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5년 8월, 제주시 원도심 예술공간 이아에서 열린 《미의 역정(美의 驛程)》은 단순한 회고전이나 지역 전시의 범주를 넘어선 의미 있는 시도였다. 이 전시는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1세대 장애예술가 6인의 예술 여정을 돌아보는 동시에, 한국 장애예술이 독자적인 ‘감정 구조’와 미학적 언어를 형성해 온 과정을 선언하듯 보여주었다. 감정 구조는 개인적인 정서를 넘어, 특정 사회와 시대가 공유하는 경험과 가치의 복합체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애예술가들이 사회적 배제, 연대, 상실, 회복을 거치며 축적한 경험이 예술을 통해 집단적 정서로 형상화된 결과물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들이 택한 ‘역정(驛程)’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경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가 개인이 감각, 언어, 현실의 제약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 미의식을 개척해 왔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예술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형성된 감정 구조의 결정체로 본 중국 미학자 리쩌허우의 개념과도 긴밀히 호응한다. 미학은 단순히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가 역사 속에서 집단적으로 형성한 정서와 감각의 구조임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장애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게 만든다.
‘극복’의 감동에서 감정 구조의 언어로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장애예술은 ‘감동’과 ‘극복’이라는 언어 안에 갇혀 있었다. 작품의 조형성과 주제 의식보다는 신체적 조건을 극복한 인간 의지에 감상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예술을 능동적인 창작 결과물이 아닌, ‘성취의 대상’이나 ‘치유의 사례’로 전락시키는 시선이었다.
《미의 역정》은 이러한 기존 감정 구조를 전복한다. 예술감독 민경언과 기획자 신소연은 장애예술가를 ‘복지의 수혜자’가 아니라 예술사적 주체이자 감각의 해석자, 표현의 실천가로 재위치시킨다. 관람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장애라는 조건에 앞서 작품 자체가 품고 있는 강렬한 조형 언어와 주제적 밀도에 직면하게 된다. 작품은 더 이상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니라, 다르게 구성된 감정 구조의 미학적 실천으로 읽힌다. 이는 리쩌허우가 말한 “인간의 실천 속에서 형성된 감정 구조가 예술 형식으로 승화된 것”이라는 미학적 입장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여섯 예술가의 감정 구조가 엮어낸 서사
《미의 역정》은 여섯 명의 1세대 제주 장애예술가가 걸어온 궤적을 하나의 서사로 풀어냈다.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된 작품들은 전시장 안에서 ‘감정 구조’라는 이름으로 연결되며, 마침내 ‘미의 역정’이라는 완성된 이야기가 되어 관람객 앞에 놓였다. 작품 뒤에 숨겨진 창작 과정과 고민을 생생히 전하는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은 전시의 깊이를 더했다.
고운산 작가는 한국화를 통해 고독과 생의 비극을 직면하는 구상적 언어를 구축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를 겪은 그는, 개인 창작을 넘어 제주 장애예술의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하며 한 세대의 토대로 굳건히 섰다. 전시를 한 달 남짓 앞두고 작고한 작가를 위해 작품 공간 한편에 추모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예술 세계뿐 아니라 삶의 궤적까지 함께 기릴 수 있었다.
곽상필 작가는 기록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냈다. 작품 〈소방서〉에 보이는 낡은 벽돌과 기울어진 구조물은 단순한 건축의 흔적이 아니라 사회 가장자리에 남겨진 시간의 주름이다. 그의 작업은 예술이 사회적 연대와 윤리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정호 작가의 ‘정글 시리즈’는 폐기된 오브제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과정을 통해 전시장에서 가장 낯선 긴장감을 형성했다. 파괴와 재생이 충돌하는 화면은 상실과 생성의 교차점을 드러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소멸과 탄생이 공존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했다.
