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장애예술인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둘러싼 제도적·사회적 인정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는 요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짚어보고, 예술가 되기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지, 인정 체계는 왜 필요한지, 그것을 가로막는 장벽은 무엇인지 이야기 나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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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2026년 3월 10일 오전 10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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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이음센터 이음아트홀
- 좌장.
- 홍은지 공연예술가・이음온라인 기획위원
- 패널.
- 신 재 0set 프로젝트 연출
임일주 배우, 싱어송라이터
좌동엽 장애인문화예술 판 대표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 배우
(앞줄 왼쪽부터) 진성선 배우, 임일주 배우, (뒷줄 왼쪽부터) 홍은지 기획위원, 좌동엽 대표, 신재 연출
홍은지지난해 서울연극협회 신입회원 심사 과정에서 발생한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개선 요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심사 중 연극과 장애연극을 구분하는 방식이 작동하고, 장애연극을 특정 분야로 축소하는 등 연극계가 과연 어떤 가치와 기준으로 작동되는지 되묻게 했다. 오늘은 장애예술 정체성과 예술가 전문성, 인정 체계에 관해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연극·예술이 폐쇄적인 구조 안에 스스로 한계를 만들고 축소되는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예술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연극·예술은 관객, 나아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돌아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진행에 앞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좌동엽장애인문화예술판 대표를 맡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에 교사로 참여한 2002년부터 장애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존감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던 시절인데, 한 학생이 문학의 밤 행사 때 연극 무대에 선 후 달라지는 모습을 본 게 계기가 되었고, 2008년에 극단 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후 장애인문화예술판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지금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임일주저는 중도 장애인이고, 중창단 보컬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공연을 본 한 초등학생이 인터뷰에서, 무대 위의 저를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고 한 영상을 보았다. 내 활동이 장애인 차별을 없애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좀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후 장애인문화예술판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작은 뮤지컬을 제작하고 기획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음악 활동도 열심히 하고 곡도 쓰고 있다.
신재0set(제로셋) 프로젝트라는 팀에서 주로 기획, 연출 역할을 하고 있다. 0set 프로젝트는 2017년에 “극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정답이라기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연극의 형태로 질문하는 작업이었다. 그 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나 관점, 태도, 감각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연극의 형태로 계속 시도하고 있다.
진성선저는 샤르코마리투스라는 희귀 신경질환을 갖고 있고,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에서 연극,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하며 노래를 만들고 활동하고 있다. 제도 안팎을 넘나들며 장애여성이 경험하는 몸의 경험들을 말하고,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해 왔다. 그리고 장애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의 삶이 차별이라는 구조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질문하며 동료들과 함께 풀어가고 있다.
차별은 만연하고 뿌리 깊다
홍은지지난 2025년 9월 서울연극협회 정회원 면접 심사 과정에서 발생했던 차별적인 발언에 대한 문제 제기, 추후 대응 등 일련의 상황이 있었다. 이 사안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좌동엽사실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심하든 심하지 않든, 이런 시각은 이미 만연해 있으니까. 연극인들을 만나다 보면 장애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심사나 자문회의에서도 장애예술을 잘 모른다며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하거나, 당사자와 경험자들의 관점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 장애예술이 확산하면서 관련 경험이 쌓이자, 자신들의 주관적인 기준을 앞세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최근 일반 공모 사업에 장애예술인의 신청이 늘고 있는데, 심사 과정을 보면 ‘장애예술은 이래야 한다’라고 규정짓는 경향이 예전보다 심해졌다. 과거에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심스럽게 자문했다면, 이제는 장애예술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서 현장에서 오래 활동한 비장애 예술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며 장애예술을 기존 예술의 하위로 위계화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연극은 이런 것이니 장애예술도 이래야 한다’라는 식의 기준을 들이미는 거다. 