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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가다③

이슈 자신을 긍정하는 솔직 당당 슈퍼 루키

  • 이근하 배우·허은빈 미술작가
  • 등록일 2024-01-31
  • 조회수229

이슈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 설레는 마음으로 힘찬 한해를 그려 보고자 청년 예술가 여섯 명을 만났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한 순간들, 장애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예술적인 욕망과 도전, 특별한 각오와 다짐을 담아본다.

① 김우경 배우·송상원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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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김보경 가야금 연주자·이은신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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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이근하 배우·허은빈 미술작가

  • (왼쪽) 검정 터틀넥 스퉤터와 청바지를 입은 이근하 배우가 팔짱을 낀 채 한 손에 대본을 들고 서 있다. (오른쪽) 하얀색 면티에 후리스 조끼와 스커트를 입은 허은빈 작가가 한 손에 태블릿을 받쳐 들고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 서 있다.

이근하 배우(왼쪽), 허은빈 미술작가


#긍정 #도전 #자아
이근하 배우

이근하 배우가 한 손에는 대본을 들고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행하게 놓고 걸터앉아 있다.

1. 나를 소개하는 세 가지 해시태그(#)

올해로 30세가 되었고, 작년에 데뷔했다. 2016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중도 실명한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레버씨시신경위축증이라는 희귀성 난치질환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6~7년이 내게 큰 성숙을 주었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비장애인이던 시절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뒷전이고, 부모님 혹은 남들이 정해주는 길만 가려 했다. 장애를 갖게 된 후에는 남보다는 조금 더 나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현재 그 종착은 배우라는 나를 표현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긍정 #도전 #자아다.

2. 처음 ‘예술가’라고 느낀 때

원래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공부 때문에 포기했다. 눈이 안 좋아져 의가사 제대한 후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마을’이라는 사이트의 문화소식 게시판에서 밀알복지재단의 시각장애인 남자배우 모집 소식을 듣고 바로 도전했다. 2021년에 처음 연극무대에 올랐고, 매년 한두 작품을 했다. 예술가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맨 처음 배우로 데뷔하여 대본 속의 캐릭터를 나의 해석으로 표현할 때 나 자신이 예술가라고 느꼈다. 데뷔하기 전에도 두 작품에 참여했는데, 그때는 연기에 대해 전혀 몰랐다. 대본 속 캐릭터를 생각하기보다는 주변에서 이야기해 주는 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한참 모자라고 갈 길은 멀지만, 몇 년 전의 나와 비교해 보면 대본 속 캐릭터를 이해하려 하고, 이 대사를 왜 이야기할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가로서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 같고, 너무 재밌다.

3.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를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 불확실한 미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부모님이나 타인의 시선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장애를 갖게 된 후에는 초점을 나에게 돌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가족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내 꿈을 불안해하고 신뢰하지 않으니, 남들에게서 핑곗거리를 찾았던 거다. 이런 생각으로 예술을 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있겠지만, 실천의 과정 속에 있을 불안과 실패라고 느낄 수 있는 두려움마저도 안아주고 포용해줄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에 더해, 함께하는 동료들이 건네는 격려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고, 마치 집을 짓기 전에 지반과 집터를 견고히 다져놓듯, 배우라는 꿈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튼튼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4. 예술 하기 힘들 때 vs 자랑스러울 때

