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웹진 이음

극단 다빈나오 <가족>

리뷰 좁혀야 할 거리, 다가서는 용기

  • 권순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등록일 2020-10-28
  • 조회수499

리뷰

극단 다빈나오 <가족>

좁혀야 할 거리, 다가서는 용기

권순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그냥 보여주고 싶어요. 숨고 피하는 거 하지 말아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준영’이 엄마에게 하는 말이다. 또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엄마에게는 설득의 말이고 자신에게는 다짐의 말이다. 함께 용기를 내자는 이 말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이 평범하지 않은 까닭은 그 속에 사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준영은 엄마의 품을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가 준영을 만지지 못하게 한 탓이다. 아기 때부터 엄마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생긴 둘 사이의 거리는 지금까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할머니의 접근금지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준영은 그런 엄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지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그 거리는 그렇게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지금 준영은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산다. 고등학생이 된 준영은 여전히 엄마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엄마도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준영은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 엄마도 그런 준영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극단 다빈나오의 뮤직드라마 <가족>의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다. 아니다. 여기에 다음의 조건을 더해야 한다. 준영은 비장애인이다. 엄마는 시각 장애를, 할머니는 뇌병변 장애를 가졌다. 장애인 가족에서 태어난 준영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뿐인가. 아들을 품어줄 수 없었던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할머니의 속도 까맣게 숯덩이가 되었을 터다. 그러던 어느 날, 준영의 학교에서 편지가 도착한다. 준영이 사고를 친 것으로 오해한 가족 앞에서 준영은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집을 나간다.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편지 내용을 뒤늦게 확인한 가족들이 대책회의를 열고 봉사활동을 대신하기로 한다. 학교에서 온 편지가 아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엄마와 할머니뿐만 아니라 고모할머니, 삼촌까지 그 대열에 합류한다.

이제 이 연극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겠다. 결말을 향해가는 <가족>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저마다 가진 제약과 한계를 유머로 뛰어넘거나 처연한 노래로 풀어낸다. 한글을 몰라 편지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할머니는 한글 공부를 시작해 이제 각종 고지서를 직접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악보 없이 <옹헤야>를 불러야 했던 엄마는 피아노 연주를 하며 준영과 화해한다.

엄마의 피아노 연주를 보며 준영은 마음을 연다. “나, 못 만지는 거야? 할머니 때문에 못 만졌던 거야?” “겁쟁이, 겁쟁이 우리 엄마.” 엄마도 준영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다가선 엄마 앞에서 준영이 말한다. “나, 춤 잘 추는지 몰랐지. 볼래?” 준영이 엄마 앞에서 춤춘다. 그 모습을 엄마는 오랫동안 바라본다.

<가족>은 한 가족의 화해를 다루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가족>은 용기를 다루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힘겨운 일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의 세계에 스스로를 고립하지 않고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닌 취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나약은 의지 없음의 상태이다. 그 시간은 현재의 조건에 짓눌린 채 수동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이다.

반면 취약은 자기 의지로 선택함의 상태이다. 그 시간은 현재의 조건에 짓눌리지 않은 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현재 자신의 존재가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족하고 불완전한 자신 스스로 자기 삶을 기획하고 자기 삶을 살아가기로 실천하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을 그렇게 풀이했다. “우리는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혹은 그것이 지닌 어떤 객관적 가치 때문에 장애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으로서 그와 같은 속성들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뮤직드라마 <가족>에 대해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이 공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배우의 동선과 등·퇴장 장면을 보면 그들이 함께한 시간의 두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족>

극단 다빈나오, 2020.9.4.~9.6.,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고등학교 2학년 준영은 장애를 가진 가족과 살아가고 있는 비장애인이다. 묘하게 가족 안에 섞이지 못하는 갈등 속에서 그동안 서로 감추고 숨겨왔던 상처와 아픔이 드러난다. 극단 다빈나오는 장애와 비장애, 보호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연극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는 공연창작집단이다. 뮤직드라마 <가족>은 극단 다빈나오 단원들이 함께 쓰고 김지원 연출이 각색했다.

