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웹진 이음

꿈꾸는 베프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

리뷰 득상망시, 이미지를 얻었다면 보는 것은 잊어라

  • 김남수 안무비평가
  • 등록일 2018-12-26
  • 조회수287

“더 풀(The Fool) 카드가 나왔네요. 이 카드 속의 바보는 아주 순수하게 랄랄라 춤추듯 걷고 있는 모습이에요.”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저의 마음의 눈에는 바보가 태양이 내리쪼이는 샛노란 세상 속에서 춤추는 걸음으로 나아가려는 찰나가 보여요. 물론 그 찰나지간은 극히 아찔하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이 괴나리봇짐을 진 바보의 발아래로 한 걸음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하는 절벽산책 저 너머로 산이 있는데, 그 산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보여요.”
“아니, 어떻게 이런 시각적인 해석이 가능하지요? 당신은 노란색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이미지는 합성되는 거예요. 이야기는 타로 카드 속에 자리 잡은 요소들을 엮어주면서 저에게도 저 안에서 또 다른 눈을 갖게 하지요.”

부산 양정상가 지하 1층의 소위 비밀기지에서 진행된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꿈꾸는 베프 주최/주관)에서 가장 주목된 것은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가 일반 관람객들에게 타로점을 보는 행사였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것이 점복 중에서도 가장 시각성이 강한 것이 타로인데, 어떻게 시각장애인들이 이 카드점을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그것도 시각적 잔상과 기억이 남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닌가. 후천적 시각장애인은 가능하다고 해도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과연 그들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어떤 감각적 꿈틀거림과 그 작동에 의한 이미지 읽기를 들려줄 것인가. 나아가 역설적으로 시각장애인만의 새롭게 낯선 이야기가 더해질 것인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사실 이 지하 비밀기지 — 주최 측은 만화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비밀기지를 꿈꾼 것일까? — 를 찾아갔을 때는 의구심 반 기대감 반이었다. 그런데 이 진기하고 발랄한 행사에 앞서서 블랙하우스 속에서 시각장애인과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어둠 체험을 먼저 겪었다.

“안경을 벗으시고 신발을 갈아신으세요. 그리고 어둠이 매우 짙으니까 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세요.”

어느 SF 작가가 던진 것 같은데, 어둠이란 빛이 달려가는 길 아닌 길이기 때문에 빛보다 더 빠르다는 말이 있다. 어둠은 있기만 하는데, 그 빛보다 빠른 속도 속에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적이라고 할까. 소위 ‘어둠의 속도’가 작동하는 공간, 짙은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지시대로 사물을 만져보는 동안 드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인형인가요? 맞습니다. 그럼 이것은 또 무엇인가요. 음.. 화분과 식물 같은데요. 잘 맞추셨어요.

마치 적외선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안내자는 갑자기 시각장애인과 같은 조건이 된 비장애인, 어둠 속에서 자기 발밑조차 가늠하기 힘든 관람객을 안내하며, 이것저것 사물을 터치하게 시켰다. 어쩌면 이 터치감, 촉감이야말로 시각장애인이 이 세상을 읽는 감각의 촉수로서 너무 저평가되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이 촉각적 접촉이 불온시 되기 때문에 점점 더 피부자아의 소통능력이 감퇴하고 그 감퇴한 결과 때문에 다시 촉각적 욕구를 요청하면서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더듬거리는 피부-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보는 피부’라고 할까.

