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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농인의 공연예술 접근성② 수어 번역은 곧 접근성이다

  • 조희경 수어 번역·감수자
  • 등록일 2026-01-07
  • 조회수 111

이음광장

최근 공연 무대, 방송, SNS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수어 사용이 점차 눈에 많이 띈다. 대부분 한국어로 작성된 내용을 단순히 한국수어로 전달하거나 통역하는데, 농인을 대상으로 한 공연에서는 한국수어로 전달하는 것을 넘어, 원문의 의미와 문화적 맥락까지 정확히 반영한 번역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청인 수어통역사가 직역과 의역의 차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다의어의 의미가 생략되어 번역되거나 불필요한 어휘를 사용하거나 잘못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농인은 청인 수어통역사의 수어를 보고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좋은 통역을 위해서는 번역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번역의 질은 왜 중요하고,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수어 번역은 단순히 한국어를 한국수어로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수어의 문법과 문화적 맥락을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영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의 번역에서는 정확성, 의미-화행의 구현, 문화적 적합성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한국수어 번역에서도 이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는, 번역의 정확성과 문장의 자연스러움이다. 의사소통에서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발화 의도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오늘 몇 시에 모이세요?”라는 한국어 문장이 있다고 하자. 만약 한국수어 문법이 아닌 한국어 문법에 맞춰 대응식으로 번역한다면 [오늘][몇시][모임][질문]일 것이다. 반면 한국수어 문법에 맞게 표현한다면 [오늘][모임][몇시?]가 된다. 이때 문장 끝에 의문사가 위치하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크게 뜨는 비수지 표현을 통해 질문의 의미가 전달된다. 이러한 비수지 기호와 함께 문장의 끝을 질문 형태로 마무리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시간을 묻고 있다는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되며 응답을 요구하게 된다. 농인은 이러한 수어 표현을 통해 자신에게 질문이 제기되었음을 인식하고 이에 응답하게 된다.

  • 한국어 문장 ‘오늘 몇 시에 모이세요?’를 수어로 표현한 비교 그림이다. 위쪽에는 한국어 대응식 수어가 제시되어 있으며, 인물이 순서대로 ‘오늘’ ‘몇 시’ ‘모이다’ ‘질문’을 나타내는 손동작을 한다. 아래쪽에는 한국수어 표현이 제시되어 있고, 인물이 ‘오늘’ ‘모임’ ‘몇 시?’의 순서로 수어 동작을 한다.

    한국어 문장 “오늘 몇 시에 모이세요?”의 한국어 대응식 수어와 한국수어 비교

둘째로 중요한 것은, 의미-화행의 구현이다. 이는 A언어에서 B언어로 번역할 때 단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A언어(출발어)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화행을 파악하여 B언어(도착어)로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음성언어를 시각언어인 수어로 번역할 경우 비수지 표현(표정, 시선 등), 감정 표현, 공간 사용, 휴지(수어의 띄어쓰기)와 같은 문법 요소가 함께 고려되어야 화자의 의도와 화행이 명확히 전달된다.

예를 들어 “나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라는 대사를 직역한다면 [나][버리다][떠나다][말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떠나다]라는 어휘가 연인이 떠나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뜻하는 것인지 의미가 모호해질 수 있으며, 상대에게 떠나지 말라며 애원하는 화자의 감정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어의 대응이 아니라 의미-화행의 구현이다. 한국수어 문법에 맞게 어순을 조정하고, 떠나지 말라는 연인의 마음을 담아 번역해야 한다. 한국수어로 [가다][말다][같이][머물다]라고 번역하며 애절한 얼굴 표정(비수지)을 함께 표현한다. 이때 말을 하는 화자는 청자를 바라봄으로써 수신인을 설정하게 되고, 상대와 헤어지고 싶지 않으며 함께 있고 싶다는 화행이 명확히 드러난다.

  • 한국어 문장 ‘나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를 수어로 표현한 비교 그림이다. 위쪽에는 한국어 대응식 수어가 제시되어 있으며, 인물이 순서대로 ‘나’ ‘버리다’ ‘떠나다’ ‘말다’를 나타내는 손동작을 한다. 아래쪽에는 한국수어 표현이 제시되어 있고, 인물이 ‘가다’ ‘말다’ ‘같이’ ‘머물다’의 순서로 수어 동작을 한다.