장애예술을 기존 예술보다 부족한 것으로 보고, 키워줘야 하느니 마느니 논하거나, 장애예술이 기존 예술의 담론을 뒤쫓게 만드는 흐름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발언을 했던 분이 협회장이 돼서 이런 태도가 더 견고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최근 장애예술 공모 사업의 선정 경향이 기존 예술 담론에 맞춘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장애예술인들이 장애예술에 많이 들어오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본인의 고정관념으로 장애예술을 판단하고 규정하려는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임일주저는 기존 연극계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데 차별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장애인의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차별이 심각하다. 당장 대학로에서 제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열 군데 중 한 군데밖에 없다. 함께 연극 하는 배우들과 친해지고 싶어도 밥 먹으러 가자는 얘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는 거다. 버스를 타고 싶어도 문제가 생긴다. 인프라가 잘 되어 있다고 하는 서울은 그나마 저상버스 비율이 80%라지만, 100대 중 한 대를 못 타도 차별인데, 나머지 20% 정도는 불편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서울연극협회 심사 과정에서 장애인 연극은 ‘전문 연극’이 아니어서 심사 기준에서 떨어진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전문성’은 누가 판단하는 건가. 게다가 나중에 올라온 해명 글에 보면 심의 기준 자체에 ‘전문 연극’이라는 용어가 없더라. 없는 기준으로 판단한 것은 명백한 차별이고, 모르고 했더라도 나중에 차별 행위였음을 알았으면 그걸 인정해야 하는데,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장애예술인이 분노하는 거다. 우리의 요구에 답변하지 않고 함구하는 것 또한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신재저와 동료들은 평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하는 현실을 문제로 느끼며, 장애예술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왔다. 이번 소식을 접했을 때, 제가 그동안 너무 안전하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고, 주류 예술계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저런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장애예술 작업을 할 때 소위 전문가라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왜 복지나 정치 영역에서 할 이야기를 연극에서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잘 몰라서 실수할까 봐 조심스러워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이번 서울연극협회의 태도 역시 ‘그냥 모르는 채로 있겠다, 굳이 알고 싶지 않다’라는 표현이고 자신들만의 사고 틀에 갇힌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의 장애연극이나 장애예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고 어떤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지, 접근성 관련해서 어떤 실천을 이어가는지 잘 모르는 거다.
사실 이번 사건은 협회가 달라질 좋은 기회였다. 문제 제기를 통해 협회가 기준 없이 심사했다는 점과 장애예술이나 장애연극에 무지하다는 게 드러났을 때, 이를 성찰하고 외연을 확장할 계기로 삼으면 좋았을 텐데, 그 기회를 너무나 하찮게 여긴 것 같아 안타깝다. 또 서울연극협회가 좁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합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말 위험한 것은, 이들이 마치 서울 연극 전체를 대변하는 듯한 이름을 점유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기능을 하는 축제들을 전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극계 밖의 시민들은 협회가 주관하는 축제를 보며 ‘저것이 곧 연극’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장애예술에 차별적인 태도를 가진 기관이 서울 연극 전체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 듯 축제와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성선이번 사안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주류 예술계가 ‘정상성’을 얼마나 공고하게 떠받들고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극단 춤추는허리는 2003년 창단해서 활동해 오면서 여러 변화를 만들어왔지만, 여전히 예술 현장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뭘 모른다는 식의 발언을 듣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단순히 서운함을 토로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장애예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더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장애인자립생활운동에서도 장애를 극복이나 치료라는 ‘의료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맞서, 우리 삶을 가장 잘 아는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저 역시 예술 전문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활동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작업의 본질이나 메시지보다는, “장애가 있는데 이 정도나 해냈네”라는 식으로 평가하곤 한다. 장애인에게만 뭔가를 극복해야 하고 과도한 수행 능력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의도가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동등한 기회에서 배제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차별이다. 장애예술을 ‘좋은 일’ 정도로 치부하며 장애인이 하는 예술을 별도로 구분 짓고, 이를 극복의 과정으로 전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차별적 시선이다.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데도 아무런 변화 없이, 차별했던 당사자가 다시 권력을 쥐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이러한 차별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누가 힘을 보태고 있는지 문제를 명시하고 성찰해야 한다.
