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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이음

무엇이 되어 누구와 만날까

이음광장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른다는 것

  • 다이애나랩 
  • 등록일 2021-08-17
  • 조회수779

인포숍카페별꼴의 진 만들기 워크숍에서는 다양한 창작자들과 함께 사운드 진(sound zine), 와이파이 진(wi-fi zine) 등 기존의 진 개념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다양한 참여자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펜을 쥐기가 어려운 사람, 컴퓨터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 한글을 모르는 사람, 복사라는 게 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스카치테이프를 한 번도 스스로 떼어내 무언가를 붙여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가능한 표현이라는 것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근육에 힘이 없어 무언가를 쥐고 쓰거나 그리는 게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시각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 표현을 할 수 있는 사운드 진이 만들어졌다. 음성언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언어장애 때문에 음성으로 하는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말 대신 노래를 했다. 대화는 어려웠지만 노래나 소리가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말보다 더 잘 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 2016년 인포숍카페별꼴에서 다이애나밴드와 함께했던 <사운드 진> 워크숍에서는 손에 잡히는 크기의 은색 소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용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카세트 플레이어 위에 빨간색과 까만색 전선 두 가닥이 연결된 동그란 센서를 이용해 몸이나 주변의 떨림을 녹음했다.

다양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표현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즐거워 웃음이 난다. 한때 우리는 제록스 복사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쇄기술에 반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원지를 찾아 구입하고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판매되었던 잉크를 사서 실험했었다. 등사 인쇄, 실크 스크린, 프린트 고코(Print Gocco)처럼 전기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복제란 얼마나 멋진 일인지. 지금 모두에게 통용된다고 여겨지는 그런 기술을 다르게 해킹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와이파이 진이 그랬다), 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혁신 아래 잊혀 이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표현 방식을 함께 실험해본다는 건 너무도 짜릿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낯선 무언가를 찾아 함께 해보는 일,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스스로의 즐거움과 다른 이의 즐거움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돌이켜보면 다이애나랩이 만들어지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이런 에너지 아래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 같다.

  • 등사 인쇄로 만든 등사 인쇄에 필요한 도구들 드로잉. 노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것 같은 도구들의 그림이 있다. 왼쪽부터 펀치, 송곳, 실, 철필, 롤러, 잉크, 가위, 제본용 풀, 자, 지우개가 그려져 있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중 한 명인 지로가 만들었다. 관련한 다른 조각들은 환대의 조각들 웹사이트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만 아는 것 같은 이 즐거움을 어떻게 연속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근성’이라는 개념을 다각도로 해석해야 했다. 예를 들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경사로의 각도와 폭과 길이, 참(경사로가 길면 쉬어가는 플랫폼)의 유무 등을 공부하는 동시에 어떤 상황이 누구에게 차별과 배제가 되는지에 대한 감각을 계속 쌓아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동시에, 그 공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지 않는 상태를 가능하면 오래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접근성에 관련된 여러 개념과 조건을 연구하며 동시에 근처의 가게를 섭외하고,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프로젝트 ‘차별없는가게’‘공간학교WWA’를 만들었다.

차별없는가게를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냐고 묻는 이들에게 우리는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가게의 리스트가 필요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차별없는가게’는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신념을 훼손당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며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진 만들기 워크숍에서 시작된 오랜 물음으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차별없는가게의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맞는 가게를 섭외하고 조성한 후에 그곳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이 스스로를 호명할 수 있고 자신이 정한 그 이름을 다른 이가 불러줄 수 있는 그런 곳.

  • 2020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입구에 설치했던 경사로 작업 <천천히 우회하며 오르는 길>의 사진. 낙엽이 깔린 미술관 앞뜰 너머로 거대한 나무 경사로가 있다. 박선민, 최유미, 다이애나랩이 함께 만들었다.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이 건물은 지은 지 116년 되던 지난해 최초로 휠체어 이용자가 입장했다. 내부에는 미디어 작품 <흘러가는 진 퍼레이드> 전시가 있었고, 0set프로젝트와 다이애나랩이 <미술관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라는 주제로 기획한 접근성 워크숍과 포럼이 열렸다. 서울시립서서울미술관 사전 프로그램 <언젠가 누구에게나>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이 작업들은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해체되어 흔적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인식의 전환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남서울미술관에서 엘리베이터와 경사로 공사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꼭 실행되기를 바란다.

너무도 다양해서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끼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들을 수 없고, 누군가는 말할 수 없고, 누군가는 볼 수 없고, 누군가는 또 우리가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조건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각각의 표현이 한데 모여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공통의 목적이나 의무 없이 각자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같이 있을 수 있을까? 다른 이의 표현이 온전히 가능해지는 순간을 서로가 구축하는 것, 구축하려고 한번 해보는 것. 그러기 위해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소리를 나누고 색을 나누고 서로의 알 수 없는 신호를 받아들일 때…. 그런 순간을 상상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어떻게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던 것 같다.

2019년 ‘퍼레이드 진진진’의 마지막은 각자가 자신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행진을 이끌어가는 사람과 참여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의 구분이 희미한 상태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그냥 같이 움직이고 있었던 이상한 퍼레이드. 참여자 전원이 스스로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순간 전체는 더욱 뒤죽박죽 해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뭘 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이 되었다. 남은 것은 각자의 큰 웃음소리와 엄청난 즐거움. 하나의 공통 목적을 나누어 갖지 않고도 우리는 같이 움직일 수 있다. 하나의 명령이나 해야만 하는 당위가 없어도 우리는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가능한 순간들이 실제로 있었다.

