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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어 누구와 만날까

이음광장 다이애나랩을 소개합니다

  • 다이애나랩 
  • 등록일 2021-07-02
  • 조회수1211

첫 칼럼이니 ‘다이애나랩’이라는 그룹에 대한 소개부터 해볼까 한다. 외부에 다이애나랩을 어떻게 소개할지에 대해 내부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언뜻 봐서는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소개를 조금씩 계속 수정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짧은 문장 몇 개로 낯선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너무 어렵고 언제나 불충분한 것이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 우리를 설명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언제나 벽에 부딪힌다. “이 말을 꼭 써서 우리를 설명해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많이 좌절하고 타협하게 된다.

  • 2020년 초, 코로나가 막 번지기 시작했을 무렵 북서울꿈의숲에서 다이애나랩 멤버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연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고 그린 진(zine)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통합 진 만들기 워크숍’의 결과물이다.

처음에 우리는 “중증장애인과 함께하는 표현”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다이애나랩 멤버 대부분은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을 만나서 무언가를 하는 비장애인으로 오랜 기간 살아왔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예술 수업을 오래 하기도 하고, 장애인 야학에서 예술 수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발달장애인 미술작가들이 많이 속해 있던 예술가 그룹에서도 활동했었는데, 거기에서는 당시 본인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정규적인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장애’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 순간 우리는 작은 희열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정규적인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이라는 말은 꼭 그런 사람만으로 100% 구성되어서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그룹이라는 뜻이 아니다. 왠지 몰라도 그건 아닐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신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혹은 받았더라도 거기와 맞지 않은’, 그러니까 원했지만 할 수 없었든 원하지 않았든, 어쨌든 세상의 기준에서 좀 벗어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느낌과 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정규 예술교육의 세계와 다른 지점을 제시하는 것은 장애인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 예술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지향점이 어디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배워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선배와 스승을 만나 좋은 예술가가 되고, 인생이 조금 더 잘 풀린다면 이걸로 돈을 많이 벌기도 하고 유명해지기도 하는 삶을 모델로 제시할 것인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수천 년 유지되어온 사회 안에서 그런 길을 장애인에게 제시할 수 있는가, 누가 제시하는가, 제시해도 되는가, 뭐 그런 문제들.

‘헤테로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사회에서’라는 말과 비슷한 결일 수 있겠다. 여성이라는 당사자로서 우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유리천장을 부수고 성공하는 여성을 볼 때 너무 기쁘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우리는 저렇게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양가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 번도 정규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빈곤한 청년이며 여성이며 퀴어이기도 한 우리에게 성공은 때로 너무 먼 이야기인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저렇게 될까, 이번 생은 이미 틀려먹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소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단어도 피하고 저 단어도 피하면서 살다 보면 결국에는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사실 그런 부분을 참 좋아한다. “쟤들은 뭐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는 이야기를 오래 들어왔기도 하고, 우리는 예술인이자 기획자인 동시에 ‘여성’을 어떤 순간에 드러내야 할지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이기에. 어느 순간 권력의 우위에 있게 되거나(그런 일은 보통 잘 벌어지지 않지만, 간혹 있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더욱 딱딱하게 만드는 맥락에서는 절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뱉고 싶지가 않아지는 것이다. 특히 비장애인으로서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증장애’라는 단어를 내뱉기만 해도 “아…, 장애인들이랑 뭐 하시는구나…”라든지, “좋은 일 하시네요. 대단하십니다.”라는 반응이 쉽게 돌아온다.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장애인 도와주는 비장애인 선생님’이라는 해석이다. 우리는 스스로 사회적 소수자로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우리의 정체성과 하고 싶은 일이, 마이너리티에 대해 생각하는 바와 그것의 실천이 ‘장애’라 불리는 범주의 사람들과의 활동에 강하게 이끌렸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다이애나랩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고기와 장애와 여성과 퀴어와 예술과…. 이게 다 무슨 상관일까?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간부터 순간,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전체를 섬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이애나랩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그 주변의 친구들과 잘 모르지만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모든 이들을 위해서는 ‘전체’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작업은 ‘장애’라는 키워드에서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이어질 칼럼에서는 이 기조로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설명하겠다.