과거 1980년대 민중미술의 태동기에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집단이 전시회를 가지려고 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전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낮은 조도의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작품을 만지는 원초적인 전시는 그야말로 아방가르드가 아닌가. 그때의 어둠은 시대의 어둠이었다면, 지금 이 비밀기지의 어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의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시대정신이 점차 여성, 장애인, 소수자 쪽으로 이동해가는 전환기에 서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몽상이 벌레처럼 꿈틀대기 마련이다. 밖으로 나와서 시각장애인들의 소통매체인 점자로 글을 쓰는 체험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글을 쓴다기보다는 글을 누른다고 해야겠다. 이 점자는 표면연구가 전제되어 있었다. 즉 쓸 때는 종이 표면을 눌러서 오목한 홈을 만들고, 읽을 때는 뒤집어서 볼록한 돌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보는 피부’가 갖는 감각은 이중적이었고, 이런 면이 타로점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너무 지나치게 앞서간 것일지 모른다. 좌우간 필자는 막 태어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점자로 남기는 시도를 통해 나름의 성취감을 남몰래 맛보았다. 아기를 안는 피부접촉과 점자를 더듬는 피부접촉 사이의 연결이라고 할까. 더듬는다는 불온한 감각이 다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바보의 표정을 보세요. 저 바보는 긍정적이고 신나하지요. 그러나 봄의 햇살이 여름의 볕으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기에 서 있는 거예요. 여름은 고난이지요. 그러니 걸음을 내디디려고 할수록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의 뒤, 혹은 옆에는 하얀 개 한 마리가 있어요. 그 개의 표정은 역시나 바보에게 감응된 듯 다소 밝아요. 동반자나 친구라고 타로 카드에서는 말하지요. 동시에 이 개는 갑자기 나타나 바보를 적대하면서 컹컹 짖는 것일지도 몰라요. 또는 저 앞에 벼랑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컹컹 짖는 것일지도.”
“그렇게 개를 생각하면, 너무 이미지가 현란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시다발적이라면 바보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타로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요. 위기인가 하면 찬스라는 말 있잖아요. 위협인가 싶으면 조언이었고. 친구인가 싶으면 적이기도 하고. 이러한 양면성을 느끼는 것이 타로의 매력이자 깊이일 거예요. 바보는 이러한 양면성의 칼날 위를 걷는 것이죠.”
“아하, 사실 저는 타로 카드 뽑으면 자주 이 더 풀(The Fool) 카드가 나오곤 하거든요. 그런데 들은 중에 가장 좋은 카드점을 들려주셨어요. 저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변동이 심한 점복을 믿을 만하다고 보거든요.”

동아시아에는 이미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득의망상(得意妄想), 즉 “의미를 얻었으면 이미지를 잊어라”라는 말일 것이다. 의미라는 핵심에 에둘러 가지 않고 곧바로 쳐들어가라는 직절(直截)적인 타입인데, 그 덕분에 이미지의 억압이 있었다. 이미지의 억압은 판타지의 억압이기도 하다. 그 억압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것, 거기에 시각장애인의 ‘보는 피부’로 터치하는 읽기는 어떨까. 이름하여 득상망시(得想妄視), 즉 “(풍부한) 이미지를 얻었다면 눈으로 보기는 잊어라”라고. 비단 타로 카드만이 아니다. 드라마의 세계가 됐든 고전의 세계가 됐든 읽으면서 이해하는 촉각적 접근의 요체라고 할까.

부산 양정상가 지하 비밀기지에서는 크고 묵직한 몽상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치 유령들과 도깨비들이 그 어둠을 틈타서 무의식의 언어로 건드리듯이. 타로 카드는 그 정점을 찍었다.

타로는 서양에서는 13세기부터 집시 점이나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연관하여 저 아래 잠복하여 있는 기예였지만, 단순히 점복으로만 보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 타로는 카드의 그림 자체와 그림 속에 구성된 코드를 읽는 매력으로 어필하여 어느덧 곁을 내준 상태이다. 포스트모던이 유행하던 시기에 타로가 유행한 것은 근대라는 암흑기의 정체가 계몽주의 서치라이트여서 너무 밝은 이성의 서치라이트 불빛 아래 모든 것이 백안시되었던 조건에서 벗어나면서부터가 아닐까.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손이 이끄는 대로 산책하다 보니, 시각장애인들이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신체 내부의 작은 불빛들을 느꼈고 그것이 점자 체험을 거쳐서 타로 카드로 이어진다는, 다소 말도 안 되는 느낌적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시각장애인들의 타로 카드라는 효모가 들어간 촉각적이며 시각적인 소통 방식에는 큰 하자가 없다. 오히려 처음의 의구심이 해소되었다고 할까. 어둠의 레이어 그 안쪽에 도사린 반딧불이 같은 비합리성, 무의식 같은 삶의 양식이 겁에 하얗게 질린 채 얼어있던 내 안의 아이를 다시 불러낸다고 할까. 또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왼쪽부터)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 블랙하우스 입구, 점자 체험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

꿈꾸는 베프, 2018.10.21.~10.28, 비밀기지(부산, 양정상가 지하 1층)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배리어프리 문화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타로’와 ‘어둠’을 키워드로 장애 공감 체험전시인 ‘블랙하우스’와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 양성 교육을 통한 ‘타로소통카페’를 열었다.

