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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좌담] 장애예술가가 말하는 비평의 쓸모 솔직한 대화의 장으로 비평의 시작점 열기

  • 김원영·라움콘·정유미·이성수 
  • 등록일 2026-02-25
  • 조회수 46

인터뷰

장애예술 비평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예술가에게 비평의 쓸모는 무엇일까? 당사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있을까? 비평언어의 한계와 확장, 접근성 중심 해석의 함정, 당사자 관점의 비평 가능성 등 예술 활동 과정에서 발견한 것,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아쉬웠던 점 등을 예술가들과 이야기 나눠본다.

개요

  • 일시2026년 2월 6일 오후 2시

  • 장소모두예술극장 연습실1

참석자
좌장.
이성수 힘빼고컴퍼니 대표·이음온라인 기획위원
패널.
김원영 작가·공연창작자
라움콘(송지은, Q레이터)
정유미 배우
  • 연습실 실내에서 주름이 풍성한 회색 암막 커튼을 배경으로 다섯 명이 정면을 응시한 채 미소지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앞줄에는 전동휠체어를 탄 두 사람이 나란히 있고, 뒷줄에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원영 작가, 정유미 배우,
    (뒷줄 왼쪽부터) 라움콘 Q레이터 작가, 송지은 작가, 이성수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예술, 장애예술 비평의 위치

이성수최근 우리 사회에서 장애예술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는 것을 체감한다. 장애예술 비평에 관심도 높아지고 필요성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반가우면서도 적지 않은 고민과 질문이 생긴다. 저의 우문에 현답을 주실 거라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김원영무용, 연극 공연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시작은 연극이었는데, 신체적인 활동과 표현성이 중요한 작업을 좋아해서 최근에는 무용 작업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 작품 안무도 하고 무용수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예술비평 관련해서 ‘장애예술’ 담론은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공연자로 무대에 서기 전에는 장애예술에 관한 글을 쓰며 더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시작한 뒤로는 이론적인 고민보다는 당장 닥친 실무적인 과제에 집중하는 면이 있다. 그래도 장애예술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고민을 놓지 않으며 글을 쓰고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정유미연극을 한다. 장애예술 현장에서 꽤 오랜 시간 배우로 활동해 왔지만, 한 10년 정도는 깊은 방황의 시기였던 것 같다. 저는 공연할 때면 즐거움보다 몸의 통증과 고통을 먼저 느낀다. 내가 왜 이 작업을 하고 있는지 고민이 많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답이 서서히 보이는 것 같다. 여전히 공연은 막노동처럼 힘들지만, 이제 나름 즐거움도 느끼고 있다. 성격이 소위 ‘돌직구’ 스타일이라 비평이나 비판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장애예술을 하다 보면 치열한 담론의 장이 절실하다고 느끼는데, 의외로 그런 자리가 많지 않다. 장애예술인이 같이 모여서 토론하고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갈증을 느끼던 차에 이런 자리가 마련돼서 반가운 마음에 함께하게 됐다.

라움콘_송지은저희는 라움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Q레이터의 중도 장애로 급격히 변화된 신체와 삶을 마주했을 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이 많았다. 세상의 시스템은 견고하고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아서, 이러한 과정 자체를 예술이란 방법으로 풀어가고 있는 팀 같다고 생각한다. 듀오로 활동하고 부부이자 지지자로서, 이 과정을 이끌어가고 작업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제가 시각예술을 전공해서 시각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활동이 많지만, 장르를 고정하지는 않고 경계를 허물고 확장된 형태나 탈장르를 지향한다.