임일주 배우
진성선 배우
신재 연출
좌동엽 대표
홍은지 기획위원
장애예술을 향한 제도적·사회적 인정 체계
홍은지많은 예술가는 예술 행위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 예술가 정체성을 가진다. 한편으로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거나 공신력 있는 기관과 협업하며 자신을 입증하려 한다. 혹은 협회에 가입하거나 예술활동증명 같은 제도적 인증 체계를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예술가 자신에게 제도적·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술가 되기’를 실천하고 있는지 얘기 나눠보면 좋겠다.
임일주저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동료 장애예술가들은 접근성의 부재나 차별로 인해 동등한 교육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공식적인 교육 체계를 통해 예술교육을 받기보다는 현장에서 활동을 시작하거나 극단에서 연기 수업을 받고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예술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창작이고, 장애인이 무대 위에서 섰을 때 비장애인이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이 갖지 못하는 몸이 있고, 비장애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떨림이 있다. 하지만 연극계는 이러한 고유의 표현 방식이 어떻게 예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복지 차원으로 생각하니 ‘비전문 예술’이라는 말이 나오고, 장애예술의 산실인 이음센터도 전문 공연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그게 어떻게 차별이 아닌가? 저는 장애예술만의 독특한 미학이 전문성으로 인정받고 더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질 수 있는데, 그걸 가로막는 인식과 제도가 안타깝다. 서울연극협회를 비롯한 주류 예술계는 장애예술을 좀 더 넓게 바라보고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성선저는 중증 장애인으로서 협회 가입이나 예술활동에 필요한 제도적·사회적 인정을 받는 과정이 너무나 까다롭다고 느꼈다. 그 기준 자체를 아예 없애지 않으면 과연 가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다. 자격을 일일이 증명하지 않아도 예술활동에 필요한 자원과 관계를 보장받는 기회가 강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제도라는 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춰야만 하는 게 비단 장애예술인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가 겪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이동할 수 없는 몸’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현재의 권리중심 일자리나 최저임금 적용 제외 같은 정책들은 여전히 ‘보호’라는, 시혜적으로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습을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고, 활동지원사의 시간과 이동 시간을 조율하며 현장에 나오는 그 지난한 과정들이 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이제는 단편적인 자격을 부여받는 수준을 넘어, 예술활동이 사회적 노동으로서 어떻게 책임 있게 인정받고 그에 따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 더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좌동엽대학 시절 의료 동아리 활동을 할 때 선배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약을 어설프게 알 때가 환자에게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라던. 이번 서울연극협회 사건도 장애예술을 기존 예술의 기준으로 통제하려는 ‘어설픈 시각’이 낳은 부작용이라고 본다. 2009년쯤에 저 역시 대학로의 문을 두드렸으나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큰 극장을 대관하고 무리하게 자부담을 들여 소위 ‘연극 같은 연극’을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연극계의 인식은 실망스러웠다. 장애인 극단 휠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 소극장에 배정되었을 때, 심사위원들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되지 않냐’라고 하는 거다. 결국 극단 휠은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장애예술단체는 교육이나 복지 분야보다 훨씬 열악하다. 사회적 지원 체계가 부족하다 보니 공모 사업이나 지원금에 의존하게 되고, 그 체계가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게 된다. 기존 예술계는 자원(돈)을 매개로 장애예술을 자신들의 하위 영역으로 위치시키려 하는데, 저는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느낀다. 장애예술은 인간의 본질과 ‘정상성’에 질문을 던지는 무궁무진한 실험의 장이고, 기존 예술이 닿지 못하는 영역에 도전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제도가 요구하는 기존의 형식과 ‘있어 보이는’ 연극에 계속 끌려다니다 보니 장애예술만의 고유한 방향성이 훼손되고 있다. 이제는 장애 유형별 독창성을 실험하고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전문성’으로 인정받는 심사와 기획이 필요하다. 장애예술 영역에 들어온 주류 예술계 역시, 자신들의 차별적인 시선과 편견을 먼저 바꿔야 한다.