백주순 작가는 낙인을 예술의 언어로 승화했다. 종이 프레스 조형물 〈얼룩〉은 혐오와 수치의 흔적을 존재의 선언으로 바꾸며, 치유를 넘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여성성과 장애라는 이중적 조건 속에서 감각과 일상의 단면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젠더화한 감정 구조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성정자 작가는 전시 인터뷰에서 “누군가 내 작품을 보고 즐거움을 발견했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웃고 말자〉는 이러한 작가의 철학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예술이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좌경신 작가는 문인화 〈불꽃 사랑〉을 통해 절제와 사색의 결을 드러냈다. 강렬한 색채와 명확한 구도는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며, 존엄성과 의지의 감정 구조를 화면에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전시 전체를 차분한 사유로 마무리했다.
감정 구조의 독자적 층위에서 다시 한 걸음
한국의 장애예술은 오랫동안 문화행정의 대상이거나 단순히 ‘주목할 만한 사례’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미의 역정》은 기존 담론의 중심과 주변부를 재구성하며, 장애라는 조건이 결핍이나 한계가 아닌 새로운 감각의 출발점이자 미적 구성의 자율적 토대임을 증명했다. 이번 전시는 장애예술가들이 자신의 미의식으로 써 내려간 대안적 계보를 확인하는 동시에, 동시대 미술이 던지는 윤리적·미학적 질문을 환기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 전시는 장애가 예술가의 주체적 실천을 통해 기존과는 다르게 형성된 감각과 정서, 즉 새로운 감정 구조를 만들어내는 원인이자 조건이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미의 역정》은 바로 이 새로운 감정 구조가 한국 미술사에서 더 이상 주변부의 이야기가 아닌, 가장 역동적이며 독자적인 지형 중 하나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감동이나 극복 서사를 기대하는 기존의 시선을 넘어, 새로운 미적 기준과 언어를 제시하며 동시대 예술의 지평을 확장하는 미학적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고운산, 작품명 미상, 연도 미상, 59×34cm, 한지에 자연채색
곽상필, 〈소방서〉, 2004, 피그먼트 프린팅, 70x45cm
성정자, 〈웃고 말자〉, 2022, 화선지, 먹, 물감, 50x35cm
좌경신, 〈불꽃사랑〉, 2024, 화선지에 수묵담채, 135x70cm
백주순, 〈얼룩〉, 2022~2025, 광목,잉크,철사,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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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호 작가 인터뷰 영상(커뮤니티 아트랩 코지 제작, 3분 26초)

미의 역정
커뮤니티아트랩 코지|2025.8.16.~9.6.|예술공간 이아
이 전시는 제주 장애예술의 과거와 미래를 예술적 시선으로 조명한다. 제주 장애미술 1세대 예술가들이 품어온 열망과 그 열망을 실현해온 세월의 흔적, 곧 ‘미의 역정(美의 驛程)’을 따라간다. 우리는 이제 장애와 예술을 복지적 틀이나 시혜의 관점이 아닌, 온전한 예술의 가치로 바라보는 전환점에 서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장애예술계에서 오래도록 요청되어온 것이지만, 고정관념과 익숙한 틀을 깨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 전시는 그 벽을 넘어, 장애예술과 이를 향유하는 문화를 새롭게 열어가고자 하는 단단한 의지이다. 참여작가: 고운산, 곽상필, 문정호, 백주순, 성정자, 좌경신
∙ 전시정보 :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강나경
문화예술지원 공공기관에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주체적인 삶을 찾아 현장으로 돌아왔다.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전시공간 ‘새탕라움’과 지역문화콘텐츠 연구소 ‘문화발전소 제비’를 운영하며, 기획과 연구를 통해 동시대적 담론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주요 참여 전시로는 서울디자인 2024 주제전시 《LIGHT ARCHITECTURE》와 2023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프로젝트 제주 《이주하는 인간–호모미그라티오》 등이 있다.
사진 제공.커뮤니티아트랩 코지
2025년 10월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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