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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시대 예술의 역할

이음광장 지금, 예술을 하려는 이에게

  • 문승현 작가
  • 등록일 2022-02-04
  • 조회수1011
  • 문승현 연출, <보이스바디>, 2018의 한 장면. 문승현 작가가 몸을 웅크리고 두 팔을 뻗으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예술을 정의하는 미학 이론 중 하나인 ‘예술 제도론’에 따르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것은 ‘예술계’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다. 예술계는 여러 구성원과 집단으로 이루어진 수직적·수평적 사회 구조 모두를 포함하며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구성원은 정치적이다. 예술 제도론은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정의하는 방식이 곧 그 시대의 예술을 정의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논리적 순환오류 때문에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예술계라는 사회가 존재하며 그 사회도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경제적 권력 관계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술계 내에서 암묵적 관행으로 작가를 상업적·예술적 성과에 따라 구분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른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D급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예술 소비자에게 거부당하는 이유를 단지 예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으로 이해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정치적 부조리와 극심한 양극화의 결과라고 비판할 수도 있으나, D그룹에서 A그룹으로 이동하는 일부 젊은 작가들은 예술계를 시장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은 비즈니스다”라는 앤디 워홀의 말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비즈니스는 단순히 경제적 영역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생산영역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제도와 행정, 정치적 수단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비즈니스의 속성을 가지며 시장 질서 안에서 유통되고 소비된다. 예술계는 이미 시장 중심 사회가 된 지 오래지만, 특히 상업화된 시각예술 시장은 200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 시장의 영향으로 무한 경쟁의 적자생존 법칙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예술계를 획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계는 이제 전통적인 생산유통 시스템, 교육 시스템, 고용 시스템에 있어서 예술계 밖 현상들과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예술과 예술 행위가 학제적으로 확장되듯, 예술계라는 사회 자체도 예술계 외부로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 이면에 있다. 허버트 스펜서식의 사회진화론은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아래서 경계가 사라진 시스템에서의 경쟁은 시장 우선주의와 공정을 가장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나 예술계 내·외부의 주된 조류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이전과 같은 경제 성장 위주의 소모적인 소비 패턴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요즘,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예술계는 단절될 것과 계속될 것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예술교육과 창작 시스템에서의 노동 집약적이고 훈련 중심적인 과정의 비효율성은 이미 폐기되는 수순에 들어갔다. 팬데믹 이후 예술 시장은 블록체인과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토큰)같은 신기술과 새로운 자본시장의 주요 거래처일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술 시장을 활성화하거나 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예술품의 거래와 거래에 따른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에서도 자본의 자기 증식이 시장 생태계의 다양성을 교란할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다. 시장 중심적 정치사회인 예술계는 더는 폐쇄적인 전문가 사회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사라진 예술계는 이전의 예술분류를 벗어난 행위 주체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사회적 에너지와 화합물을 교환하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기존의 권력 관계를 대체하며 시스템을 와해시킬 것이다. 유튜브와 OTT 서비스가 레거시 미디어에 대응하며 미디어 시장과 정치적 권력을 탈중심화시키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한 변화는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극도로 예측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팬데믹이 경고하는 미래처럼 예술계도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권력 관계의 질서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예술계 내에서의 공동체주의와 양식적·장르 중심적 네트워크는 경직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미술 공모전, 특정 장르 중심의 아트페어가 대관 목적 상업화랑의 침체와 더불어 그 권위와 중요성을 잃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속도가 제도적 한계 내에 있는 예술행정과 정책개발자들은 권위 없는 수상과 주체성 없는 전시 횟수, 소속 단체의 현상 유지용으로 동원된 행사들에 대한 기록을 작가의 실적과 역량 개발의 기준으로 파악하는 오판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술교육과 창작은 이제 종합적·분석적 사고 영역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총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AI가 고도의 예술적 훈련을 대체하고 비대면의 예술 시장이 전통적 예술계의 권력 관계를 대체한다면 우리가 예술이라는 행위 욕구를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술계라는 사회가 정의할 수 없는 행위와 생산을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이 인간 개개인이 가진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특별한 능력, 뛰어난 솜씨, 위대한 발견이 아니라 타인의 본성과 교감하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술은 이제 감성의 영역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사변의 영역이었던 적은 없다. 예술은 언제나 물질과 삶, 사회의 역동하는 생명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고립된 개성들이 경쟁하는 시장의 예술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역동성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예술 또는 예술계는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나와 타인의 삶이 지속 가능하게 보존된 미래를 위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에 민감해져야 한다. 존재를 파괴하는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예술의 책임이다.

