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보았던 세계를 다시 그리기까지
박환 작가의 그림에는 나무와 집, 꽃이 있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익숙한 형상 뒤에 일반적인 회화와는 다른 제작 방식과 물질적 표면이 드러난다. 굵은 실이 나무줄기와 가지를 따라 이어지고, 청바지 천과 나무껍질은 화면 밖으로 도드라진다. 흙이 덮인 표면에는 재료가 겹친 만큼 서로 다른 높이와 질감이 생긴다. 이 풍경은 눈으로 본 대상을 그대로 옮긴 결과라기보다, 작가가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재료를 쌓아 완성한 화면이다.
박환 작가의 회화에서 기억은 과거를 복원하는 자료가 아니라 새로운 화면을 만드는 조형적 출발점이다. 실과 청바지 천, 흙과 나무껍질은 기억 속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촉각과 물질의 질서로 다시 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계절의 색과 풍경 이미지는 과거의 시각적 기억과 현재의 감각 사이를 오가며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상처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 감각과 재료 사용이 어떻게 하나의 고유한 회화 언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사고 이전 박환 작가는 현실과 인간의 삶을 다뤘다. 〈나의 아버지〉, 〈역사의 문〉, 〈삶터〉, 〈상처-다시 걷고 싶은 신발〉에는 오래된 집과 골목, 낡은 사물과 도시의 흔적이 등장한다. 어두운 색조와 낡은 사물, 혼합재료의 거친 표면은 당시 그가 현실의 이면과 삶에 축적된 시간을 바라보던 방식을 보여준다.
박환, 〈역사의 문〉, 180×122cm, 캔버스에 혼합재료·고목, 2010년
평면의 풍경에서 물질의 풍경으로
2013년 사고로 시력을 잃은 박환 작가는 2014년 7월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작가는 2014년과 2015년 작품을 입체감이 거의 없는 평면회화의 단계로 설명한다. 당시에는 가족의 도움도 일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초기작은 사고 이전에 몸에 익힌 회화 경험을 다른 감각으로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2014년 작 〈복숭아밭〉은 사고 이후 초기 작업의 출발점에 놓인다. 분홍빛 꽃이 핀 나무와 구불구불한 길, 집과 산이 화면 안에 펼쳐진다. 사고 이전에 보았던 풍경의 기억이 사고 이후의 새로운 제작 방식과 만나 다시 구성된 화면으로 읽힌다. 평면적인 화면 속 색과 형태는 이후 실과 청바지, 나무껍질을 활용한 입체적 작업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전 단계를 보여준다.
박환, 〈복숭아밭〉, 91×72cm, 캔버스에 흙·실, 2014년
관계를 여는 물질의 언어
박환 작가 회화의 형식적 변화는 2016년 무렵 본격화한다. 그는 화면에 생동감을 더하기 위해 굵은 실과 청바지 천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2018년경부터는 주변에서 주운 나무껍질과 사고 이전에 쓰던 오래된 합판까지 다시 작품에 끌어들였다. 실은 연필 선을 대신하는 보조도구가 아니라 손으로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는 기준이면서, 완성된 화면에 실제 높이로 남는 조형 요소가 된다. 청바지와 흙은 표면의 밀도와 깊이를 만들고, 나무껍질과 합판은 자연과 사물에 축적된 시간을 화면 안으로 가져온다.
2016년 작 〈열린 마음의 세상〉에서는 화면에 부착된 지퍼가 열리며, 그 안쪽으로 밝은 하늘과 나무, 맑은 물이 나타난다. 작가는 사고 후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마음의 문을 닫았던 시간과, 다시 그림을 시작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열렸던 경험을 이 작품에 담았다. 지퍼는 일상적인 생활용품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닫힘과 열림을 직접 보여주는 조형 언어가 된다. 재료의 기능이 작품의 의미와 맞물리면서 관념은 설명이 아니라 화면 구조로 드러난다. 이처럼 실과 천, 흙과 지퍼는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경험을 화면에 조직하는 고유한 언어가 된다.
박환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시각이 촉각으로 단순히 대체됐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눈으로 그리던 선을 손으로 찾아가는 실선으로 바꾸고, 명암으로 표현하던 깊이를 재료의 실제 두께로 형성한다. 이때 촉각은 시각의 결핍을 보완하는 감각이 아니라 회화를 조직하는 독립적인 원리가 된다. 그의 작업은 그림이 보는 사람만을 위한 평면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손의 이동과 물질의 접촉, 기억의 시간이 함께 축적되는 장으로 회화를 넓힌다.