힘들다기보다는 부끄러웠던 순간이 많았다. 뒤늦게 연극을 시작했으니 뒤처지고 부족한 게 당연하지만, 그런 것을 처음 직면했을 때 정말 부끄러웠다. ‘과연 내가 이 일로 돈을 받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생각도 많이 했다. 꿈이랍시고 괜히 이곳저곳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건 아닐까 싶어 숨고만 싶었다. 그러다 정말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지 말고 그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고 깨달으며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한편 배우에 도전하고 난 직후에는 장애인 배우 이근하가 아닌, 그냥 배우 이근하로 인식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장애라는 게 큰 페널티가 될 수도 있지만, 별처럼 수많은 배우 사이에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나만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장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부모님과 큰누나가 최근에 공연했던 〈푸른 나비의 숲〉을 보러 왔을 때다. 가족의 반응을 보고 나 자신이 떳떳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연기를 시작한 초반에는 가족이 싫어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나중에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왜 그런 불안정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 장애가 있으니 최대한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도 계속 연극을 했고, 마침내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러 오신 거다. 공연을 보시고는 ‘저렇게나 무대에 서는 게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라. 가족의 생각이 꽤 바뀌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가족에게 내가 하는 일을 숨김없이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 이근하 배우가 의자에 앉아 한 손은 가슴팍을 움켜잡고 한 손에는 대본을 말아 쥐고 있다.
  • 이근하 배우가 한 손에 대본을 잡고 서 있다.

5. 나의 강점과 장점

성격상 화를 낼 줄도 모르고, 남들 앞에서 소리내어 울어본 적도 거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외모나 성격 등 나라는 사람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도 단점이다. 이것이 결국 나를 표현할 때 진정성 있게 드러나기보다는 꾸며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씩 나를 사랑해 보려 한다.
한편으로 배우로서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가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알면 내 생각만 고집하거나 조언이 잘 들어오지 않을 텐데, 비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잘 들을 수 있고,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잘 수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중에도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잘 구분해 내야 하는 선구안도 앞으로 길러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따로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데도 발성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연출님들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많이 해줬고, 신뢰감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연극을 하면서 좀 더 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성장하는 것을 느끼는데, 즐겁고 행복하게 연극하는 게 나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6. 장애와 예술 활동

약간은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나는 무대에 설 때 객석이 보이지 않아 관객의 반응에 긴장하지 않고 내가 준비한 것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배우들은 무대에서 관객의 반응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게 없다. 장애로 인한 어려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본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크다. 스크린 리더를 이용해 소리로 듣고 최대한 외워서 내용을 파악하거나 내 캐릭터를 분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대본 리딩을 할 때 문장부호나 맞춤법 등을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다. 어찌 보면 나만의 독특한 해석이 나오는 장점도 있지만, 더러는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파악할 수 있었다. 필기도 잘하지 못하니 중요한 문장이나 강조하면 좋을 것 등을 메모하는 대신 외워야 해서 노하우를 찾아야 한다. 연기할 때도 상대방의 얼굴표정이나 제스처 등을 상세하게 보지 못하니 상대의 음성에 더욱 예민하게 집중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상대 배역에 집중할 여지가 있으니,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남들보다 더욱 집중하고 좀 더 반응할 수는 지점으로 바꿔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예술적 동반자·동료·롤모델

작업을 하다가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닮고 싶은 분들을 만났다. 자기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셨다. 자제하고 절제하는 게 분명 힘들 텐데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가 너무도 명확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많이 배웠다. 그런 마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닮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그분들처럼 선배가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을 전부 기다려줄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있을지 걱정이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나를 특별하게 대접하거나, 배려나 이해를 넘어선 과도한 동정이나 연민을 갖지 않았던 것도 감사했고 배울 점이었다.

8. 내가 꿈꾸는 예술, 예술가

연기에 점점 더 욕심이 생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도 운동도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데, 연기는 좀 더 잘하고 싶고, 누구보다 앞서가고 싶은 욕심이 막 생긴다. 나에게 연기를 가르쳐준 분이 ‘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람 간의 교류, 소통, 대화 같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을 하면서 그런 통찰을 배운다.

  • 무대에 긴 벤치의자가 놓여 있고, 이근하 배우가 앉아서, 옆에 서 있서 손에 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토끼 가면을 쓴 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J〉(2023)

  • 이근하 배우와 수어통역사가 나란히 무대 앞쪽에 서 있다. 뒤편에는 두 명의 배우가 등을 마주하고 서 있다.