김남수

김남수

무용평론가. 미술기획자.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일했고,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콜렉티브 감독으로 활동했다. ‘확장된 안무’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 미술, 다원 등을 연결 짓고 있다.
kiapenu@gmail.com
(프로필 사진 ⓒ 양동민)

사진 제공. 꿈꾸는 베프

2018년 12월 (2호)

상세내용

“더 풀(The Fool) 카드가 나왔네요. 이 카드 속의 바보는 아주 순수하게 랄랄라 춤추듯 걷고 있는 모습이에요.”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저의 마음의 눈에는 바보가 태양이 내리쪼이는 샛노란 세상 속에서 춤추는 걸음으로 나아가려는 찰나가 보여요. 물론 그 찰나지간은 극히 아찔하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이 괴나리봇짐을 진 바보의 발아래로 한 걸음 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하는 절벽산책 저 너머로 산이 있는데, 그 산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보여요.”
“아니, 어떻게 이런 시각적인 해석이 가능하지요? 당신은 노란색을 본 적도 없을 텐데.”
“이미지는 합성되는 거예요. 이야기는 타로 카드 속에 자리 잡은 요소들을 엮어주면서 저에게도 저 안에서 또 다른 눈을 갖게 하지요.”

부산 양정상가 지하 1층의 소위 비밀기지에서 진행된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꿈꾸는 베프 주최/주관)에서 가장 주목된 것은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가 일반 관람객들에게 타로점을 보는 행사였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것이 점복 중에서도 가장 시각성이 강한 것이 타로인데, 어떻게 시각장애인들이 이 카드점을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그것도 시각적 잔상과 기억이 남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닌가. 후천적 시각장애인은 가능하다고 해도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과연 그들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어떤 감각적 꿈틀거림과 그 작동에 의한 이미지 읽기를 들려줄 것인가. 나아가 역설적으로 시각장애인만의 새롭게 낯선 이야기가 더해질 것인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사실 이 지하 비밀기지 — 주최 측은 만화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비밀기지를 꿈꾼 것일까? — 를 찾아갔을 때는 의구심 반 기대감 반이었다. 그런데 이 진기하고 발랄한 행사에 앞서서 블랙하우스 속에서 시각장애인과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어둠 체험을 먼저 겪었다.

“안경을 벗으시고 신발을 갈아신으세요. 그리고 어둠이 매우 짙으니까 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세요.”

어느 SF 작가가 던진 것 같은데, 어둠이란 빛이 달려가는 길 아닌 길이기 때문에 빛보다 더 빠르다는 말이 있다. 어둠은 있기만 하는데, 그 빛보다 빠른 속도 속에서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적이라고 할까. 소위 ‘어둠의 속도’가 작동하는 공간, 짙은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지시대로 사물을 만져보는 동안 드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인형인가요? 맞습니다. 그럼 이것은 또 무엇인가요. 음.. 화분과 식물 같은데요. 잘 맞추셨어요.

마치 적외선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안내자는 갑자기 시각장애인과 같은 조건이 된 비장애인, 어둠 속에서 자기 발밑조차 가늠하기 힘든 관람객을 안내하며, 이것저것 사물을 터치하게 시켰다. 어쩌면 이 터치감, 촉감이야말로 시각장애인이 이 세상을 읽는 감각의 촉수로서 너무 저평가되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이 촉각적 접촉이 불온시 되기 때문에 점점 더 피부자아의 소통능력이 감퇴하고 그 감퇴한 결과 때문에 다시 촉각적 욕구를 요청하면서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면서 시각장애인들의 ‘더듬거리는 피부-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보는 피부’라고 할까.