신재저도 언젠가부터 극장 공연을 잘 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이야기가 일어나는 곳,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함께하는 창작자나 관객의 접근이 쉬운 곳에서 공연하려다 보니, 주로 극장 바깥에서 하게 된다. 극장이라는 환경에서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도 분명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접근성의 한계가 있고 정형화된 극장이 주는 답답함도 있다.
지원 체계 혹은 인정 체계에 대해서는, 다들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로 지원이나 예산이 없으면 공연을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지원이나 예산 분배 권한을 쥐고 있는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나도 예술한다”라고 인정받겠다거나, 어떤 기준 안에 “너도 들어올 수 있게 포용해 줄게” 같은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존재한다는 것, 이 사회에 나도 한 명의 구성원이고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인 거다. 물론 기득권이나 권한을 쥔 이들이 만든 ‘판’에 들어가지 않고 아웃사이더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 판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관객과 자원이 분명히 있기에 ‘안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판 안에서 우리가 예술가로 인정받는 방식이다. 예술활동증명만 하더라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심의가 이전과는 달라졌다. 이제는 포스터나 홍보물, 영상 같은 활동 기록으로는 증빙이 안 되고 ‘계약서’라는 행정적 서류로 증빙해야 한다. 예술활동증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행정 절차상의 편의 혹은 한계가 분명히 있겠지만,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증명하기 어려운 모호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것들의 의미를 읽기보다는, 행정 편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예술은 본래 증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내가 하는 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내가 예술인인지 아닌지, 모호한 영역 속에 머물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지난한 과정’ 자체가 예술활동의 의미 아닐까?
진성선저는 장애예술가들이 마음껏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끊임없이 요구해 온 입장에서, 모두예술극장이 제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단차 없는 구조, 층별 장애인 화장실, 연습실과 분장실 등 공연에 필요한 접근성을 고려했다는 것을 느낀다. 가족 화장실에는 신변 처리를 위한 베드도 있고 변기 옆 안전 손잡이가 갖춰져 있어 전반적으로 잘 준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내렸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에서, 곳곳에 설치된 SOS 버튼이 너무 쉽게 눌리는 경험을 했다. 완벽히 세팅된 공간과 경험 사이에 간극이 존재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완벽한 공간 자체가 어쩌면 또 하나의 ‘전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세팅된 공간에서 단순히 공연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그 공간에 대해 얼마나 의견을 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느냐에 있다. 공간을 만들었으니 장애인의 예술 권리를 보장했다 끝낼 일이 아니다. 여전히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각자의 몸과 조건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경험되는지, 누가 정말 주인이 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임일주처음부터 물리적으로 완벽한 것도 중요하지만, 부족한 것이 분명히 있을 수 있고, 장애 유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불편함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불편하다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이 열려야 변화할 수 있는 건데. 서울연극협회는 아예 우리의 얘기 자체를 막아버리고 들을 생각조차 안 하는 것 같다. 장애예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변화를 간과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뀌면 되는데, 그 자체를 안 하는 거다.