박환, 〈열린 마음의 세상〉, 100×81cm, 캔버스에 흙·실·청바지·지퍼, 2016년
자연에 자신의 삶을 비추다
2018년 작 〈고목나무의 삶〉에는 오래되고 뒤틀린 고목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흙과 실, 청바지, 실제 나무껍질로 구성된 줄기는 거칠고 두꺼운 표면을 드러내며, 가지 끝의 새싹과 주변의 들꽃은 쇠락과 생명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속 나무는 상처 입고 메마른 모습이지만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줄기 끝에서 다시 돋아나는 새싹은 상처를 지닌 채 지속되는 삶의 가능성으로 읽힌다. 실제 나무껍질을 화면에 붙인 작업은 자연을 닮게 묘사하는 데서 나아가 자연의 물질 자체를 회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로써 자연은 멀리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작가가 손으로 만지고 재료를 쌓으며 직접 관계 맺는 존재가 된다.
박환, 〈고목나무의 삶〉, 73×91cm, 캔버스에 흙·실·청바지·나무껍질, 2018년
강원도 춘천 자택이자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박환 작가
2023년 작 〈경의로운 삶 2〉는 박환 작가가 대표작으로 제시한 작품이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를 모티브로 약 1년에 걸쳐 완성했다. 굵고 복잡하게 얽힌 줄기와 가지, 바닥을 가득 덮은 노란 은행잎은 축적과 비움, 절정과 소멸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건강과 부,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쌓으려 하지만, 자연의 고목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뒤로하고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화면에 떨어진 노란 잎은 절정의 아름다움이면서 동시에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이 작품에서 내려놓음은 실패나 체념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자연의 방식이다. 실은 복잡하게 뻗은 가지의 구조를 만들고, 청바지와 나무껍질은 줄기의 두께와 시간을 표현하며, 흙은 나무와 떨어진 잎을 받치는 기반이 된다. 사고 후 초기의 평면적 풍경이 기억과 물질, 자연과 삶이 겹친 화면으로 발전한 것이다.
박환, 〈경의로운 삶 2 a respectful life 2〉, 145×112cm, 캔버스에 흙·실·청바지·나무껍질·유채, 2023년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 사이
박환 작가가 기억하는 풍경은 이미 지나간 세계이지만, 그의 손끝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가 된다. 작품의 전체 모습은 그의 눈앞에 없지만, 실을 따라간 손의 기억과 재료의 높낮이, 오래전에 보았던 색과 계절의 감각은 화면 안에 이미 도착해 있다. 그가 그린 풍경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기에 미완성인 것이 아니라, 손끝과 기억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다.
그림은 반드시 눈으로만 만들어지고 눈으로만 이해되는 예술일까. 박환 작가의 회화는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보다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 사이의 간격을 그대로 남겨둔다. 그 불확실한 간격이야말로 관객이 자신의 감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박환 작가의 작품은 지금-여기, 이미 보았던 세계와 아직 볼 수 없는 세계 사이에서 실과 청바지, 나무껍질과 흙을 한 겹씩 쌓아 올리며 자신의 삶을 자연에 비추는 고유한 회화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박환
서양화가, 전맹 시각장애인 화가.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입선을 시작으로 다수의 미술대전에서 수상 및 입선했으며, KIAF(한국국제아트페어) 등 국내외 주요 전시 및 초청전에 참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2013년 사고로 전맹 시각장애를 얻었으나 2014년 창작 활동을 재개했다. 2017년 첫 개인전 《눈을 감고 세상을 보다》를 시작으로 《불굴의 작가 박환》(2019), 《절망 속에서 찾은 한 줄기 빛》(2019), 《박환: 끝나지 않은 여정》(2020) 등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을 개최했다. 핀과 실, 청바지, 흙, 나무껍질 등 입체적 재료와 손끝의 감각을 활용한 독창적인 기법으로 작품을 표현해 오고 있다.
hihwan1112@naver.com

박현희
미술평론가, 문화예술교육사, 국제문화예술융합학회 회장.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예술융합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장애예술과 포용적 예술, 노년층 문화예술교육 및 문화예술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솟대평론] 평론위원과 이원형어워드 미술 부문 심사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예술과 고령사회 문화예술을 주제로 다수의 학술 연구와 비평을 발표했으며, 국회 교육위원장 표창, NBN 혁신인물대상, KDC 디자인 초대작가 대상을 수상했다.
∙ artart78@naver.com
사진 제공.박환 작가
2026년 8월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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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작품들을 보러다니면서 느낀게 물감같은 기본적인 재료를 떠나서 자수, 실, 종이, 캔버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낸다는걸 인식하던 요즘이었는데.. 작가님은 단순히 시각을 촉각으로 대신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는걸 넘어서서 또 하나의 예술을 보여주고 그려내고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그려낸 자연을 통해 멀리서 바라보거나 지켜보는 대상에서 작가가 직접 그려내고, 쌓아가며 관계를 맺어간다는 존재가 되어 작품에 담겨진거까지 하나의 예술이자 과정이랄까요. 그게 작품에 녹아내려져있는것 같아서 작품이 더 와닿는거 같습니다. 반드시 눈으로보며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서의 예술의 이해를 보여주시는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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