이성수비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다 풀기는 어렵지만 지나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아서, 예술과 장애예술에 대해 짚어보고 넘어가면 좋겠다.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김원영예술의 의미를 고찰하는 학문이 따로 있을 만큼 그 정의는 복잡하고 방대하다. 저는 법을 전공했는데 예술에 관심 두게 되면서 두 세계관이 늘 충돌해 힘들 때가 많았는데, 충돌 덕분에 오히려 예술의 의미가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저는, 어떤 종류의 규정이나 형식화에 저항하는 실천이자, 규범화하려는 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창조적 활동이 곧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장애예술은 소위 ‘예술’이라고 일컫는 것과 별개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10주년을 맞고 예산 규모가 커지면서 장애예술 또한 제도적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예술은 규정하고 표준화하고 형식화하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지점이 있다. 저는 그것이 장애예술의 본질이고 예술의 핵심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고전주의 시대라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동시대적 맥락에서 예술은 형식을 부여하려는 권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힘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이것을 ‘예술의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장애예술은 그러한 예술적 실천을 가장 생생하고 밀도 높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과 장애예술의 비평 방법론에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해석하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게 비평이라고 할 때, 장애예술 비평도 일반적인 예술비평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첨예하고 논쟁적인 것에 형식을 부여해서 말을 붙여야 하니 오히려 좀 더 어렵고 급진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유미여전히 규정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고정된 사고의 틀을 넘나드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장애예술’이 다르냐는 질문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고 답하고 싶다.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다. 장애가 독특한 미학적 성취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공연을 볼 때 장애가 극적으로 아름답게 포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불합리한 시스템과 충돌하며 오류를 범하는 지점들을 목격하곤 한다. 사실 장애예술 신 안에서, 예술과 장애예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차이를 어떻게 정의하고 위치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예술인 당사자들이 저항하는 움직임이나 목소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단 휠 작업과 외부 작업을 병행하다 보면, 어떤 연출가는 장애를 단지 극적이고 감동적인 소재로만 소비하려 든다. 다행히 장애 감수성을 깊이 이해하고 접근하는 분도 있지만, 아예 장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들도 있어서 현장에서 상반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라움콘_송지은저희 둘은 늘 함께 작업하며 치열하게 충돌하곤 한다. 듀오라고 해서 세계관이 일치할 수는 없으니까. Q레이터의 예술관과 저의 세계관이 부딪히며 빚어내는 게 라움콘의 생산물이다. 저희에게 예술은 김원영 작가님의 말씀처럼 ‘삶의 실천’에 가깝다. 고도의 예술적인 것이나 미학적 완성을 지향하기보다는, 삶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집중한다. 예술은 저희가 현재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세상을 배워나가는 통로이기도 하고, 조금 부족해 보이고 삭막한 세상에 여유로움을 주는 장치이자, 저희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예술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 삶에 장애가 들어왔을 때, 저희가 다루는 예술은 유독 ‘장애예술’로만 협소하게 해석되곤 한다. 정작 창작자로서 우리 스스로 장애예술이라고 명명하며 작업하지 않는데 말이다. 결국 그 해석은 작가가 아닌, 기관이나 비평가 같은 외부의 ‘2, 3차 생산자’들에 의해 규정된 형식일 뿐이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자신의 삶이 관통하는 경험들을 예술로 쏟아내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감각을 표현하는 사람에 가깝다. 사회적 제도 안에서는 장애와 비장애가 나뉘지만, 소위 장애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에서는 예술가의 고유하고 감각적인 경험치가 훨씬 많고, 그 감각이 삶을 다른 측면에서 보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장애예술은 제도적으로 분리하기보다 감각의 영역에서 바라봐야 한다. 장애예술의 독특함과 고유성은 삶의 생태계를 다양하고 풍족하게 해주는 유의미한 가치가 있고, 세상을 매개해 저희 삶에 다양성을 끌어들이게 해줬다.

라움콘_Q레이터평상시에 하던 작업을 장애예술이라고 부르고 처음에 저를 장애인이라고 소개할 때는, 그렇게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예술은 예술이니까. 제가 예술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예술과 장애예술은 다른 건가 고민했고 여전히 답을 찾진 못했다. 제겐 예술은 뭐고 장애예술은 뭐냐 라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가 없다. 장애예술을 통해 자신을 포용하고 사회를 포용한다는 느낌이 든다.

  • 이성수 기획위원

    이성수 기획위원

  • 김원영 작가

    김원영 작가

  • 정유미 배우

    정유미 배우

  • 라움콘 송지은 작가

    라움콘 송지은 작가

  • 라움콘 Q레이터 작가

    라움콘 Q레이터 작가

극복 서사를 넘는 비평의 언어, 다른 몸 다른 감각 읽기

이성수우리는 장애예술에서 장애 극복 서사는 해묵은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극복 서사 중심으로 작품을 논하거나 비평하는 사례를 종종 마주한다. 저 역시 과거에는 이런 시선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극복 서사를 배제하고 회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복이라는 해묵은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삶의 궤적을 잘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에겐 어떤 새로운 비평 언어가 필요할까?