    〈푸른 나비의 숲〉(2023)
    사진 제공.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스튜디오 야긴


#노랑 #이야기 #솔직함
허은빈 미술작가

허은빈 작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아 있다. 무릎 위 양손에는 태블릿과 펜을 들고 있다.

1. 나를 소개하는 세 가지 해시태그(#)

알록달록 따스한 그림을 그리는 허은빈이다. 선천적으로 저시력 시각장애가 있어서 확대가 용이한 디지털 작업을 활용한 일러스트를 주로 작업하고 있다. 나를 나타내는 해시태그는 #노랑 #이야기 #솔직함이다. 빛과 온기, 아이다움을 연상할 수 있는 노란 색채를 사용해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 처음 ‘예술가’라고 느낀 때

처음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했을 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마주했다. 2022년에 에이블라인드에서 ‘봄’을 주제로 공간 와디즈에서 연 단체전 《함께, 봄》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그림, 타인이 필요로 하는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든다는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그림을 봐주는 사람들과 오프라인에서 직접 소통하는 경험 또한 작품 활동에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최근에 이음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동시접속》에 〈버석거리는 마음〉이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밖으로 보여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디자인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쌓아놓기만 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디자인한 캐릭터는 호랑이다. 내가 호랑이띠여서 호랑이해에 담요 굿즈를 만들었다. 시와 함께 작업한 엽서도 만들었다. 요즘 그리는 캐릭터가, 동화나 실재하는 것을 발전시켜 디자인에 많이 응용하려고 한다. 힘들고 지칠 때는 우산 아래 쉬어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우산토끼’ 캐릭터를 키워서 굿즈도 만들고 싶다. 순수미술 작업의 경우는 여성, 장애 등 내 경험에서 이면의 날것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런 것을 그릴 때 약간 어두운 이미지가 나오는 것 같다.

3.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어렸을 때 부모님이 다 일하셔서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안겨준 것 중에서 장난감보다 미술도구를 가지고 놀 때가 많았고, 비디오테이프와 동화책 전집을 좋아했다. 도화지에 여러 이야기를 그려나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지금은 이 두 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시각장애, 경제적 이유 등으로 중학생 즈음 미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가 창업하면서 평소 그림을 즐겨 그리던 내게 그래픽 디자인과 패턴 도안 작업을 부탁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미술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이후 그 선배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응원을 받아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두렵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다.

4. 예술 하기 힘들 때 vs 자랑스러울 때

‘과연 몇 살까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자주 든다. 아무래도 눈이 약하다 보니 언제 실명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다. 그래도 이러한 환경이 작품에 또 다른 잠재력을 실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술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때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임산부 그림을 보고 관객 한 분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느꼈던 힘겨움과 외로움을 공감받은 기분”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적이 있다. 보기에 꺼림칙할 수도 있는 이미지였는데, 그 말을 들으며 작품에 담긴 나의 고민과 아픔까지 함께 녹아내리는 듯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뜻깊은 상호작용이 예술 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 허은빈 작가가 한쪽 팔로 다른 한 팔을 받치듯이 들고 서 있다. 양손에 엽서를 한 장씩 들고 있다.
  • 허은빈 작가가 한 팔을 구부려 호랑이 무늬가 찍힌 담요를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 그 끝을 붙들고 있다.

5. 나의 강점과 장점

나의 강점은 작품에 서사를 엮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는 주 전공이 국어국문학이었다. 원래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시 비평 쪽에 관심이 많아졌다. 시 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해 봤다. 공개적으로 합평을 많이 하는데, 아픈 말이 훨씬 많았지만, 그중 몇 마디 칭찬이 힘이 되었다. 오히려 줄곧 미술만을 좇지 않고 다른 학문을 경험한 것이 시야를 넓혀주고 밑거름이 되어준 것 같다. 평소 특별한 이슈보다는 몸에 관심이 많았다. 전시 때 그렸던 임산부 그림은, 임신이 축복의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느낌도 있지 않나. 아파서 부어오르거나 염증이 생겨서 상하거나, 그런 울퉁불퉁하고 못난 부분들이 조형적으로 재미있고, 양면성을 흥미롭게 보는 것 같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면, 이면을 마주하고, 나아가 수용하고 긍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6. 장애와 예술 활동