편견에 맞서는 정체성과 전문성
홍은지지금까지 우리가 느끼는 인정, 인정 체계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사회나 외부의 시선 말고, 어느 때 자신이 예술가라고 느끼고 예술가 정체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지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좌동엽지금이 장애예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인·비장애인을 불문하고 장애예술을 직접 실천하는 예술가들이 제대로 존중받는 문화를 만드는 거다. 이를테면, 어설픈 경험을 토대로 함부로 규정하고 기준을 만들지 않도록, 심사위원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 현대 미술에서 변기를 전시하고 바나나를 벽에 붙여도 예술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선언하는 예술가의 정체성과 관점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는 연극배우다”, “이것은 예술이다”라고 명명했을 때, 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편견에 찬 잣대를 들이대며 기준점을 세우고 틀에 가두려 하나. 결국 장애예술은 외부의 시선에 규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체성을 세우고 ‘이것이 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편견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청각장애인 교회에 간 적이 있는데,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청각장애인들의 찬송 소리가 괴성처럼 들려 듣기 싫다고 느꼈던, 소리에 대한 저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예술의 ‘완결성’에 대한 강박이 있다. TV에 나오는 것처럼 몸짓은 고와야 하고, 소리는 매끈하게 완결되어야 한다는 선입견 말이다. 하지만 장애예술의 확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게 연극이야, 여기도 극장이 될 수 있어”라고 당당히 말할 때, 중증 장애인의 거친 숨소리나 불규칙한 움직임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때, 선입견과 편견이 사라지고 장애예술이 확장된다. 그럴 때 장애인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진다. 중요한 것은 주체성과 의도다. 장애예술인 스스로 자신의 움직임을 예술로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기준을 세우고 규정하려는 시도는 장애예술의 자양분을 훼손할 뿐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이 ‘이쪽 길로 가야 한다’며 끌고 가는 것은 장애예술을 기존 예술의 하위 위계에 종속시키는 일이다. 이름을 본인이 정한 대로 불러주어야 하듯, 누군가 스스로 예술가라 정의한다면 사회는 그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장애예술의 전문성은 외부의 심사가 아니라, 주체적인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선언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일주앞서 말씀드렸지만, 장애예술인 중 상당수가 전통적인 교육 체계 바깥에서 활동하다 보니, 1년에 서너 편씩 무대에 오르면서도 정작 “나는 예술인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예술은 비장애 중심의 미학이 닿지 못하는 고유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들이 “진짜 연극은 이래야 한다”고 정의해버리는 순간, 장애예술의 가치는 무시된다. 휠체어를 타거나 흔들리는 움직임을 ‘비정상’이라거나 ‘치료 대상’으로만 보는 비장애중심주의 시선 때문이다. 그 동작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예술 언어가 될 수 있는지는 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소위 전문가와 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예술이 가진 독창성을 복지나 시혜의 차원이 아닌,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이라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당사자들도 자신이 예술가이고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정체성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진성선저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로 시작하다가 극단 춤추는허리 배우로 활동하면서, 초반에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예술가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 같은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을 깨뜨려 나가는 과정이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예술이란 개인의 뛰어난 기량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공연할 때마다, 매번 왜 하는지를 끈질기게 되묻는다. 최근에 장애와 몸에 대해 집중해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장애를 어떻게 드러내고 얘기할 것인가라는 화두는 결국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장애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취약하거나 눈치 보거나 위축되었던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저나 극단 춤추는허리 배우들은 일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감각을 다르게 보여주고 싶고, 좀 더 단단하게 주도성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 주도성이 혼자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뇌병변장애 여성 배우가 가진 고유한 움직임이 어떤 의미인지, 발달장애 여성이 대사를 외우고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몸들을 서로가 읽어주고 해석하지 않으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얘기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질문하고 같이 얘기하는 동료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는 장애에 관해 어떻게 다르게 보여줄지, 이 과정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얘기하는 게 재미있고, 이 재미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창작의 과정을 함께 겪으며 만들어가는 시간이 즐겁다. 그 시간을 통과하며 변해가는 제 모습에 집중하게 되고, 서로의 존재를 반추하며 ‘정상성’이라는 강박을 깨는 치열한 연습 과정 자체가 소중한 성취다.
