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청력이 떨어지면서부터 어머니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질문과 상관없는 대답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가 있다. 무례하거나 무심해서가 아니다.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음량이 줄어드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다리가 끊어지고, 끊임없이 입 모양과 표정을 살피며 상대의 말을 짐작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투이기도 하다. 여기, 그 막막한 단절의 세계 한가운데서 일생을 춤으로 건너온 한 사람이 있다. 1990년대 초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춤추는 베토벤’으로 알려진 무용수이자 안무가 이광석이다. 그는 지난 35년여의 세월을 청각장애와 틱장애라는 겹겹의 벽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무대에 서 왔다. 2007년에는 자신의 무용단 댄스컴퍼니 미디우스를 창단해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자신의 무대 언어를 구축해 왔다. 그 긴 시간을 지나온 이광석을 만났다.
이광석 무용가·댄스컴퍼니 미디우스 대표
진동으로 음악을 만나다
사춘기 시절, 신경성 난청으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보기 싫은 보청기였다. 결국 소년은 보청기를 빼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면서 세계는 더욱 고요하고 단단한 벽이 되었다. 침묵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던 소년의 몸을 뒤흔든 것은 고막을 스치는 멜로디가 아니라 가슴팍을 때리던 육중한 우퍼의 쿵쾅거림이었다. 우연히 발을 들인 댄스클럽의 커다란 스피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과 조우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파동은 소년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맞는 물리적 타격이었다. 스피커의 진동이 온몸을 때릴 때, 그는 촉각과 진동으로 음악을 감각하며 브레이크댄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청각을 대신해 온몸의 근육과 세포가 반응한 최초의 음악적 체험이었다.
그렇게 그는 무용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완고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무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집을 나와야 했다.
“아버지가 무용하는 걸 못마땅해하셔서 집에 들어가질 못했어요. 학교 구석에서 자거나 상가 바닥에 종이박스를 깔고 쪽잠을 자면서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연습실로 올라가 연습했죠. 일주일에 딱 한 번,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아침 7시에 잠깐 집에 들러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어요.”
그에게 연습실은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자 처절한 수련의 장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땀이 조금만 들어가도 보청기가 고장 나버려서 연습 중에는 보청기를 낄 수 없었다. 옆 동료들의 움직임을 곁눈질로 훔치며 박자를 맞춰야 했는데, 카운트를 놓쳐 반박자씩 늦을 때마다 교수와 동료들의 매서운 질책이 쏟아졌다.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택한 유일한 방법은 음악을 통째로 ‘육체화’하는 것이었다. 스피커에 귀를 바짝 대고 미세한 저음의 마디를 외우고 또 외웠다. 수천 번, 수만 번 몸을 굴려 동작이 습관으로 굳어질 때까지 각인시키는 것만이 고요 속에서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게 춤은 그저 아름다운 율동이 아니었다. 타인과 어긋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세계의 박자를 훔쳐 자신의 뼛속에 새겨 넣는 생존의 문법이었다.
그 무렵 SBS가 개국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을 찾았고, 교수의 추천으로 이광석이 선택됐다. 소리 없이 춤추는 그의 모습은 ‘춤추는 베토벤’으로 소개됐고, 곧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나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비추는 방송 내용은 아버지의 분노를 키울 뿐이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스물세 살의 나이에 홍콩으로 건너갔다. 교수의 추천으로 홍콩아카데미 장학생으로 홍콩현대무용단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한 달 8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춤에 매달렸던 유학 시절은 그를 프로 무용수로 담금질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그의 삶은 매 순간 타인의 속도와 세계의 리듬을 따라잡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이후 미국 발레단에 갈 기회를 얻었지만 미국 비자가 거절되는 좌절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댄스시어터 온’ 수석무용수로 10여 년간 무대를 지켰다. 그렇게 그는 마침내 한국 현대무용계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주역 무용수로 자리 잡았다.