아무래도 남들보다 ‘다름’에 대해 자주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삶 속 불안과 이면 또한 일찍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부분을 숨기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이겨나가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메시지가 자연스레 작품에도 담겨 종종 필요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같다. 장애인으로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마음가짐이다. 물론 장애가 있기 때문에 기회를 더 많이 얻은 것도 있다. 시력이 안 좋은데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그릴까, 이런 부분이 사실 마케팅적으로 효과가 있기도 하고 사람들도 그것을 위주로 많이 바라보게 된다. 너무 연민으로 바라보면 그런 좋지 않은 시선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미지가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포지션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장애가 아닌 완전 별개의 그런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이런 고민의 지점에 지금 있다. 그래서 한 번쯤 더 관객들이 장애예술가에 대해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7. 예술적 동반자·동료·롤모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주변 동료들이 있어 든든하다. 최초로 예술로서의 사진을 가르쳐준 전명은 작가님, 그림동화 작가의 세계를 알려준 강현아 작가님, 멋진 다원예술가이자 시각장애인 동료 김시락 작가님, 디자이너로서의 기회를 준 스튜디오캐럿 선배, 작가의 길을 걷게 해준 에이블라인드, 그리고 학우들 등. 그림, 사진, 디자인, 창업, 마케팅, 개발 등 분야는 다르지만 각자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시도하고 부딪히는 모습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한다. 지칠 때면 그들로부터 많은 자극과 응원을 받곤 한다.

8. 내가 꿈꾸는 예술, 예술가

표현하는 능력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시력이 약해 물리적 제약도 많고 불편한 상황도 많지만, 작품세계 안에서는 표현하는 능력만 있다면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나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창’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민하고 풍부한 감성을 가졌기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일들도 세심하게 관찰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풍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 한 여자가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한 다리를 세운 채 두 손으로 볼록한 배를 감싸안고 앉아 있다. 팔과 다리는 앙상하고 등뼈가 도드라진다.

    허은빈 〈여자1〉, 디지털아트, 297×420mm, 2022

  •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숲속 한 가운데, 덩치 큰 동물이 꽃 한송이를 들어 붉은 목도리를 한 작은 토끼에게 건네고 있다.

    허은빈 〈친구가 생겼어〉, 디지털아트, 520×300mm, 2023

이근하

연극배우. 단국대학교 졸업. 주요 출연작으로 〈달밤 체조〉(2021) 〈이상한 나라의 J(제이)〉(2022) 〈불굴의 왕, 리처드 3세〉(2023) 창작뮤지컬 〈푸른 나비의 숲〉(2023) 등이 있다.
ghlee1102@naver.com

허은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디자인조형학부에서 수학 중이다. 캐릭터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스타트업 원단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시야가 좁아 한번 볼 때 자세히 보고 섬세히 표현하며, 주로 디지털 작업을 한다. ‘우산토끼’라는 캐릭터로 이야기를 건넨다. 단체전 《함께, 봄》(2022) 《손으로 보는 감각, 손끝으로 전하는 희망》(2023) 《검은색 사랑》(2023) 《동시접속》(2023) 《물의 색》(2023) 등에 참여했다.
327cherish@gmail.com
작가 인스타그램 @327cherish
우산토끼 인스타그램 @usan_tokki

정리.프로젝트 궁리 박희연 teph__y@naver.com, 최순화 suna.choe@gmail.com
사진.이재범 POV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자료사진 제공.필자

2024년 2월 (50호)

상세내용

이슈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 설레는 마음으로 힘찬 한해를 그려 보고자 청년 예술가 여섯 명을 만났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한 순간들, 장애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예술적인 욕망과 도전, 특별한 각오와 다짐을 담아본다.