김원영적어도 작품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전문 비평이나 진지한 리뷰에서는 극복 서사가 강조되는 경우는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물론 티켓 예매사이트의 관객 평점란에는 여전히 편견 어린 댓글이 많지만, 이런 반응까지 비평의 논의 대상으로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몇 년 전 두산아트센터에서 진행된 공연 리뷰 중에서, 장애인 배우에 대해서만 ‘긴 대사를 잘 소화했다’라는 식의 평을 남긴 일간지 기사가 비판을 받고 그 내용이 수정된 사례가 있었다. 이제는 비평계 내부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 관객과 비평가가 장애예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도 모호한 개념이고, 예술 또한 장애・비장애로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장애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두 가지 분명한 맥락이 있다. 하나는 정책적인 맥락이다. 이성수 님이 앞서 얘기한 것처럼, 특정한 신체적·정신적 조건을 가진 이들이 문화예술교육과 활동에서 소외됐기에, 사회정의 측면에서 정책 자원을 우선 배분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둘째는 비평적 맥락이다. 기존의 예술 양식이나 수용 방식으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이들의 경험과 감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과도하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이를테면 휠체어를 탔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는 기존에 우리가 익혀온 전통적인 예술 규범 안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웠던 경험과 감각, 표현방식이 지닌 가치와 잠재성에 주목하자는 거다. 결국 장애예술 비평은 일반 예술비평과 별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몸의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런 이해를 통해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은 성취와 극복 서사로만 환원되었다면, 이제는 배우의 언어장애나 불분명한 발성이 연극 안에서 어떤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는지 살피고, 이를 토대로 공정하고 정확하게 비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유미과도한 포장이나 설정 때문에 오히려 장애인 배우들이 하는 연극은 아마추어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저 역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이건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합심해서 풀어가야 할 문제다. 혼자서 “이런 식의 연출은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여봤자, 연출가에게 “억울하면 네가 직접 만들던가”라는 식의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그래도 최근 몇 년 사이 장애예술 공연이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에 따른 평가도 냉정해지고 있다. 이제는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며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그런 동료들이 많지 않아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이성수말씀하신 것처럼 분명 어떤 평가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평가라는 것은 결국 합당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잖나. 그 기준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지, 저는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라움콘_송지은성취와 극복 서사가 과도하게 강조되는 글은 비평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본래 비평이란 끊임없이 질문을 낳고, 시대적으로 연결고리가 되어 또 다른 비평을 불러일으키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성취나 극복 서사는 그 자체로 이미 닫힌 ‘결론’이지 않나. 동시대 예술을 논하면서 그렇게 성급히 결론짓는 것이 과연 비평의 역할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성취나 극복의 의미를 담아냈다면 비평에서도 그것이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정의하듯 내리는 평가는 창작자 입장에서 비평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질문이 먼저 생긴다. 한편, 우리가 삶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며 활발히 실험해 나가는 과정이 왜 꼭 성공이나 극복으로만 귀결되어야 할까. 그 과정은 얼마든지 ‘실패’일 수도 있잖나. 우리의 활동이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해석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수많은 실패 끝에 겨우 하나를 얻고, 수없이 넘어진 끝에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된 지난한 과정이 있다.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이를 단번에 성취로 포장하는 것은 비평의 언어가 아니다.