    한국어 문장 “나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의 한국어 대응식 수어와 한국수어 비교

또 다른 예로 한국어 표현 “덕분에 살았다”를 들 수 있다. 한국수어로 [덕분][살다][끝]으로 직역하면 수어를 보는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여기에서 [살다]는 생과 사, 목숨과 관련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살았다”의 화행을 파악하여 자연스러운 번역을 한다면 한국수어로 [도움받다][고맙다]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상대의 도움에 대한 감사와 안도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안도하는 숨을 내쉬는 비수지 표현을 함께 사용하면 화자의 감정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 한국어 문장 ‘덕분에 살았다.“를 수어로 표현한 비교 그림이다. 위쪽에는 한국어 대응식 수어가 제시되어 있으며, 인물이 순서대로 ‘덕분’ ‘살다’ ‘끝나다’를 나타내는 손동작을 한다. 아래쪽에는 한국수어 표현이 제시되어 있고, 인물이 ‘도움받다’ ‘고맙다’의 순서로 수어 동작을 한다.

    한국어 문장 “덕분에 살았다.”의 한국어 대응식 수어와 한국수어 비교

셋째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적합한 번역이다. 번역에서는 두 언어의 문화적 배경과 차이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음성언어를 기반으로 쓰인 대본을 수어로 번역할 때는 소리 정보도 함께 번역해야 한다. 청소년극 〈견고딕걸〉의 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주인공 수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고민하며 밤에 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나무에 붙어서 큰소리로 우는 매미를 보며 “넌 울 수 있어서 살아남은 걸까”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번역할 때 중요한 것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적합한 번역이다. 농인은 소리가 아닌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매미는 겉으로 보기에는 큰 움직임이 없어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리에 매미 소리로 가득 찰 정도로 큰소리라고 한다. “넌 울 수 있어서 살아남은 걸까”라는 대사에서 매미가 운다는 것은 ‘에너지의 발산’을 의미한다. 매미는 자신을 숨기고 가두는 것이 아니라 크게 소리 내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에너지의 강도와 소리의 정도가 수어에서도 적절히 반영되도록 번역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공연의 배경 소리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맆소녀〉에 비가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조용한 작업장을 배경으로 처음에는 비가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점점 빗줄기가 거세지며 ‘쏴아아’ 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다. 이때 한글자막 화면에는 ‘빗소리’라는 글자와 함께 물방울 모양의 그림이 뜬다. 이를 한국수어로 표현하는 경우 처음에 한 방울씩 내릴 때는 검지만을 펴서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는 모습을 표현하고, 점점 거세질수록 손가락을 모두 펴서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비가 후드득 내리거나 소나기처럼 쏴아아 쏟아지는 소리의 강약을 표현할 수 있다. 즉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질감과 분위기까지도 수어와 비수지 표현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요소를 충분히 익혀야 농인에게 명료하고 확실하게 전달되는 수어 통역이 가능하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의 보조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한국어와는 다른 고유한 문법을 가진 독립된 언어이다. 따라서 음성언어를 시각언어인 수어로 번역할 때는 수어의 문법과 구조가 충실히 반영되어야 한다. 물론 한국어 문법에 맞춘 대응식 수어 통역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농인 대부분은 더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의역을 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인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어 번역은 기술이 아닌 접근성이다. 공연·문화예술 현장에서의 번역은 단순히 수어로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을 연결하는 예술적 다리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어 번역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수어 문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농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표현과 농문화에 대한 경험이 함께 요구된다. 또한 번역 작업은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농인 전문가와 협력할 때 더 효과적이다. 이런 요소들이 잘 갖춰질 때 명료하고 질 높은 번역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좋은 수어 번역은 농인에게 공연과 문화예술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접근성이 된다.

조희경

조희경

수어 번역·감수자. 제1 언어로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 나사렛대 외래교수로 수어·농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한국수어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어 통역·번역·감수 전문가로 다양한 교육과 자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리움미술관 〈감각 너머 2024〉 국제수어 통역, 누비스 〈창작연극 오디션 워크숍〉 강의, 공연 〈침묵 속에 기록된〉 수어 지도, 〈라이트 트리스〉 접근성 자문 등 공연뿐 아니라 박물관과 전시의 농인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chohik@hanmail.net

그림 제공.필자

2026년 1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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