① 김우경 배우·송상원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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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김보경 가야금 연주자·이은신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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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이근하 배우·허은빈 미술작가

  • (왼쪽) 검정 터틀넥 스퉤터와 청바지를 입은 이근하 배우가 팔짱을 낀 채 한 손에 대본을 들고 서 있다. (오른쪽) 하얀색 면티에 후리스 조끼와 스커트를 입은 허은빈 작가가 한 손에 태블릿을 받쳐 들고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 서 있다.

이근하 배우(왼쪽), 허은빈 미술작가


#긍정 #도전 #자아
이근하 배우

이근하 배우가 한 손에는 대본을 들고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행하게 놓고 걸터앉아 있다.

1. 나를 소개하는 세 가지 해시태그(#)

올해로 30세가 되었고, 작년에 데뷔했다. 2016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중도 실명한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레버씨시신경위축증이라는 희귀성 난치질환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6~7년이 내게 큰 성숙을 주었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비장애인이던 시절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뒷전이고, 부모님 혹은 남들이 정해주는 길만 가려 했다. 장애를 갖게 된 후에는 남보다는 조금 더 나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현재 그 종착은 배우라는 나를 표현하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긍정 #도전 #자아다.

2. 처음 ‘예술가’라고 느낀 때

원래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공부 때문에 포기했다. 눈이 안 좋아져 의가사 제대한 후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마을’이라는 사이트의 문화소식 게시판에서 밀알복지재단의 시각장애인 남자배우 모집 소식을 듣고 바로 도전했다. 2021년에 처음 연극무대에 올랐고, 매년 한두 작품을 했다. 예술가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맨 처음 배우로 데뷔하여 대본 속의 캐릭터를 나의 해석으로 표현할 때 나 자신이 예술가라고 느꼈다. 데뷔하기 전에도 두 작품에 참여했는데, 그때는 연기에 대해 전혀 몰랐다. 대본 속 캐릭터를 생각하기보다는 주변에서 이야기해 주는 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한참 모자라고 갈 길은 멀지만, 몇 년 전의 나와 비교해 보면 대본 속 캐릭터를 이해하려 하고, 이 대사를 왜 이야기할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가로서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 같고, 너무 재밌다.

3.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예술 활동을 지속하는 데는 여러 제약이 따를 수 있다. 경제적인 문제, 불확실한 미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부모님이나 타인의 시선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장애를 갖게 된 후에는 초점을 나에게 돌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가족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내 꿈을 불안해하고 신뢰하지 않으니, 남들에게서 핑곗거리를 찾았던 거다. 이런 생각으로 예술을 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있겠지만, 실천의 과정 속에 있을 불안과 실패라고 느낄 수 있는 두려움마저도 안아주고 포용해줄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에 더해, 함께하는 동료들이 건네는 격려 한마디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고, 마치 집을 짓기 전에 지반과 집터를 견고히 다져놓듯, 배우라는 꿈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튼튼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4. 예술 하기 힘들 때 vs 자랑스러울 때

힘들다기보다는 부끄러웠던 순간이 많았다. 뒤늦게 연극을 시작했으니 뒤처지고 부족한 게 당연하지만, 그런 것을 처음 직면했을 때 정말 부끄러웠다. ‘과연 내가 이 일로 돈을 받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생각도 많이 했다. 꿈이랍시고 괜히 이곳저곳에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건 아닐까 싶어 숨고만 싶었다. 그러다 정말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지 말고 그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고 깨달으며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한편 배우에 도전하고 난 직후에는 장애인 배우 이근하가 아닌, 그냥 배우 이근하로 인식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장애라는 게 큰 페널티가 될 수도 있지만, 별처럼 수많은 배우 사이에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나만의 정체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장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부모님과 큰누나가 최근에 공연했던 〈푸른 나비의 숲〉을 보러 왔을 때다. 가족의 반응을 보고 나 자신이 떳떳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연기를 시작한 초반에는 가족이 싫어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나중에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왜 그런 불안정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 장애가 있으니 최대한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도 계속 연극을 했고, 마침내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러 오신 거다. 공연을 보시고는 ‘저렇게나 무대에 서는 게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라. 가족의 생각이 꽤 바뀌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가족에게 내가 하는 일을 숨김없이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 이근하 배우가 의자에 앉아 한 손은 가슴팍을 움켜잡고 한 손에는 대본을 말아 쥐고 있다.
  • 이근하 배우가 한 손에 대본을 잡고 서 있다.