라움콘_Q레이터장애예술가의 활동을 성취나 극복으로만 쓴 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건 비평이 아니라 비평가 혼자만의 게임일 뿐이다. 사람들이 점점 비평 글을 외면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성수예술 작업은 신체, 공간, 감각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작업 과정에서 변화한 신체 조건으로 인해 감각의 변화나 작품 활동에 임하는 태도에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에 따라 작품의 형식이나 감각을 새롭게 규정하게 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비평할 때 어떤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라움콘_송지은사람들이 흔히 장애인과 돌봄 제공자로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우리 둘의 몸은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Q레이터 작가가 걸어 다닐 때 신체가 불안감을 느끼면서 긴장도나 강직도가 올라가면, 동시에 제 심장도 엄청나게 뛰기 시작한다. 신체는 분리되어 있어도 사회적 환경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결국 연결될 수밖에 없다. Q레이터 작가가 일상적으로 대화할 때 겪는 언어적 경험(실어증) 또한 저에게는 일상의 경험이다. 한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저희가 작업을 지속하는 큰 동력이다. 그래서 동료와 이런 경험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비평가는 단편적인 ‘장애 서사’에서 비평을 시작하고, 창작자의 맥락을 읽기보다 해당 작품 하나에만 한정한다. 하지만 예술적 실천은 결코 ‘갑툭튀’가 아니다. 과거부터 쌓아온 경험이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전에 해온 활동을 거슬러 올라가서 작업의 연속성을 짚어준 비평가도 계셨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더 큰 문제는, ‘장애예술’이라고 불리는 순간, 그 안에 담긴 확장성은 사라지고 오직 ‘장애’만 해석된다는 점이다. 예술을 통해 소수자성을 포용하고 우리 사회의 관계 맺기 방식을 질문해야 하는데, 장애와 돌봄에 칸막이를 치고 분리해 버리니 장애 서사만 중요해지는 단순한 해석이 되는 거다. 진정한 비평이라면 감각적으로 표현이 어려웠을 때 결과만큼이나 과정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연도 회차마다 다르고, 그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려면 연습 과정부터 면밀히 관찰하는 세심함이 필요한 것처럼. 원천 작업이 동시대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읽어내어 비평 자체가 하나의 창작물로서 기능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김원영여러 맥락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중도 장애인이 아니라서 장애 전후의 드라마틱한 전환은 없지만, 몸은 계속 변하니까. 제게 가장 중요한 전환은 무대 바닥, 즉 ‘플로어’를 온전히 쓸 수 있게 되었느냐의 여부였다. 휠체어에서 내려올 수 있느냐 없느냐가 큰 계기였다. 예전에는 해외 장애무용 작품을 보며 무용수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플로어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저한테는 그게 장애인의 몸을 소비하는 서커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직접 몸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쓰는 연습과 경험을 쌓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장애가 소비되거나 역경 극복 서사로 보일까 봐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안전한 선택만 하는 공연은 오히려 재미없어졌다. 이제는 주의 깊게 살피고 해석하지 않은 비평적 코멘트에 별로 상관하지 않고, 비평적 시선이 두려워 움츠러들기보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 혹은 요구하는 과감한 방식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작업에 훨씬 끌린다. 이런 변화가 내 몸이 휠체어 중심에서 플로어 중심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수많은 작업을 접하며 예술적 안목이 넓어져서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내 몸의 물리적 전환이 작품을 보는 관점의 변화를 수반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성수김원영 작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 역시 ‘극복 서사’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내 삶의 드라마를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유미방금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저는 여섯 살 때 장애를 갖게 되어 오랜 시간 장애 당사자로 살아왔다. 내 안에 선입견이 너무 많고 생각이 복잡하다 보니 스스로 주저하고, 의식이 닫혀 있는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자꾸 조심스러워하고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대 위에서 소비될까 봐 늘 조심스러웠고, 연기 또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격 모독을 하는 연출가도 문제지만, 장애배우를 배려한답시고 세심한 디렉션을 주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이제는 제 안의 시선과 의식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조금 더 자유롭게 몸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원영창작자가 용기 있게 발을 내디딜 때, 그 시도를 정확히 읽어주는 비평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창작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비평적 지지가 없다면 현장에는 “정말 대단하세요” 같은 공허한 말만 난무할 것이다. 결국 창작과 비평은 상호작용을 한다. 비평가들 또한 용기 있게 실천하는 장애예술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제대로 비평하고 싶은데, 장애예술 신이 여전히 폐쇄적인 틀 안에 갇혀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장애예술을 둘러싼 담론이 비평 언어로 번역될 때

이성수말씀하신 것처럼 비평이 창작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좋겠지만, 한편으로 비평 언어 자체가 일종의 평가처럼 느껴져 두렵기도 하다. 현재 장애예술 담론은 ‘권리’ ‘차별’ ‘보호’라는 언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문화향유권을 기본권으로 보거나 접근성을 권리 차원에서 논하기도 한다. 최근 서울연극협회의 장애인 연극 차별 이슈가 뜨거웠던 것처럼, 현실에서 나의 권리가 어떻게 지켜지고 보호받을 수 있을지가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권리를 내 입으로 외쳐야 할지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이 개념어들을 포기할 수도 없다. 장애예술 비평에서 이런 불편함 없이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는 없을까?