신재저 역시 재미있어서 이 일을 한다. 물론 그 재미 안에는 관계를 잘 맺어가고 서로에게 개입하거나, 혹은 너무 개입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나 지난함 같은 것도 포함된다. 의무감으로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표현 방식으로 할 건지, 우리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 건지 함께 정하거나 연습해 가는 과정, 만나야만 느낄 수 있는 재미와 경험, 성찰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남이 과정은 지난하지만, 그것을 더 나누기 위한 시도로서 연극을 통해서 관객들을 만나는 것 같다.
우리가 예술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전문성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는 결국 ‘한정된 예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행정과 정책의 언어는 한정된 자원을 나누기 위해 “우리가 왜 당신을 지원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행정적 필요에 의한 구분을 예술의 본질과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딱딱한 행정 언어로는 “내가 정말 예술을 하고 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같은 본질과 우리가 현장에서 실천하는 생생한 활동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창작 영역에서만큼은 내가 예술인인지, 전문성이 있는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대신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그 과정을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가 훨씬 더 실질적이고 중요하다. 우리가 예술인인지 묻기보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그 목소리를 경청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나? 사실 “이것이 예술인가, 전문적인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자기 기준 자체를 의심해 봐야 한다. 예술적 기준은 본질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해 온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 좁은 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제는 낡은 기준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궁금해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단순히 기존 예술의 틈바구니에 장애예술을 끼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애예술은 기존 예술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보여주고 그 기준을 무너뜨리는 질문과 힘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견고한 틀을 해체하는 역동적인 관점으로 장애예술을 재미있게 사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극장 구석에 휠체어석 두 자리를 놓는다고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듯, 말로만 장애예술을 인정한다고 해서 예술계가 변하지는 않는다. 서울연극협회는 지금 변화의 지점에 서 있다. 고정관념에 기대어 ‘안 하기’를 선택하는 쉬운 길 대신, 불편하고 복잡하더라도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지금 협회는 경제적 조합주의처럼 보인다. 비영리 사단법인으로서 소수의 이익만을 지키는 좁은 조직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사회적 전제 조건을 가진 집단인 만큼,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좌동엽예술가 정체성, 장애예술의 전문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지난한 과정’이라는 말이 계속 맴돈다. 중증 장애인에게 이 사회는 일상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와 몸짓만을 허락한다.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전동휠체어를 조작하거나 밥을 먹기 위한 동작까지만 ‘의미’ 있고, 그 밖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된다. 본인도 그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영역에서는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자신의 소리나 몸짓이 해방의 과정일 수도 있다. 연극에 참여한 한 중증 장애인은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지 몰랐어요”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불필요한 동작이었는데 예술 영역에서 의도성을 가지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무대에서 보여주고 자신감을 얻었을 때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 자기해방 같은 것을 느꼈을 거다. 이러한 예술적 경험은, 이전에는 부끄럽거나 부족하다고 느꼈던 자기 신체와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게 만든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예술가로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사를 외워 무대에 서는 행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애인 본인의 특성과 고유성에 맞게 창작하고 만들어가는 상호작용, 관객과 만나는 ‘과정’인 거다. 장애예술이 이렇게 성장할 때, 사회가 규정하는 낡은 전문성이 아닌 고유성과 정체성에 기반한 장애예술가만의 전문성이 있지 않을까. 배리어프리 역시 마찬가지다. 꼭 많은 예산을 투여한 장애인 접근성이 아니라, 당사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깊은 관심과 고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접근성을 만드는 전문성이다. 장애예술에는 그런 지난한 과정들이 있고, 보이지 않는 독특함과 고유성, 주체성이 분명히 발현되지 않을까.