춤으로 고통을 토해내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난 화려한 명성과 달리 그의 내면은 곪아가고 있었다. 청각장애보다 집요하게 그를 괴롭힌 것은 틱장애였다. 몸속 깊은 곳에는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경련과 소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거나 몸을 통제하지 못해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흥미롭게도 무대에서 춤을 출 때만큼은 틱이 멈췄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다시 틱이 찾아왔다. 분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채 틱을 쏟아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고통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상처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일그러진 자화상을 무대 위에 펼쳐놓은 솔로 대표작 〈숨 쉬는 껍데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내 안쪽에 꽉 눌려 있는 고통을 폭발시켜 보자, 한번 터뜨려 보자 하고 만든 작품이 〈숨 쉬는 껍데기〉였어요.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추다 보니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무대 위에서 다 게워 내듯 토해버렸죠. 그러고 났더니 거짓말처럼 마음의 병과 틱 증상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몸 안에 쌓여 있던 울분과 상처를 문자 그대로 ‘토해낸’ 것이다. 이 처절한 제의는 평단과 관객을 뒤흔들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가상을 수상했고, 남미의 쿠바·콜롬비아·에콰도르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무용축제에 초청받아 기립박수를 받았다. 상처를 부정하거나 감추지 않고 고통의 심연 끝까지 밀어붙여 육체의 언어로 터뜨렸을 때, 비로소 상처는 타인과 공명하는 예술적 층위로 나아갔다.
그런데 무용수로서 정점을 향해 가던 마흔 초중반, 오랜 춤 생활로 인한 생활고, 치매를 앓기 시작한 어머니 간병, 그리고 극심한 고립감 속에서 그는 지독한 술의 늪에 빠져들었다.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던 시간은 2년여간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몰래 쥐여준 쌈짓돈을 받으며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각성했다. 이후 독하게 운동하며 한 달 만에 체중을 감량했고, 주변 무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 무렵 오랜 동료들의 도움으로 양쪽 귀에 맞춤형 보청기를 착용하게 된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병원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을 때,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늘 긴장하고 의심하며 분노해야 했던 삶의 뾰족한 모서리가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광석 무용가·댄스컴퍼니 미디우스 대표
상처가 나으니 춤도 변하더라
이러한 감각의 변화는 그의 예술관 또한 바꿔 놓았다. 과거 그의 안무가 주로 자신의 결핍과 상처, 아픔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에는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미소를 전할 수 있는 움직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낀 음악을 동작으로 빚어내고 후배들과 소통하며, 무거운 주제 의식보다는 삶의 다채로운 국면을 춤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예전에는 아픔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어두운 건 잘 안 해요. 후배가 써준 대본을 보면서 음악을 듣고, 제 방식대로 동작을 쪼개서 무용수들에게 줘요. 무용수가 가진 고유한 움직임의 결을 먼저 보고, 그 위에 제 스타일을 얹는 거죠. 억지로 내 방식을 강요하면 그건 살아 있는 춤이 아니니까요.”
특히 2007년 창단한 댄스컴퍼니 미디우스를 통해 보여준 그의 안무 세계는 무용수의 육체적 조건과 현장의 리듬에 밀착되어 있다. 과거의 작업이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토해내는 비장한 독백에 가까웠다면, 최근 그는 고통의 무게를 덜어내고 위트와 유머, 경쾌한 템포와 정교한 호흡이 교차하는 열린 무대를 만든다.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KIADA)와 리투아니아 등 해외 무대에서 선보인 〈무감어수(無鑒於水)〉, 〈숨쉬는 껍데기 2-마음〉, 〈떨림Ⅱ〉 등 2인무 작업들은 이러한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거운 서사를 다루면서도 무대 위의 움직임은 클래식 선율에 맞춘 빠른 스텝과 코믹한 표정 연기로 경쾌하게 비틀어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유쾌함의 이면에 짙은 페이소스를 묻어내는 것. 이것이 수많은 질곡을 통과해 온 그가 도달한 성숙한 안무의 미학이다.
또한 그는 현대무용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 승무복을 입고 장삼 대신 맨손으로 공간을 가르며 에너지를 쏟아붓는 벽사 정재만 추모 무대 〈그날의 기억〉부터, 50대 후반의 나이에 악마 역할을 맡아 20~30대 젊은 무용수들과 함께 격렬한 도약을 선보인 조윤라발레단의 동화 발레 〈스크루지〉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은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에너지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훈련, 그리고 춤을 향한 순수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춤추는 껍데기〉(촬영. 박상윤)
〈그날의 기억〉
여전히 살아 펄펄 뛰는 진짜 춤꾼
장애예술인을 향한 사회적 시선과 제도적 환경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후배 장애예술가들에게 값싼 위로를 건네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과 그것을 돌파해 내는 지독한 끈기라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다.