김원영장애예술이라는 개념이나 실천 자체가 장애권리운동에서 분화된 것이고, 거기서 축적된 문제의식에 기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비평적 의견을 나눌 때는 이 단어들에 ‘괄호’를 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권리’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공연을 진지하게 관찰했다면, 관객의 솔직한 피드백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관객들 또한 “장애를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게 차별 아닐까”라며 자기검열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좋은 작업을 하려면, 단순하고 비하적인 반응은 단호히 배격하되, 작품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대화를 지속해야 하지 않을까. 2024년 웹진 [연극in] 폐간 즈음에, 장애·비장애 예술가와 평론가가 모여 특정 작품을 리뷰했던 집담회가 기억난다. 평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여러 관점이 충돌하는 풍부한 대화 자체가 흥미로웠다. 장애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거침없는 대화와 담론의 장이 더 많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성수김원영 작가님도 본인의 작품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받아본 적이 있나?

김원영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아본 적은 당연히 있다. 이를테면 〈무용수-되기〉에서 제가 휠체어 위에서 보여준 힘이 휠체어에서 내려오는 순간 기존 현대 무용의 문법에 함몰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휠체어에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저의 한계를 깨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점을 좋아하는 관객도 많았다. 하지만 그 평론가는 다르게 본 것이다. 동의하기는 어려운 비평이었지만,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비평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움직이는데 이게 장애예술 맞아?”라는 반응이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혹독한 것이었다. 성찰 없는 빼어남을 추구하는 것이 아마도 동시대의 ‘우리’가 지향하는 장애예술적 실천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적 조건과 공연의 형식 안에서 최선의 기량을 추구하는 일이 곧 ‘에이블리즘’(비장애중심주의)은 아니다. 협소한 에이블리즘 개념에 기초해 그에 저항하는 거친 실천만이 장애예술은 아니다. 물론 에이블리즘적이지 않은 탁월함이란 무엇인지는 아주 큰 질문이고, 중요한 물음이다.

이성수라움콘의 작업에 비평은 어떤 영향을 미치나? 비평은 곧 평가일까? 평가가 전제되어야만 비평할 수 있을까?

라움콘_송지은저에게 비평은 평가라기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동시대적 질문을 언어적으로 길어 올린 ‘또 다른 창작물’에 가깝다. 비평문을 비평가의 2, 3차 창작 활동으로 본다면, 이를 단순히 ‘평가’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예술을 점수 매기듯 평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비평을 통해 예술 해석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비평이 그 자체로 독립된 창작물로서 기능하고 작동하면 좋겠다. 많은 곳에 기고되면 좋겠다. 사실 저와 Q레이터는 외부보다는 우리 둘 사이의 비평 때문에 매일 마음 상한다. (웃음) 작업 과정에서 서로의 아이디어와 작업을 크리틱하는데, 둘의 세계관이 다르다 보니 표현과 지향점이 개념적으로 맞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저희 작업 방식이 워낙 느린 편인데, 저는 Q레이터의 개념과 표현이 다 수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이게 왜 예술이야? 그냥 낙서 아냐?”라고 대놓고 묻기도 한다. 그러면 Q레이터도 저한테 똑같이 반격한다. 이 과정이 저희에겐 가장 거대하고 실질적인 크리틱인 셈이다.
정작 외부 비평에서 상처받는 건 ‘주례사 비평’을 마주할 때다. 그 어떤 질문도 없고,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할 동력도 없는 글을 보면 암담해진다. 타자가 우리 작품을 매개로 질문을 던질 기회마저 빼앗긴 느낌이 든다. 창작자와 비평가 사이에 서로 비난하는 게 아니라, “이 작업은 영화적이었으면 좋겠다” “스펙터클을 더 키워봐” 같은 구체적인 제언을 주고받는 동료애가 그립다. 이런 치열한 관여와 협업이 생기지 않으니 늘 허기가 느껴지는 거다.

장애예술 비평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성수창작자가 담고 싶었던 메시지가 비평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을 때의 서운함은 저도 공감한다. 딴 얘기만 가득한 비평을 보면 공허해진다. ‘기술이 깊어지면 예술이 된다’라는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의 경우 정규 예술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가 아니어서 기술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늘 숙제다.