권순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시민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경인일보에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칼럼을 쓰고 있다.
kwonsd@khu.ac.kr

사진제공. 극단 다빈나오

2020년 10월 (14호)

상세내용

리뷰

극단 다빈나오 <가족>

좁혀야 할 거리, 다가서는 용기

권순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그냥 보여주고 싶어요. 숨고 피하는 거 하지 말아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준영’이 엄마에게 하는 말이다. 또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엄마에게는 설득의 말이고 자신에게는 다짐의 말이다. 함께 용기를 내자는 이 말이, 그저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이 평범하지 않은 까닭은 그 속에 사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준영은 엄마의 품을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가 준영을 만지지 못하게 한 탓이다. 아기 때부터 엄마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생긴 둘 사이의 거리는 지금까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할머니의 접근금지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준영은 그런 엄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지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그 거리는 그렇게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지금 준영은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산다. 고등학생이 된 준영은 여전히 엄마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엄마도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준영은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 엄마도 그런 준영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극단 다빈나오의 뮤직드라마 <가족>의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다. 아니다. 여기에 다음의 조건을 더해야 한다. 준영은 비장애인이다. 엄마는 시각 장애를, 할머니는 뇌병변 장애를 가졌다. 장애인 가족에서 태어난 준영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뿐인가. 아들을 품어줄 수 없었던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할머니의 속도 까맣게 숯덩이가 되었을 터다. 그러던 어느 날, 준영의 학교에서 편지가 도착한다. 준영이 사고를 친 것으로 오해한 가족 앞에서 준영은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집을 나간다.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편지 내용을 뒤늦게 확인한 가족들이 대책회의를 열고 봉사활동을 대신하기로 한다. 학교에서 온 편지가 아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들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엄마와 할머니뿐만 아니라 고모할머니, 삼촌까지 그 대열에 합류한다.

이제 이 연극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겠다. 결말을 향해가는 <가족>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저마다 가진 제약과 한계를 유머로 뛰어넘거나 처연한 노래로 풀어낸다. 한글을 몰라 편지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할머니는 한글 공부를 시작해 이제 각종 고지서를 직접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악보 없이 <옹헤야>를 불러야 했던 엄마는 피아노 연주를 하며 준영과 화해한다.

엄마의 피아노 연주를 보며 준영은 마음을 연다. “나, 못 만지는 거야? 할머니 때문에 못 만졌던 거야?” “겁쟁이, 겁쟁이 우리 엄마.” 엄마도 준영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다가선 엄마 앞에서 준영이 말한다. “나, 춤 잘 추는지 몰랐지. 볼래?” 준영이 엄마 앞에서 춤춘다. 그 모습을 엄마는 오랫동안 바라본다.

<가족>은 한 가족의 화해를 다루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가족>은 용기를 다루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힘겨운 일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의 세계에 스스로를 고립하지 않고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닌 취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나약은 의지 없음의 상태이다. 그 시간은 현재의 조건에 짓눌린 채 수동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이다.

반면 취약은 자기 의지로 선택함의 상태이다. 그 시간은 현재의 조건에 짓눌리지 않은 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다. 현재 자신의 존재가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족하고 불완전한 자신 스스로 자기 삶을 기획하고 자기 삶을 살아가기로 실천하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을 그렇게 풀이했다. “우리는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혹은 그것이 지닌 어떤 객관적 가치 때문에 장애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으로서 그와 같은 속성들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뮤직드라마 <가족>에 대해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이 공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배우의 동선과 등·퇴장 장면을 보면 그들이 함께한 시간의 두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족>

극단 다빈나오, 2020.9.4.~9.6., 이음센터 이음아트홀

고등학교 2학년 준영은 장애를 가진 가족과 살아가고 있는 비장애인이다. 묘하게 가족 안에 섞이지 못하는 갈등 속에서 그동안 서로 감추고 숨겨왔던 상처와 아픔이 드러난다. 극단 다빈나오는 장애와 비장애, 보호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연극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는 공연창작집단이다. 뮤직드라마 <가족>은 극단 다빈나오 단원들이 함께 쓰고 김지원 연출이 각색했다.

권순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시민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경인일보에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칼럼을 쓰고 있다.
kwonsd@khu.ac.kr

사진제공. 극단 다빈나오

2020년 10월 (14호)

댓글 남기기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