5. 나의 강점과 장점

성격상 화를 낼 줄도 모르고, 남들 앞에서 소리내어 울어본 적도 거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외모나 성격 등 나라는 사람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도 단점이다. 이것이 결국 나를 표현할 때 진정성 있게 드러나기보다는 꾸며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씩 나를 사랑해 보려 한다.
한편으로 배우로서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가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알면 내 생각만 고집하거나 조언이 잘 들어오지 않을 텐데, 비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잘 들을 수 있고,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잘 수용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중에도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잘 구분해 내야 하는 선구안도 앞으로 길러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따로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데도 발성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연출님들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많이 해줬고, 신뢰감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연극을 하면서 좀 더 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성장하는 것을 느끼는데, 즐겁고 행복하게 연극하는 게 나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6. 장애와 예술 활동

약간은 웃기면서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나는 무대에 설 때 객석이 보이지 않아 관객의 반응에 긴장하지 않고 내가 준비한 것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배우들은 무대에서 관객의 반응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게 없다. 장애로 인한 어려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본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크다. 스크린 리더를 이용해 소리로 듣고 최대한 외워서 내용을 파악하거나 내 캐릭터를 분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대본 리딩을 할 때 문장부호나 맞춤법 등을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다. 어찌 보면 나만의 독특한 해석이 나오는 장점도 있지만, 더러는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파악할 수 있었다. 필기도 잘하지 못하니 중요한 문장이나 강조하면 좋을 것 등을 메모하는 대신 외워야 해서 노하우를 찾아야 한다. 연기할 때도 상대방의 얼굴표정이나 제스처 등을 상세하게 보지 못하니 상대의 음성에 더욱 예민하게 집중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상대 배역에 집중할 여지가 있으니,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남들보다 더욱 집중하고 좀 더 반응할 수는 지점으로 바꿔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예술적 동반자·동료·롤모델

작업을 하다가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닮고 싶은 분들을 만났다. 자기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셨다. 자제하고 절제하는 게 분명 힘들 텐데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가 너무도 명확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많이 배웠다. 그런 마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닮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그분들처럼 선배가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을 전부 기다려줄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있을지 걱정이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나를 특별하게 대접하거나, 배려나 이해를 넘어선 과도한 동정이나 연민을 갖지 않았던 것도 감사했고 배울 점이었다.

8. 내가 꿈꾸는 예술, 예술가

연기에 점점 더 욕심이 생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공부도 운동도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데, 연기는 좀 더 잘하고 싶고, 누구보다 앞서가고 싶은 욕심이 막 생긴다. 나에게 연기를 가르쳐준 분이 ‘연기란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람 간의 교류, 소통, 대화 같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을 하면서 그런 통찰을 배운다.

  • 무대에 긴 벤치의자가 놓여 있고, 이근하 배우가 앉아서, 옆에 서 있서 손에 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토끼 가면을 쓴 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J〉(2023)

  • 이근하 배우와 수어통역사가 나란히 무대 앞쪽에 서 있다. 뒤편에는 두 명의 배우가 등을 마주하고 서 있다.

    〈푸른 나비의 숲〉(2023)
    사진 제공.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스튜디오 야긴


#노랑 #이야기 #솔직함
허은빈 미술작가

허은빈 작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아 있다. 무릎 위 양손에는 태블릿과 펜을 들고 있다.