김원영우선 메시지에 관해서라면, 저는 잘 모르겠다. 관객이 제가 의도한 바를 놓치면 아쉽긴 하지만, 제 작업이 명확한 메시지 전달보다는 피지컬한 퍼포먼스 중심이라 그런지 ‘그 순간을 함께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관객이 제 의도에 대응하지 않더라도 문제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많은 작품이 작가의 의도에 한정되는 건 아니잖나. 또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넘어 관객에 의해 확장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비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은 장애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의 문제라고 본다. 공연예술은 물론이고 시각예술도 마찬가지다. 다들 열심히 만드는데 피드백이 없으니, 창작자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비판적인 시각이라도 좋으니, 작품을 주의 깊게 보고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저는 기술(테크닉)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예술가도 각자의 신체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테크니컬한 것들을 연습할 기회가 많이 생겨야 한다. 기술과 예술을 분리해 버리면 자칫 장애예술이 ‘신비화’될 우려가 있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엘리트주의적일 수 있다. 관객이 그 신체의 역사나 감각을 모른다면, 무대 위의 움직임은 그저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작업일 뿐이다. 기술을 특정 신체의 전유물로만 보고 장애인을 배제하는 것이 문제이지, 기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기존 장르에서 중시해 온 테크닉을 장애예술가에게 맞게 확장하고 변형해서 꾸준히 연마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표현하라”라는 격려도 좋지만, 때로는 어떤 기술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유미저는 장애인 극단에서 활동하며 비평이 비난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냉정하게 말해 장애배우의 연기력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자는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서사도 부족한 채 ‘장애 감수성’이나 ‘존재 자체’에만 기댄 공연을 선보인다면 관객으로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장애배우는 왜 늘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역할만 맡고, 극을 이끄는 중심은 항상 비장애인의 몫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솔직히 역량 부족인 면도 있을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극의 재미나 스펙터클을 위해 장애배우를 소모적으로 활용하다 보니, 연기의 진정성이 떨어지고 기량도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제가 이런 토론이나 비평 자리를 좋아하면서도 조심스럽기도 하고 장애예술가의 연기를 논하는 것이 자칫 오만하게 비칠까 우려되기도 한다. 결국 비평과 비난을 겸허히 수용할 준비가 되었느냐 역시 장애예술가가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제 공연에 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마음 내어 왔는데 공연이 흡족하지 않으면 너무 죄송하니까. 그러다 작년 정기 공연에 비로소 용기 내서 많은 분을 초대했다. 기꺼이 “총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나 할까. 여전히 두렵지만 냉정한 피드백이 있어야 토론도 하고 수정 보완도 가능할 것 같다.

라움콘_송지은저는 창작자의 의도가 비평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더라도 “저런 시점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라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서운함은 없다. 비평가의 해석 또한 그 사람만의 신념인데, 굳이 제 의도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도 각자의 경험과 관점이 투영되듯, 비평가 역시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읽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읽을 때 더 호기심이 생긴다. 물론 제가 한 말에 대해서 오해하는 건 아쉽겠지만. 요점은, 그 사람은 작품에서 느낀 것들을 그렇게 해석한다는 거고, 그 역시 그 사람의 경험과 시점이라는 거다.
작품은 때로 사람들과 소통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25년에 진행했던 미디어아트 전시 중에 《□□□ □□□□ □□ □□□□》이 있다. 미음미음미음…이라고 읽는데, 이 작업은 관객이 장치에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가 꺼지도록 설계했다. Q큐레이터 님과 저의 대화가 늘 속도가 다르고 단절되는 것처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꺼짐의 상태를 구현한 거다. 어떤 관객은 당혹스러워하며 그냥 가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왜 이런 상황이 방치되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외국인 관객은 한국이라는 낯선 타국에서 겪는 자신의 언어적 고립으로 읽기도 했다. 예전에는 제 작업을 누군가가 정답처럼 해석해 주길 바란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모든 해석을 제 통제하에 두려 한다면 비평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평가를 통해 작품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저 또한 새로운 시선을 배우게 되었다.

