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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칼럼) 농인·농문화·농예술의 세계_이해와 소통을 넘어, 진정한 협업의 출발점으로
박민수 서대문구수어통역센터장
우리는 흔히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그 소통이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종 놓친다. 농인과 청인의 소통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만나는 과정에서 쉽게 오해와 단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차이는 단순한 장애가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농인과 청인 사이에서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24년 ‘이음 예술창작 아카데미 - 접근성 과정’에서 수어번역 연구모임에 참여하면서, 예술창작 현장에서의 소통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문화적 이해와 협업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느꼈다. 이 글에서는 농인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예술이라는 장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농인 -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공동체
농인은 소리를 중심으로 한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문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청각장애라는 의학적 분류가 존재하지만, 농인의 정체성은 장애 여부보다 ‘수어’라는 언어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수어는 손동작과 표정, 몸짓과 공간 활용을 통해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독립된 언어이며, 이러한 언어적 기반이 농문화와 농예술의 중심을 이룬다. 농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청력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수어를 중심에 둔 문화적 세계를 이해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2. 농문화 - 시각 중심의 공동체적 삶
농문화는 시각과 촉각 중심의 생활양식이 오랜 시간 축적되며 형성되었다. 손을 흔들어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고, 박수 대신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방식은 농인의 일상적인 소통 방법이다. 농인 사회에서는 실명이 아닌 ‘얼굴이름(Name Sign)’을 사용하며, 헤어지기 전 대화가 쉽게 끝나지 않는 ‘롱 굿바이(Long Goodbye)’도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농인이 세상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드러내며, 이는 수어의 표현 방식과 농예술의 창작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3. 농예술 - 수어로 창작되는 시각언어의 세계
농예술은 청인의 소리 중심 예술과는 다른, 시각언어 기반의 독자적 예술 세계이다. 특히 ‘수어 문학’과 ‘수어시(手語詩)’는 번역이 아니라 수어 자체의 구조와 감각에서 탄생한 문학이다. 손의 움직임, 표정, 몸짓, 공간 활용이 서로 어우러져 이미지와 리듬을 구성하며, 비수지 신호(Non-Manual Markers)는 감정의 결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때로는 배경음악 없이 수어의 흐름만으로도 공연이 완성되는데, 이는 소리 없는 예술이 얼마나 깊고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농예술은 청인의 예술을 보조하는 형태가 아니라, 시각언어 고유의 미학을 지닌 독립된 장르이다.
4. 예술 창작 속의 소통과 협업 - 번역을 넘어, 함께 만드는 과정으로
최근 공연예술 현장에서 수어통역사가 무대에 등장하는 연출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배치는 내용 전달 중심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러한 방식에서 한계를 느꼈다. 농인의 언어가 가진 시각적·예술적 구성 요소가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음성언어를 보조하는 통역 방식이 아니라 시각언어 체계를 중심에 둔 창작 방식이 필요하다. 농인 예술가가 기획과 창작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할 때 비로소 번역을 넘어서는 진정한 협업이 가능해지고, 작품의 깊이와 완성도 역시 더해진다. 이는 수어를 예술적 언어로 인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5. 접근권과 농당사자의 참여 - 구조를 바꾸는 일
예술 접근권은 단순히 통역 인력을 배치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대 구성, 카메라 위치와 조명, 화면 구성 방식, 큐시트, 대본, 홍보물의 용어 선택 등 공연의 모든 요소가 수어와 농문화에 맞게 설계될 때 접근권이 보장된다. 무엇보다 농당사자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당사자가 참여하지 않은 채 마련된 접근성은 청인의 기준에서 해석된 ‘대리 접근’에 머물 위험이 있다. 농인이 기획 단계부터 의견을 제시하고 구조를 설계해야만 실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통역 기관 역시 단순히 통역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언어·현장·제도를 함께 변화시키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 농예술인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
∙ 수어 기반 정보 플랫폼 구축과 전문 코디네이터 배치
∙ 농예술인을 위한 전용 창작 지원과 교육·멘토링 프로그램 마련
∙ 공동체 기반 거점 공간과 농예술 단체의 육성
∙ 청인과의 협업 확대, 홍보·유통 체계 강화, 국제교류 지원
∙ 농인의 시각언어 체계를 작품 전반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한 ‘시각 감수 및 언어 교정 시스템’ 도입
이러한 구조적 지원은 단순한 접근성 보장을 넘어, 농문화와 농예술의 고유한 예술적 가치가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나는 농인 당사자로서, 그리고 서대문구수어통역센터장으로서 앞으로도 소통과 접근성이 확장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문화체육관광부와 지방정부가 농예술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관심과 지원을 확대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반이 갖춰질 때 농예술인은 더 다양한 공간에서 창작하고 활동할 수 있을 것이며, 농문화 또한 우리 사회 속에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농인과 청인, 농예술과 소리 중심의 예술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 더 넓은 소통의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길 바란다.

박민수
서대문구수어통역센터장
sdmdeaf0490@daum.net
수어 번역.서대문구수어통역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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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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