[관련링크]

다이애나랩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하는 표현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그룹이다.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텍스타일, 사진, 영상 등 개인 작업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콜렉티브(collective)로 물리적인 공간부터 순간,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전체를 섬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dianalab00@gmail.com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www.instagram.com/dianalab000/

상세내용

인포숍카페별꼴의 진 만들기 워크숍에서는 다양한 창작자들과 함께 사운드 진(sound zine), 와이파이 진(wi-fi zine) 등 기존의 진 개념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다양한 참여자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펜을 쥐기가 어려운 사람, 컴퓨터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 한글을 모르는 사람, 복사라는 게 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스카치테이프를 한 번도 스스로 떼어내 무언가를 붙여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가능한 표현이라는 것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근육에 힘이 없어 무언가를 쥐고 쓰거나 그리는 게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시각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 표현을 할 수 있는 사운드 진이 만들어졌다. 음성언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진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언어장애 때문에 음성으로 하는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말 대신 노래를 했다. 대화는 어려웠지만 노래나 소리가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말보다 더 잘 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 2016년 인포숍카페별꼴에서 다이애나밴드와 함께했던 <사운드 진> 워크숍에서는 손에 잡히는 크기의 은색 소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용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카세트 플레이어 위에 빨간색과 까만색 전선 두 가닥이 연결된 동그란 센서를 이용해 몸이나 주변의 떨림을 녹음했다.

다양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표현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즐거워 웃음이 난다. 한때 우리는 제록스 복사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쇄기술에 반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원지를 찾아 구입하고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판매되었던 잉크를 사서 실험했었다. 등사 인쇄, 실크 스크린, 프린트 고코(Print Gocco)처럼 전기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복제란 얼마나 멋진 일인지. 지금 모두에게 통용된다고 여겨지는 그런 기술을 다르게 해킹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와이파이 진이 그랬다), 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혁신 아래 잊혀 이제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표현 방식을 함께 실험해본다는 건 너무도 짜릿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낯선 무언가를 찾아 함께 해보는 일,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스스로의 즐거움과 다른 이의 즐거움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돌이켜보면 다이애나랩이 만들어지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이런 에너지 아래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 같다.

  • 등사 인쇄로 만든 등사 인쇄에 필요한 도구들 드로잉. 노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것 같은 도구들의 그림이 있다. 왼쪽부터 펀치, 송곳, 실, 철필, 롤러, 잉크, 가위, 제본용 풀, 자, 지우개가 그려져 있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중 한 명인 지로가 만들었다. 관련한 다른 조각들은 환대의 조각들 웹사이트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만 아는 것 같은 이 즐거움을 어떻게 연속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근성’이라는 개념을 다각도로 해석해야 했다. 예를 들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경사로의 각도와 폭과 길이, 참(경사로가 길면 쉬어가는 플랫폼)의 유무 등을 공부하는 동시에 어떤 상황이 누구에게 차별과 배제가 되는지에 대한 감각을 계속 쌓아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동시에, 그 공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서로 차별하지 않는 상태를 가능하면 오래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접근성에 관련된 여러 개념과 조건을 연구하며 동시에 근처의 가게를 섭외하고,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프로젝트 ‘차별없는가게’‘공간학교WWA’를 만들었다.

차별없는가게를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냐고 묻는 이들에게 우리는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가게의 리스트가 필요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차별없는가게’는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신념을 훼손당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며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진 만들기 워크숍에서 시작된 오랜 물음으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차별없는가게의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맞는 가게를 섭외하고 조성한 후에 그곳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이 스스로를 호명할 수 있고 자신이 정한 그 이름을 다른 이가 불러줄 수 있는 그런 곳.

  • 2020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입구에 설치했던 경사로 작업 <천천히 우회하며 오르는 길>의 사진. 낙엽이 깔린 미술관 앞뜰 너머로 거대한 나무 경사로가 있다. 박선민, 최유미, 다이애나랩이 함께 만들었다. 벨기에 영사관이었던 이 건물은 지은 지 116년 되던 지난해 최초로 휠체어 이용자가 입장했다. 내부에는 미디어 작품 <흘러가는 진 퍼레이드> 전시가 있었고, 0set프로젝트와 다이애나랩이 <미술관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라는 주제로 기획한 접근성 워크숍과 포럼이 열렸다. 서울시립서서울미술관 사전 프로그램 <언젠가 누구에게나>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이 작업들은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해체되어 흔적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인식의 전환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남서울미술관에서 엘리베이터와 경사로 공사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꼭 실행되기를 바란다.

너무도 다양해서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끼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들을 수 없고, 누군가는 말할 수 없고, 누군가는 볼 수 없고, 누군가는 또 우리가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조건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각각의 표현이 한데 모여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공통의 목적이나 의무 없이 각자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같이 있을 수 있을까? 다른 이의 표현이 온전히 가능해지는 순간을 서로가 구축하는 것, 구축하려고 한번 해보는 것. 그러기 위해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누고 소리를 나누고 색을 나누고 서로의 알 수 없는 신호를 받아들일 때…. 그런 순간을 상상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어떻게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던 것 같다.

2019년 ‘퍼레이드 진진진’의 마지막은 각자가 자신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행진을 이끌어가는 사람과 참여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의 구분이 희미한 상태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그냥 같이 움직이고 있었던 이상한 퍼레이드. 참여자 전원이 스스로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순간 전체는 더욱 뒤죽박죽 해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뭘 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이 되었다. 남은 것은 각자의 큰 웃음소리와 엄청난 즐거움. 하나의 공통 목적을 나누어 갖지 않고도 우리는 같이 움직일 수 있다. 하나의 명령이나 해야만 하는 당위가 없어도 우리는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가능한 순간들이 실제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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