이성수각자 작업이나 작품이 비평 대상이 되기도 하고, 비평 세미나 또는 워크숍에 강사로, 수강생으로 참여하기도 하셨다. 당사자 리뷰 활동도 있었다. 예술비평에서 당사자 비평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당사자 비평이 활성화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원영당사자 비평을 논하기엔 여전히 장애예술가조차 부족한 현실이다. 그렇지만 당사자 비평이 갖는 의미도 크다. 가장 큰 장점은 좀 더 쉽게 비판할 수 있다는 거다. 차별이나 비하라는 오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으니까. 더 중요한 점은, 비장애인이라면 아마도 닿기 어려웠을 감각적 경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비평이라고 하면 전문적인 예술 이론을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대화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혼자 고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가나 동료와 함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기회를 만드는 게 출발점이다. 저 역시 공연을 보고 나면 어떻게 말로 풀어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기에, 이런 대화의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정유미저도 동의한다. 제가 보기엔, 장애예술인이 오히려 다른 공연을 잘 찾아보지 않는 것 같다. 다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테고 자기 공연을 해내기도 벅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팀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연출은 어떻게 풀어내는지, 치열한 현장을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경험해 봐야 비평이든 평론이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역량을 키우며 타인의 작업을 살피다 보면 당사자 비평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지 않을까.

라움콘_송지은당사자 비평을 활성화하려면 지금 이 자리처럼, 아니, 이보다 더 날 것의 목소리가 부딪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충돌 안에서 비평가도, 창작자도, 새로운 시도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한다면, 건강한 담론이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생겨나고 퍼져나갈 것 같다. 저희가 꿈꾸는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개별적인 존재들이 만나 뜨겁게 부딪히는 순간 말이다. 예술운동 같은 것도 결국 그런 시끌벅적한 데서 시작하지 않았나.

이성수저도 살롱 문화를 좋아해서 장애, 젠더, 환경 등 다양한 담론의 장을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정작 장애 당사자들과 마주치기는 참 어렵더라. 언젠가 접근 가능하고, 안전하고, 편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애예술 살롱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긴 시간 깊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 참여자들이 길게 이어붙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김원영

김원영

작가, 공연창작자. 법과 규범, 예술, 장애를 가진 몸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등의 책을 펴냈고, 〈무용수-되기〉, 〈현실원칙〉, 〈보철(물)로서 움직이기〉 등의 공연에서 안무와 무용수로 참여했다.

송지은 라움콘

라움콘

라움콘은 Q레이터가 베르니케 실어증 상태에서 사용한 착어이자 비언어로, 원래는 ‘양치질’을 의도하여 사용한 단어다. 2018년 10월 7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장애를 갖게 된 문화예술 기획자 Q레이터와 시각예술작가 송지은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 라움콘은 마비된 신체 기능을 재활하는 과정에서 예전과 다른 몸으로 경험하는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다양한 창작물을 생산한다. 개인전 《한 손 그릇》 《울림만 있다면》 《□□□ □□□□ □□ □□□□》 《다시걷는 노-하우》, 기획 그룹전 《여기 닿은 노래》 《기울기 기울이기》 등이 있다. ‘라이징 멜버른’의 여정 아카이브 《what a perfect journey》 작업을 했다.
laumkon@gmail.com
· 인스타그램 @laumkon
· 홈페이지 laumkon.com

정유미

정유미

장애예술인극회 휠 배우.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한국장애인국제예술단에서 활동했다. KTV 국민행복시대 리포터와 내레이터로 활동했고, 이지트립 리포터로도 활동했다. 주요 출연작으로 〈ONE&ONE〉, 〈옥상 위를 부탁해〉, 〈불굴의 왕 리처드 3세〉, 〈생일파티-Again 2003〉, 〈인간에 대한 예의〉 등이 있다.
ceasing7@hanmail.net

이성수

이성수

힘빼고컴퍼니 대표, 이음온라인 기획위원. 중도 저시력 시각장애인. 힘빼고컴퍼니 대표. 연극, 글, 장애인식개선, 워크숍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놀이하는 사람. 배리어컨셔스 연극 〈국가공인안마사〉,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 〈컨셔스 시어터 ‘ㅈ’〉, 〈몬스터 콜스〉, 〈미술관에 VVP가 뜬다〉 등의 작품을 쓰고 연출했다. 2024년 배리어프리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를 함께 썼다.
hansole11@naver.com

정리.최순화 프로젝트 궁리 PD suna.choe@gmail.com
사진.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2026년 2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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