사진제공. 필자

다이애나랩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하는 표현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그룹이다.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텍스타일, 사진, 영상 등 개인 작업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콜렉티브(collective)로 물리적인 공간부터 순간,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전체를 섬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dianalab00@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www.instagram.com/dianalab000/

상세내용

첫 칼럼이니 ‘다이애나랩’이라는 그룹에 대한 소개부터 해볼까 한다. 외부에 다이애나랩을 어떻게 소개할지에 대해 내부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언뜻 봐서는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소개를 조금씩 계속 수정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짧은 문장 몇 개로 낯선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너무 어렵고 언제나 불충분한 것이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 우리를 설명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언제나 벽에 부딪힌다. “이 말을 꼭 써서 우리를 설명해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많이 좌절하고 타협하게 된다.

  • 2020년 초, 코로나가 막 번지기 시작했을 무렵 북서울꿈의숲에서 다이애나랩 멤버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연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고 그린 진(zine)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통합 진 만들기 워크숍’의 결과물이다.

처음에 우리는 “중증장애인과 함께하는 표현”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다이애나랩 멤버 대부분은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을 만나서 무언가를 하는 비장애인으로 오랜 기간 살아왔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예술 수업을 오래 하기도 하고, 장애인 야학에서 예술 수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발달장애인 미술작가들이 많이 속해 있던 예술가 그룹에서도 활동했었는데, 거기에서는 당시 본인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정규적인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장애’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 순간 우리는 작은 희열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정규적인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이라는 말은 꼭 그런 사람만으로 100% 구성되어서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그룹이라는 뜻이 아니다. 왠지 몰라도 그건 아닐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신 ‘정규 예술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혹은 받았더라도 거기와 맞지 않은’, 그러니까 원했지만 할 수 없었든 원하지 않았든, 어쨌든 세상의 기준에서 좀 벗어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느낌과 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정규 예술교육의 세계와 다른 지점을 제시하는 것은 장애인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 예술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지향점이 어디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배워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선배와 스승을 만나 좋은 예술가가 되고, 인생이 조금 더 잘 풀린다면 이걸로 돈을 많이 벌기도 하고 유명해지기도 하는 삶을 모델로 제시할 것인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수천 년 유지되어온 사회 안에서 그런 길을 장애인에게 제시할 수 있는가, 누가 제시하는가, 제시해도 되는가, 뭐 그런 문제들.

‘헤테로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사회에서’라는 말과 비슷한 결일 수 있겠다. 여성이라는 당사자로서 우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유리천장을 부수고 성공하는 여성을 볼 때 너무 기쁘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우리는 저렇게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양가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 번도 정규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빈곤한 청년이며 여성이며 퀴어이기도 한 우리에게 성공은 때로 너무 먼 이야기인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저렇게 될까, 이번 생은 이미 틀려먹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소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단어도 피하고 저 단어도 피하면서 살다 보면 결국에는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사실 그런 부분을 참 좋아한다. “쟤들은 뭐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는 이야기를 오래 들어왔기도 하고, 우리는 예술인이자 기획자인 동시에 ‘여성’을 어떤 순간에 드러내야 할지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이기에. 어느 순간 권력의 우위에 있게 되거나(그런 일은 보통 잘 벌어지지 않지만, 간혹 있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더욱 딱딱하게 만드는 맥락에서는 절대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뱉고 싶지가 않아지는 것이다. 특히 비장애인으로서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증장애’라는 단어를 내뱉기만 해도 “아…, 장애인들이랑 뭐 하시는구나…”라든지, “좋은 일 하시네요. 대단하십니다.”라는 반응이 쉽게 돌아온다.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장애인 도와주는 비장애인 선생님’이라는 해석이다. 우리는 스스로 사회적 소수자로 정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우리의 정체성과 하고 싶은 일이, 마이너리티에 대해 생각하는 바와 그것의 실천이 ‘장애’라 불리는 범주의 사람들과의 활동에 강하게 이끌렸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다이애나랩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고기와 장애와 여성과 퀴어와 예술과…. 이게 다 무슨 상관일까?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간부터 순간,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전체를 섬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이애나랩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그 주변의 친구들과 잘 모르지만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모든 이들을 위해서는 ‘전체’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작업은 ‘장애’라는 키워드에서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이어질 칼럼에서는 이 기조로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설명하겠다.

사진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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