문승현

문승현 

미술작가, 기획자, 공연예술 연출가, 옐로우닷컴퍼니 대표. 협성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마음, 하늘을 바라보다》(2012), 《Soul Face》(2013), 《침묵 속 이야기를 그리다》(2018) 등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뇌성마비 시각예술작가의 모임 아티스트 그룹 ‘날’에서 활동했으며,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선의 리듬〉 〈점점 퍼지다〉 〈21° 11′〉 《흐르는 벽으로 대화하기》 등 여러 공연과 전시에서 퍼포머, 연출, 기획, 음악으로 참여했다. 저서로 시집 『고해소 앞에는 등불이 켜져 있다』가 있다.
sellars@nate.com

사진제공. 필자 (문승현 연출/출연, <보이스바디>, 2018)

문승현

문승현 

미술작가, 기획자, 공연예술 연출가, 옐로우닷컴퍼니 대표. 협성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마음, 하늘을 바라보다》(2012), 《Soul Face》(2013), 《침묵 속 이야기를 그리다》(2018) 등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뇌성마비 시각예술작가의 모임 아티스트 그룹 ‘날’에서 활동했으며,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선의 리듬〉 〈점점 퍼지다〉 〈21° 11′〉 《흐르는 벽으로 대화하기》 등 여러 공연과 전시에서 퍼포머, 연출, 기획, 음악으로 참여했다. 저서로 시집 『고해소 앞에는 등불이 켜져 있다』가 있다.
sellars@nate.com