1. 나를 소개하는 세 가지 해시태그(#)

알록달록 따스한 그림을 그리는 허은빈이다. 선천적으로 저시력 시각장애가 있어서 확대가 용이한 디지털 작업을 활용한 일러스트를 주로 작업하고 있다. 나를 나타내는 해시태그는 #노랑 #이야기 #솔직함이다. 빛과 온기, 아이다움을 연상할 수 있는 노란 색채를 사용해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 처음 ‘예술가’라고 느낀 때

처음 전시회에 작가로 참여했을 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마주했다. 2022년에 에이블라인드에서 ‘봄’을 주제로 공간 와디즈에서 연 단체전 《함께, 봄》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그림, 타인이 필요로 하는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든다는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그림을 봐주는 사람들과 오프라인에서 직접 소통하는 경험 또한 작품 활동에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최근에 이음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동시접속》에 〈버석거리는 마음〉이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밖으로 보여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디자인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다. 쌓아놓기만 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디자인한 캐릭터는 호랑이다. 내가 호랑이띠여서 호랑이해에 담요 굿즈를 만들었다. 시와 함께 작업한 엽서도 만들었다. 요즘 그리는 캐릭터가, 동화나 실재하는 것을 발전시켜 디자인에 많이 응용하려고 한다. 힘들고 지칠 때는 우산 아래 쉬어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우산토끼’ 캐릭터를 키워서 굿즈도 만들고 싶다. 순수미술 작업의 경우는 여성, 장애 등 내 경험에서 이면의 날것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런 것을 그릴 때 약간 어두운 이미지가 나오는 것 같다.

3.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어렸을 때 부모님이 다 일하셔서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안겨준 것 중에서 장난감보다 미술도구를 가지고 놀 때가 많았고, 비디오테이프와 동화책 전집을 좋아했다. 도화지에 여러 이야기를 그려나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지금은 이 두 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시각장애, 경제적 이유 등으로 중학생 즈음 미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가 창업하면서 평소 그림을 즐겨 그리던 내게 그래픽 디자인과 패턴 도안 작업을 부탁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미술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이후 그 선배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응원을 받아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두렵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다.

4. 예술 하기 힘들 때 vs 자랑스러울 때

‘과연 몇 살까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자주 든다. 아무래도 눈이 약하다 보니 언제 실명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다. 그래도 이러한 환경이 작품에 또 다른 잠재력을 실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술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때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임산부 그림을 보고 관객 한 분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느꼈던 힘겨움과 외로움을 공감받은 기분”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적이 있다. 보기에 꺼림칙할 수도 있는 이미지였는데, 그 말을 들으며 작품에 담긴 나의 고민과 아픔까지 함께 녹아내리는 듯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뜻깊은 상호작용이 예술 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 허은빈 작가가 한쪽 팔로 다른 한 팔을 받치듯이 들고 서 있다. 양손에 엽서를 한 장씩 들고 있다.
  • 허은빈 작가가 한 팔을 구부려 호랑이 무늬가 찍힌 담요를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 그 끝을 붙들고 있다.

5. 나의 강점과 장점

나의 강점은 작품에 서사를 엮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는 주 전공이 국어국문학이었다. 원래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시 비평 쪽에 관심이 많아졌다. 시 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해 봤다. 공개적으로 합평을 많이 하는데, 아픈 말이 훨씬 많았지만, 그중 몇 마디 칭찬이 힘이 되었다. 오히려 줄곧 미술만을 좇지 않고 다른 학문을 경험한 것이 시야를 넓혀주고 밑거름이 되어준 것 같다. 평소 특별한 이슈보다는 몸에 관심이 많았다. 전시 때 그렸던 임산부 그림은, 임신이 축복의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느낌도 있지 않나. 아파서 부어오르거나 염증이 생겨서 상하거나, 그런 울퉁불퉁하고 못난 부분들이 조형적으로 재미있고, 양면성을 흥미롭게 보는 것 같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면, 이면을 마주하고, 나아가 수용하고 긍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6. 장애와 예술 활동