과거 1980년대 민중미술의 태동기에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집단이 전시회를 가지려고 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전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낮은 조도의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작품을 만지는 원초적인 전시는 그야말로 아방가르드가 아닌가. 그때의 어둠은 시대의 어둠이었다면, 지금 이 비밀기지의 어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의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시대정신이 점차 여성, 장애인, 소수자 쪽으로 이동해가는 전환기에 서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몽상이 벌레처럼 꿈틀대기 마련이다. 밖으로 나와서 시각장애인들의 소통매체인 점자로 글을 쓰는 체험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글을 쓴다기보다는 글을 누른다고 해야겠다. 이 점자는 표면연구가 전제되어 있었다. 즉 쓸 때는 종이 표면을 눌러서 오목한 홈을 만들고, 읽을 때는 뒤집어서 볼록한 돌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보는 피부’가 갖는 감각은 이중적이었고, 이런 면이 타로점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는 너무 지나치게 앞서간 것일지 모른다. 좌우간 필자는 막 태어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점자로 남기는 시도를 통해 나름의 성취감을 남몰래 맛보았다. 아기를 안는 피부접촉과 점자를 더듬는 피부접촉 사이의 연결이라고 할까. 더듬는다는 불온한 감각이 다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바보의 표정을 보세요. 저 바보는 긍정적이고 신나하지요. 그러나 봄의 햇살이 여름의 볕으로 바뀌는 계절의 변화기에 서 있는 거예요. 여름은 고난이지요. 그러니 걸음을 내디디려고 할수록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의 뒤, 혹은 옆에는 하얀 개 한 마리가 있어요. 그 개의 표정은 역시나 바보에게 감응된 듯 다소 밝아요. 동반자나 친구라고 타로 카드에서는 말하지요. 동시에 이 개는 갑자기 나타나 바보를 적대하면서 컹컹 짖는 것일지도 몰라요. 또는 저 앞에 벼랑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컹컹 짖는 것일지도.”
“그렇게 개를 생각하면, 너무 이미지가 현란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시다발적이라면 바보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타로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요. 위기인가 하면 찬스라는 말 있잖아요. 위협인가 싶으면 조언이었고. 친구인가 싶으면 적이기도 하고. 이러한 양면성을 느끼는 것이 타로의 매력이자 깊이일 거예요. 바보는 이러한 양면성의 칼날 위를 걷는 것이죠.”
“아하, 사실 저는 타로 카드 뽑으면 자주 이 더 풀(The Fool) 카드가 나오곤 하거든요. 그런데 들은 중에 가장 좋은 카드점을 들려주셨어요. 저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변동이 심한 점복을 믿을 만하다고 보거든요.”

동아시아에는 이미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득의망상(得意妄想), 즉 “의미를 얻었으면 이미지를 잊어라”라는 말일 것이다. 의미라는 핵심에 에둘러 가지 않고 곧바로 쳐들어가라는 직절(直截)적인 타입인데, 그 덕분에 이미지의 억압이 있었다. 이미지의 억압은 판타지의 억압이기도 하다. 그 억압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것, 거기에 시각장애인의 ‘보는 피부’로 터치하는 읽기는 어떨까. 이름하여 득상망시(得想妄視), 즉 “(풍부한) 이미지를 얻었다면 눈으로 보기는 잊어라”라고. 비단 타로 카드만이 아니다. 드라마의 세계가 됐든 고전의 세계가 됐든 읽으면서 이해하는 촉각적 접근의 요체라고 할까.

부산 양정상가 지하 비밀기지에서는 크고 묵직한 몽상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마치 유령들과 도깨비들이 그 어둠을 틈타서 무의식의 언어로 건드리듯이. 타로 카드는 그 정점을 찍었다.

타로는 서양에서는 13세기부터 집시 점이나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연관하여 저 아래 잠복하여 있는 기예였지만, 단순히 점복으로만 보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 타로는 카드의 그림 자체와 그림 속에 구성된 코드를 읽는 매력으로 어필하여 어느덧 곁을 내준 상태이다. 포스트모던이 유행하던 시기에 타로가 유행한 것은 근대라는 암흑기의 정체가 계몽주의 서치라이트여서 너무 밝은 이성의 서치라이트 불빛 아래 모든 것이 백안시되었던 조건에서 벗어나면서부터가 아닐까.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손이 이끄는 대로 산책하다 보니, 시각장애인들이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신체 내부의 작은 불빛들을 느꼈고 그것이 점자 체험을 거쳐서 타로 카드로 이어진다는, 다소 말도 안 되는 느낌적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시각장애인들의 타로 카드라는 효모가 들어간 촉각적이며 시각적인 소통 방식에는 큰 하자가 없다. 오히려 처음의 의구심이 해소되었다고 할까. 어둠의 레이어 그 안쪽에 도사린 반딧불이 같은 비합리성, 무의식 같은 삶의 양식이 겁에 하얗게 질린 채 얼어있던 내 안의 아이를 다시 불러낸다고 할까. 또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왼쪽부터)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 블랙하우스 입구, 점자 체험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

‘시각장애체험카페 – 블랙하우스 with 타로소통카페’

꿈꾸는 베프, 2018.10.21.~10.28, 비밀기지(부산, 양정상가 지하 1층)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배리어프리 문화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타로’와 ‘어둠’을 키워드로 장애 공감 체험전시인 ‘블랙하우스’와 시각장애인 타로리스트 양성 교육을 통한 ‘타로소통카페’를 열었다.

김남수

김남수

무용평론가. 미술기획자.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일했고,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콜렉티브 감독으로 활동했다. ‘확장된 안무’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 미술, 다원 등을 연결 짓고 있다.
kiapenu@gmail.com
(프로필 사진 ⓒ 양동민)

사진 제공. 꿈꾸는 베프

2018년 12월 (2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