상세내용

  • 문승현 연출, <보이스바디>, 2018의 한 장면. 문승현 작가가 몸을 웅크리고 두 팔을 뻗으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예술을 정의하는 미학 이론 중 하나인 ‘예술 제도론’에 따르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것은 ‘예술계’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다. 예술계는 여러 구성원과 집단으로 이루어진 수직적·수평적 사회 구조 모두를 포함하며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구성원은 정치적이다. 예술 제도론은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정의하는 방식이 곧 그 시대의 예술을 정의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논리적 순환오류 때문에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예술계라는 사회가 존재하며 그 사회도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경제적 권력 관계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술계 내에서 암묵적 관행으로 작가를 상업적·예술적 성과에 따라 구분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른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D급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예술 소비자에게 거부당하는 이유를 단지 예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으로 이해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정치적 부조리와 극심한 양극화의 결과라고 비판할 수도 있으나, D그룹에서 A그룹으로 이동하는 일부 젊은 작가들은 예술계를 시장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은 비즈니스다”라는 앤디 워홀의 말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비즈니스는 단순히 경제적 영역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생산영역과 마찬가지로 예술도 제도와 행정, 정치적 수단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비즈니스의 속성을 가지며 시장 질서 안에서 유통되고 소비된다. 예술계는 이미 시장 중심 사회가 된 지 오래지만, 특히 상업화된 시각예술 시장은 200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 시장의 영향으로 무한 경쟁의 적자생존 법칙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예술계를 획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계는 이제 전통적인 생산유통 시스템, 교육 시스템, 고용 시스템에 있어서 예술계 밖 현상들과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예술과 예술 행위가 학제적으로 확장되듯, 예술계라는 사회 자체도 예술계 외부로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 이면에 있다. 허버트 스펜서식의 사회진화론은 아닐지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아래서 경계가 사라진 시스템에서의 경쟁은 시장 우선주의와 공정을 가장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나 예술계 내·외부의 주된 조류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이전과 같은 경제 성장 위주의 소모적인 소비 패턴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요즘,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예술계는 단절될 것과 계속될 것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예술교육과 창작 시스템에서의 노동 집약적이고 훈련 중심적인 과정의 비효율성은 이미 폐기되는 수순에 들어갔다. 팬데믹 이후 예술 시장은 블록체인과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토큰)같은 신기술과 새로운 자본시장의 주요 거래처일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술 시장을 활성화하거나 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예술품의 거래와 거래에 따른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에서도 자본의 자기 증식이 시장 생태계의 다양성을 교란할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다. 시장 중심적 정치사회인 예술계는 더는 폐쇄적인 전문가 사회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사라진 예술계는 이전의 예술분류를 벗어난 행위 주체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사회적 에너지와 화합물을 교환하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기존의 권력 관계를 대체하며 시스템을 와해시킬 것이다. 유튜브와 OTT 서비스가 레거시 미디어에 대응하며 미디어 시장과 정치적 권력을 탈중심화시키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한 변화는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극도로 예측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팬데믹이 경고하는 미래처럼 예술계도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권력 관계의 질서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예술계 내에서의 공동체주의와 양식적·장르 중심적 네트워크는 경직되고 있으며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미술 공모전, 특정 장르 중심의 아트페어가 대관 목적 상업화랑의 침체와 더불어 그 권위와 중요성을 잃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속도가 제도적 한계 내에 있는 예술행정과 정책개발자들은 권위 없는 수상과 주체성 없는 전시 횟수, 소속 단체의 현상 유지용으로 동원된 행사들에 대한 기록을 작가의 실적과 역량 개발의 기준으로 파악하는 오판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술교육과 창작은 이제 종합적·분석적 사고 영역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총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AI가 고도의 예술적 훈련을 대체하고 비대면의 예술 시장이 전통적 예술계의 권력 관계를 대체한다면 우리가 예술이라는 행위 욕구를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술계라는 사회가 정의할 수 없는 행위와 생산을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이 인간 개개인이 가진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특별한 능력, 뛰어난 솜씨, 위대한 발견이 아니라 타인의 본성과 교감하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술은 이제 감성의 영역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사변의 영역이었던 적은 없다. 예술은 언제나 물질과 삶, 사회의 역동하는 생명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고립된 개성들이 경쟁하는 시장의 예술도 마찬가지로 사회의 역동성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예술 또는 예술계는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나와 타인의 삶이 지속 가능하게 보존된 미래를 위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에 민감해져야 한다. 존재를 파괴하는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예술의 책임이다.

문승현

문승현 

미술작가, 기획자, 공연예술 연출가, 옐로우닷컴퍼니 대표. 협성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마음, 하늘을 바라보다》(2012), 《Soul Face》(2013), 《침묵 속 이야기를 그리다》(2018) 등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뇌성마비 시각예술작가의 모임 아티스트 그룹 ‘날’에서 활동했으며,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선의 리듬〉 〈점점 퍼지다〉 〈21° 11′〉 《흐르는 벽으로 대화하기》 등 여러 공연과 전시에서 퍼포머, 연출, 기획, 음악으로 참여했다. 저서로 시집 『고해소 앞에는 등불이 켜져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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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필자 (문승현 연출/출연, <보이스바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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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0: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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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라는 사회존재가 정치적 경제적 권력관계의 메커니즘이란 말은 현시대에서 공감됩니다. 그리고 예술은 비즈니스이다는 앤디워홀의 말이 아니라도 미술단체들의 경우 요즘 비대면 전시 및 판매앱에서 작품의 내실은 둘째 치고 단체를 움직이는 운영진의 작품들만 판매되는 경우도 불공정이 느껴집니다. 예술은 현 디지털 시대에 마음과 영혼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진솔한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생존은 할 수 있도록 예술지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좋은 원고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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