아무래도 남들보다 ‘다름’에 대해 자주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삶 속 불안과 이면 또한 일찍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부분을 숨기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이겨나가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메시지가 자연스레 작품에도 담겨 종종 필요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같다. 장애인으로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얻지 못했을 마음가짐이다. 물론 장애가 있기 때문에 기회를 더 많이 얻은 것도 있다. 시력이 안 좋은데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그릴까, 이런 부분이 사실 마케팅적으로 효과가 있기도 하고 사람들도 그것을 위주로 많이 바라보게 된다. 너무 연민으로 바라보면 그런 좋지 않은 시선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미지가 있을 수 있고, 그게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포지션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아니면 장애가 아닌 완전 별개의 그런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이런 고민의 지점에 지금 있다. 그래서 한 번쯤 더 관객들이 장애예술가에 대해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7. 예술적 동반자·동료·롤모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주변 동료들이 있어 든든하다. 최초로 예술로서의 사진을 가르쳐준 전명은 작가님, 그림동화 작가의 세계를 알려준 강현아 작가님, 멋진 다원예술가이자 시각장애인 동료 김시락 작가님, 디자이너로서의 기회를 준 스튜디오캐럿 선배, 작가의 길을 걷게 해준 에이블라인드, 그리고 학우들 등. 그림, 사진, 디자인, 창업, 마케팅, 개발 등 분야는 다르지만 각자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시도하고 부딪히는 모습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한다. 지칠 때면 그들로부터 많은 자극과 응원을 받곤 한다.

8. 내가 꿈꾸는 예술, 예술가

표현하는 능력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시력이 약해 물리적 제약도 많고 불편한 상황도 많지만, 작품세계 안에서는 표현하는 능력만 있다면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나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창’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민하고 풍부한 감성을 가졌기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일들도 세심하게 관찰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풍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 한 여자가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한 다리를 세운 채 두 손으로 볼록한 배를 감싸안고 앉아 있다. 팔과 다리는 앙상하고 등뼈가 도드라진다.

    허은빈 〈여자1〉, 디지털아트, 297×420mm, 2022

  •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숲속 한 가운데, 덩치 큰 동물이 꽃 한송이를 들어 붉은 목도리를 한 작은 토끼에게 건네고 있다.

    허은빈 〈친구가 생겼어〉, 디지털아트, 520×300mm, 2023

이근하

연극배우. 단국대학교 졸업. 주요 출연작으로 〈달밤 체조〉(2021) 〈이상한 나라의 J(제이)〉(2022) 〈불굴의 왕, 리처드 3세〉(2023) 창작뮤지컬 〈푸른 나비의 숲〉(2023) 등이 있다.
ghlee1102@naver.com

허은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디자인조형학부에서 수학 중이다. 캐릭터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스타트업 원단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시야가 좁아 한번 볼 때 자세히 보고 섬세히 표현하며, 주로 디지털 작업을 한다. ‘우산토끼’라는 캐릭터로 이야기를 건넨다. 단체전 《함께, 봄》(2022) 《손으로 보는 감각, 손끝으로 전하는 희망》(2023) 《검은색 사랑》(2023) 《동시접속》(2023) 《물의 색》(2023) 등에 참여했다.
327cherish@gmail.com
작가 인스타그램 @327cherish
우산토끼 인스타그램 @usan_tokki

정리.프로젝트 궁리 박희연 teph__y@naver.com, 최순화 suna.choe@gmail.com
사진.이재범 POV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자료사진 제공.필자

2024년 2월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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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3 12: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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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서 자신을 당당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두 분의 이야기가 술술 읽어지네요. 예술활동을 하면서 불안감과 애로사항이 분명 있으신데도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시는 모습들에 감명 받습니다. 젊음의 패기를 가지고 멋지게 예술 활동 하고 계심에 응원의 메세지 남겨드립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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