임일주예술과 장애예술은 시작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수많은 연극제나 뮤직 페스티벌 공모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애예술인은 지원서를 쓰기 전부터 고민에 빠진다. 만약 내가 선정되더라도 공연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개인적인 상황보다 물리적인 환경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다. 접근성은 예술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다. 만약 모든 공연장과 공모 사업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따로 존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특정 공간에서만 공연이 가능한 현실은 장애예술인을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과 같다. 장애인이 버스에 탈 수 없고 극장 객석에 다가가지 못하고 무대에 설 수 없는 것은 심각한 차별이다. 100개 중 한두 개만 없다고 차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접근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연극 활동을 해왔다. 이번에 서울연극협회로부터 “전문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부정당한 작품에도 출연했다. 그래서 주위에서 저를 보고 “비전문 예술인 오셨네”라고 농을 한다. 10년의 세월이 단 한마디에 부정당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환경이 갖춰져야 소위 전문가들이 말하는 ‘전문적 기준’이 세워질 수 있지 않을까.
진성선제도 안에서 행정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예산을 내려주고 그것을 잘 쓰는지 감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자연스럽게 행정 실무를 감당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정도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비장애인에게도 벅찬 행정 업무가 장애인에게는 더 큰 진입 장벽이 되고, 중증 장애인 당사자는 아예 시도할 기회조차 없다. 우리의 예술활동이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자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를 평가하고 얘기하는 게 정말 중요한데, 사실 장애예술가들이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협회가 이러한 활동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장애 당사자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공유하는 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앞으로 더 많은 장애여성이 시설이나 집이 아닌 연습실에 나와 서로의 몸을 만나고, 무대에서 공연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빈말 말고, 앞으로 가자
홍은지결국 사회적인 인정 체계라는 것은 한정된 상황과 기회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의 문제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권한과 자격은 무엇인지, 누가 예술을 정의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사회를 지탱하는 공적 자금을 배분하고 관리·감독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으로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 정체성을 평가하지는 말자는 말씀도 해주셨다. 예술가와 예술 생태계를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좌동엽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장애예술이 많이 성장해 온 것 같다. 장애예술인지원법 TF에 참여했을 당시, 모두가 전용 극장을 반대하는데도 정부는 무리하게 추진했다. 물론 2000년대 초반에 저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애예술을 올릴 공연장이 전무했으니까. 그러나 긴 세월 동안 전용 극장이 만들어지지 않다가 몇 년 전에야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거대한 전용 공간 하나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예산을 나누어 지원했다면, 구마다 하나씩은 장애인 접근성이 확보된 공연장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제는 지역 공간이 열리기를 바란다. 장애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기준을 만들고 정책에 관여하고 예산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현 상황이 우려스럽다. 오히려 지금은 장애예술 신에서 발현되고 있는 도전과 실험을 더 지원하고 조명해 주면 좋겠다. 비장애인의 연극을 흉내 내거나 쫓아가기보다는 장애예술만의 독창적인 시도를 이어가는 중요한 과도기에 서 있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 기존 예술의 문법을 모방하는 구조로 퇴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임일주많은 사람이 예술활동을 하고 있으니 인정 체계는 필요하지만, 적어도 예술 안에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야 한다. 장애예술로 기존 예술의 견고한 체제를 깰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마음을 열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야기하면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알려고 하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장애예술이 더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은 대화와 교감이 필요하다.
신재서울연극협회는 안정적인 공공 재원으로 매년 다양한 축제와 행사를 하고 있다. 이는 서울연극협회가 연극 생태계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엄청난 권한이다. 협회가 표방하는 것처럼 ‘시대를 비추는 거울,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창, 다름을 이해하고 깊이 있는 관계를 고민하는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질문할 시점인 것 같다. 그래서 빠르게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알아가고 돌아보면서, 말 그대로 시대에 관한 질문을 품고 연극계의 미래에 대한 실천과 고민을 담는 기관이자 축제를 만들어가는 곳이 되면 좋겠다. 우리가 이야기한 이 재미있는 세계로 들어오면 좋겠다, 입장시켜 줄 테니.
