밀어 넣자고 재잘댈 것이다. 괴롭히고, 비난하고, 절규하고, 찔러대고, 거슬리는, 보이는 모든 것을 냉소하면서 매달아 놓고 뺨을 올려붙이는 꼴을 오만 군데 남겨놓을 것이다. 모든 곳을 향해 사랑을 담아서, 읽히지 못할 나의 일부를 베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치 있고 귀중하게 다룰 것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 또는 텍스트로 환원된 세계를 나는 죽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덧댄 작고 흔해 빠진 나의 글은 조금의 사람이 읽어줄 것이고 그보다 더 조금의 사람이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서 살아남겠다는 다짐이자 들리는지도 모를 외침이다. 그러니 초대장을 보낸다. 함께 축하하자. 오늘도 난삽하게 흩날리는 실패를, 무엇의 존재도 긍정하지 않는 공백 속에서.

나와 함께 축하하지 않을래
네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
바빌론에서 태어나
백인이 아닌 동시에 여성으로
나 자신 말고 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
이리 와 축하하자
나와 함께 매일매일
무언가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을.(주2)

  •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책의 표지. 흰 바탕에 한글과 일본어로 타이틀, 서브타이틀이 써 있고, 붉은색과 사람들의 실루엣 사진으로 여성을 나타내는 성별 기호가 중앙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표지

  •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책의 펼친 면.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중 루실 클리프톤의 시 전문

주1. 오카 마리 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p.55

주2. 레거시 러셀 저, 다연 역,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미디어버스, 2022, p.158 번역문 일부 재인용. 루실 클리프톤의 시 <나랑 축하하지 않을래(Won't you celebrate with me)>(1993)

소연

한국 근대 젠더사를 공부하는 (예비)연구자. 페미니스트 때려치우고 싶은 장애-페미니스트이자 글쓰기에 자아 의탁한 사람. 정체성의 합계일 뿐인 이름을 가졌으면서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삶을 살며, 역시 이상한 인간의 흔적을 쫓는 일에 관심이 있다. 2020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청년장애예술가 양성 사업에 참여해 『돌림 노래』를 독립출판했고, 현재 연극 〈종말의 문을 열면〉(가제)을 준비 중이다.
soyean1224@naver.com
블로그 바로가기(링크)

사진 제공. 필자

소연

소연 

한국 근대 젠더사를 공부하는 (예비)연구자. 페미니스트 때려치우고 싶은 장애-페미니스트이자 글쓰기에 자아 의탁한 사람. 정체성의 합계일 뿐인 이름을 가졌으면서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삶을 살며, 역시 이상한 인간의 흔적을 쫓는 일에 관심이 있다. 2020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청년장애예술가양성사업에 참여해 『돌림 노래』를 독립출판했고, 현재 연극 <종말의 문을 열면>(가제)을 준비 중이다.
soyean1224@naver.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blog.naver.com/soye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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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나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흔한 내 이름은 정체성의 합계로 자주 치환되었다. 세상에 내 이름을 가진 ‘나’는 유일하니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를 설명할 때면 남이 나를 설명하는 말을 끌어다 쓰는 듯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를 이루는 것이 어떤 ‘카테고리’의 중첩으로 말해지는 것 같았다.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호남 출신 페미니스트. 장애를 가진 호남 출신 정신병자 페미니스트. 끝없이 무언가 덧붙여지고 그 무한이 ‘수렴하는’ 수식의 결괏값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쓰든 단지 그 수식의 값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췄다. 모든 것이 흩어진, 아무것도 아니어서 아무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라벨도 붙지 않는 자리로 슬쩍 가보고 싶었다.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빈칸으로, 공백 속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은 다시 쓰기 시작했다. 고료를 받는다는 강력한 이유를 차치하자면, 그러니까, 나는 초대하고 싶었다. 선혈로 물든 분노의 세계로, 흔해 빠졌지만 너무 자주 반복되는 바람에 남들과 다른 무늬를 새기게 한, 검열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병신년’이 설쳐대는 꼴을 잔뜩 흩뿌리고 싶었다. 나의 말이 어디에서 나와서 무엇으로 읽히든 나는 ‘병신년’의 역동을 읽는 이에게 어떻게든 쑤셔 넣고 싶었다. 다시 글을 쓰면서 아문 상처가 다시 베어지는 것을 각오했다. 칼로 찔러서 피가 나야 살아있다는 걸 보일 수 있듯이 나는 스스로를 베었다. 날카롭게 벼린 ‘병신년’이라는 말로 나를 호명하면서 그렇지 않은 글쓰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를 악물고 껴안고 나 자신을 착취했다. 오카 마리가 썼듯이 “‘글쓰기’라는 행위는 “특권적인 행위”이자 “지배의 한 형태”니까.(주1) 이것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재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습관처럼 단어로 뜨개질하듯이 많은 것을 쓰고, 때때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어지러운 손뜨개의 더미를 깔고 앉아서 내가 쓰는 것은 마침내 초대장이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비장애인의 배를 갈라 지하철 승강장과 출입문의 틈 사이에 밀어 넣자고 재잘댈 것이다. 괴롭히고, 비난하고, 절규하고, 찔러대고, 거슬리는, 보이는 모든 것을 냉소하면서 매달아 놓고 뺨을 올려붙이는 꼴을 오만 군데 남겨놓을 것이다. 모든 곳을 향해 사랑을 담아서, 읽히지 못할 나의 일부를 베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치 있고 귀중하게 다룰 것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 또는 텍스트로 환원된 세계를 나는 죽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덧댄 작고 흔해 빠진 나의 글은 조금의 사람이 읽어줄 것이고 그보다 더 조금의 사람이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서 살아남겠다는 다짐이자 들리는지도 모를 외침이다. 그러니 초대장을 보낸다. 함께 축하하자. 오늘도 난삽하게 흩날리는 실패를, 무엇의 존재도 긍정하지 않는 공백 속에서.

나와 함께 축하하지 않을래
네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
바빌론에서 태어나
백인이 아닌 동시에 여성으로
나 자신 말고 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
이리 와 축하하자
나와 함께 매일매일
무언가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을.(주2)

  •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책의 표지. 흰 바탕에 한글과 일본어로 타이틀, 서브타이틀이 써 있고, 붉은색과 사람들의 실루엣 사진으로 여성을 나타내는 성별 기호가 중앙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표지

  •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책의 펼친 면.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중 루실 클리프톤의 시 전문

주1. 오카 마리 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역,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p.55

주2. 레거시 러셀 저, 다연 역,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미디어버스, 2022, p.158 번역문 일부 재인용. 루실 클리프톤의 시 <나랑 축하하지 않을래(Won't you celebrate with me)>(1993)

소연

한국 근대 젠더사를 공부하는 (예비)연구자. 페미니스트 때려치우고 싶은 장애-페미니스트이자 글쓰기에 자아 의탁한 사람. 정체성의 합계일 뿐인 이름을 가졌으면서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삶을 살며, 역시 이상한 인간의 흔적을 쫓는 일에 관심이 있다. 2020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청년장애예술가 양성 사업에 참여해 『돌림 노래』를 독립출판했고, 현재 연극 〈종말의 문을 열면〉(가제)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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