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접근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어려움 중에는 공간, 예산, 인력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적은 예산과 인원으로도, 작은 극장이나 전시장에서도, 여러 한계를 창의적으로 뒤집으며 접근성을 시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어떤 생각과 태도가 이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지 자세히 들어보자.
‘접근성’. 이 단어는 비장애인 창작자의 입장에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무게를 지닌다. 동시에,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과는 동떨어진 개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성해설, 자막해설, 수어통역 등은 모두 작품 내부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극장이나 공연 생태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서비스’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러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접근성‘이’ 좋거나 접근성‘도’ 좋은 작품일 수는 있어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배우의 표정과 인물의 심리, 조명의 섬세한 변화, 찰나의 작은 움직임까지 해설로 옮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깊은 몰입과 사유를 요구하는 작품에서 이런 해설은 오히려 작품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은 사이와 공백, 침묵과 아우라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곧 접근성은 결코 작품과 맞닿을 수 없고, 이를 설명하거나 해설하려는 순간 그것이 “뛰어난 예술”에서 벗어난다는 일련의 비장애중심주의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접근성은 결코 작품 내부에 ‘침입’할 수 없으며, 존재하더라도 외부의 부가 서비스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
2022년 제5회 페미니즘연극제에서, 나는 청소년극 〈노랑의 보색은 검정이다〉를 준비하며 기획 초기부터 음성해설, 자막, 수어통역이 포함된 연출을 구상했다. ‘페미니즘연극제’라는 장, 그리고 ‘청소년극’이라는 타이틀은 특정 관객만을 상정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는 접근성을 공연의 구조 속에 놓아야 한다는 필연으로 이어졌다. 팀과 치열하게 논의하며 공연을 완성했고, 그 과정 끝에 처음으로 내가 만든 공연에 장애인 관객이 들어왔다. 이후 그 관객은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이 과정은 무엇보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함부로 상상하거나 함부로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자체적인 평가에서도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작업을 지속하려 할수록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소위 ‘비주류’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었고, 파편적인 대사와 상징적인 장면, 연출의 미학적 완성도를 중시해오지 않았던가.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면서 동시에 ‘접근성’도 뛰어난 작품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이후 작업에서 나는 접근성을 보조 장치로 두는 대신, ‘장애의 감각’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애의 감각’이라는 건 뭘까?
그것을 작품이 말하는 세계로 확장할 수 있을까?
비장애인이 던지는 이 질문은 꽤나 거만하거나 위험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구십 구명의 꼬마들과 나눈 대화〉(2023)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 작품으로, 시각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과 타자화의 메커니즘을 비판하며 오직 ‘듣는 것’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 공연에서 ‘장애의 감각’은 개인의 감각이 아닌, 비장애중심 사회 속에서 타자가 경험하는 감각으로 확장된다. 이어 〈극장 지평좌표계에 귀신을 고정시키는 방법〉(2024)에서는 자막해설이 단순한 보조 장치가 아니라 제3의 배우이자 주체적인 행위자이며, 극의 주제에 필수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이 공연들에서 접근성 요소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연출의 핵심 구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감각은 여러 차례 오역되고 재번역되며 다층적으로 확장되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장애인·비장애인 관객 모두가 ‘접근성’ 자체가 아닌 공연의 내용과 감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접근성은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을 확장하고, 새로운 연출적 시도를 가능하게 하며 작품이 연결될 수 있는 세계를 넓혀주었다. 창작자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대단한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미학, 예술, 접근성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이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흐름으로 만날 수 있다. 비장애인 창작자는 치열하게 장애 감수성을 공부하는 동시에 낯설고 위험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야 하고, 장애인 창작자는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없이 복잡하고 끝없이 논쟁적인 작업이 축적될 때, 비로소 장애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생산된다. 나는 언제나 그 길 위에서, 미학과 예술, 접근성이 하나로 맞닿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구십 구명의 꼬마들과 나눈 대화〉 공연 장면
〈노랑의 보색은 검정이다〉 공연 장면

최현비
글도 쓰고 연출도 하는 사람이다. 〈사물함〉 〈김주슬기 씻김굿〉을 연출하고, 〈극장 지평좌표계에 귀신을 고정시키는 방법〉 〈이리의 땅〉 〈구십 구명의 꼬마들과 나눈 대화〉 〈노랑의 보색은 검정이다〉를 쓰고 만들었다.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고 계속해서 낯선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다.
2rum07@naver.com
사진 제공. 필자
2025년 9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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