진성선함께 대응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 다행이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장애예술에 대해 계속 주목하고, 장애예술을 실적으로만 치부하는 제도의 문제를 비판하고 토론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장애예술을 이야기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따라붙는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한다’라는 수사는 이제 안 썼으면 좋겠다. 이 말 자체가 장애인을 동정하는 차별적인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정으로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말의 무게와 책임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제대로 사과하고 책임 있게 해결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홍은지‘다름의 인정’이라는 말이 처음 의도와 달리 오염되고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삶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를 함께 찾아가고자 할 때, 예술 안에서 우리는 함께하고 있는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는가, 이런 여러 질문을 상호 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보는 시간이었다. 긴 시간 함께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좌동엽 대표, 홍은지 기획위원, 진성선 배우, 신재 연출, 임일주 배우

신재
0set 프로젝트 연출. 하고 싶은 이야기, 들어야 할 말을 품고 있는 사람-존재들과 함께 있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2017년부터 프로젝트 형식으로 조사, 워크숍, 공연제작 등을 하는 ‘0set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출작으로 〈연극의 3요소〉, 〈배우에 관한 역설〉, 〈나는 인간〉, 〈연극연습-배우는 사람〉, 〈관람모드-만나는 방식〉, 〈관람모드-있는 방식〉, 〈다음 이야기-장소〉, 〈등장인물〉, 〈일+일+일=삶〉, 〈작은 갑옷을 입은 기사와 왕국 없는 왕 그리고 뿌리 없는 나무의 모험〉 등이 있다.
footlooseyou@gmail.com

임일주
배우,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가수의 꿈을 키우던 24세 때 군 휴가 중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2012년 장애인 중창단 ‘뉴크리에이션’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2014년 창작 뮤지컬 〈프랜즈〉로 연기에 데뷔했다. 《자각몽》(2018), 《시선》(2019), 《노래가 쓰여지는 순간》(2020) 등 3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연극 〈숨 쉬는 바닷말〉 〈똥 싸러 가는 길〉 〈란, 태수야〉, 뮤지컬 〈버스, 넌 뭐니!〉(시즌 1, 2) 등에 출연했다.
tonghouse@naver.com

좌동엽
장애인문화예술판 대표. 극작, 연출, 제작 등의 작업을 한다. 에바다복지회 사무국장, 시민연대회의에 이어 2002년부터 노들야학 교사로 활동했고, 연극동아리를 전담하게 되면서 2008년 장애인극단 판을 창단했다. 2015년 개관한 성북마을극장을 주 무대로 삼아 장애여성 등 장애인의 자립과 문화예술권리 증진을 위한 공연, 낭독극,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주요 공연 작품으로 〈오즈에는 마법사가 산다〉, 〈가제_A는 초코빽스치노를 마신다〉, 〈연분홍 치마〉, 〈숨쉬는 바닷말〉, 〈도와줘요, 엔피씨!〉, 〈공상의 뇌〉, 〈춤추는 립스틱〉 등이 있다. 워크숍 결과전 《몸의 미학: 현존하는 몸, 살아있는 아름다움》 등도 개최했다.
jwa-1@hanmail.net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극단 춤추는허리 배우, 기획자, 무대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한다. 신체극과 공연을 통해 장애여성의 경험과 몸을 드러낸다. 문화예술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믿으며 동료들과 일상을 지켜간다. 매일 조금씩 실패를 연습해간다. 공저로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2021)가 있다. 주요 출연작으로 〈빛나는〉(2022), 〈몸이동〉(2024), 〈퇴장하는 등장 2〉(2025), 〈주렁주렁 치렁치렁〉(2025) 등이 있다.
wdc214@gmail.com

홍은지
공연예술연출. 전환의 계기로 작동하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창작방식을 고안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공연예술 연출가.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신촌문화발전소 등에서 일했고, 얼라이브아츠 코모(alivearts como)에서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와 함께 〈팰름시스트〉, 〈벙어리시인〉, 〈카페더로스트〉 등을 연출했다. 이음온라인 6기 기획위원이다.
eufy6542@hanmail.com
정리.최순화 프로젝트 궁리 PD suna.choe@gmail.com
사진.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2026년 3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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