“후배 장애예술가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노력하면 비장애인처럼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없고요. 내 한계를 분명히 알고,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1, 2년 해보고 ‘노력했는데 왜 안 되지?’ 하고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35년이 걸렸습니다.”
그에게 장애는 극복하고 없애버려야 할 결함이 아니다. 고유한 리듬과 감각을 벼려내는 조건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았기에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공간과 호흡을 감지하는 법을 배웠고, 틱이라는 통증이 있었기에 껍데기를 깨부수는, 처절한 움직임의 정수를 길어 올릴 수 있었다. 비장애인의 문법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기보다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을 다듬어내라고, 그는 말한다. 이광석의 춤은 결핍을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무엇이라기보다, 자신의 몸으로 세계와 관계 맺으며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낸 한 예술가의 기록에 가깝다. 그에게 춤은 소리를 대신하는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소리가 있든 없든 자기 몸으로 타인의 몸과 만나고 세계와 대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제 꿈은 60대, 70대가 되었다고 무대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다 내려오는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힘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젊은 무용수들 사이에서 전력으로 땀 흘리며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 나이에도 여전히 살아 펄펄 뛰는 진짜 춤꾼이구나’ 하는 소리를 들으며, 무대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으며 내려오고 싶습니다.”
그는 여전히 매일 아침 몸을 풀고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지금도 그의 꿈은 의외로 소박하다. 무대에서 마지막까지 전력으로 춤추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움직이고, 또 다른 몸과 만나며, 아직 오지 않은 리듬을 찾아가는 예술가의 현재진행형 선언에 가깝다. 또한 그가 지나온 35년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몸으로 춤을 시작했고, 고통을 견디는 몸으로 자신의 언어를 만들었으며, 이제는 다른 무용수들의 몸을 바라보며 새로운 춤을 만들어간다.
이광석의 몸은 그 자체로 치열한 무용 텍스트다.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리듬, 고통을 통과하며 새겨진 근육, 무너짐을 딛고 다시 일어선 균형 감각까지. 고요 속에서 시작된 춤은 이제 다른 사람의 몸과 만나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온몸에 새겨 넣은 정직한 춤사위는, 각자의 결핍과 한계를 짊어진 채 휘청이며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위로와 응원이 될 것이다.
〈떨림 2〉 (촬영. 옥상훈)

이광석
현대무용가, 댄스컴퍼니 미디우스 대표. 서울예술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홍콩시립현대무용단, 홍콩모던댄스컴퍼니, 일본 후미에 카나이 현대무용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고, 댄스시어터 온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다. 2007년 댄스컴퍼니 미디우스를 창단하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창작 활동과 공연을 기획·제작하고 있다. 소리의 부재를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키며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한편, 무용을 통한 소통과 장애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쓰며 무대 안팎에서 활발한 연대와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안무 및 출연작으로 〈보이즈 인 더 레인〉(2009), 〈당신이 머문 자리는〉(2011), 〈이광석 쿰바카〉(2014), 〈사운드〉(2015), 〈숨쉬는 껍데기〉(2017), 〈엇갈린 투(套)〉(2018), 〈무감어수(無鑒於水)〉(2021), 〈시지프스〉(2021), 〈숨쉬는 껍데기 2-마음〉(2023), 〈떨림Ⅱ〉(2026) 등이 있다. 홍콩국제무용콩쿠르 대상(1994), 요코하마 콩쿠르 최우수상(1999), 나가노 무용콩쿠르 1등상(1999) 등을 수상했다.
mikeyleek@hanmail.net

김일송
공연문화 월간지 [씬플레이빌] 편집장을 시작으로, 서울무용센터 웹진 [춤:in],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 국제교류 정보 플랫폼 [더아프로]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희곡, 평론, 아카이빙 등 공연 관련 도서 전문 출판사 책공장 이안재를 운영하고 있으며, 예술경영지원센터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과 국립발레단 계간 소식지 [보내드림 〈POINT & FLEX〉] 편집장을 맡고 있다. 연극 〈젤리피쉬〉 아카이빙을 담당했고, 책공장 이안재를 통해 장기영 평론집 『보란듯한 몸, 초과되는 말들: 배리어컨셔스 공연』을 출판했다.
ilsong75@gmail.com
사진.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자료 사진.이광석 무용가
2026년 8월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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