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읽기
당연한 말을 길게 해야 할 때가 있다. 오래된 감정까지 끌어올려 긴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기보다 이런 순간이 반복될 것 같아 힘이 빠지기도 한다. 혹은 ‘함께 사는 세상’ ‘배려하는 관계’ ‘포용적 태도’와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긴 이야기가 결론 날 때 다른 표현 방법을 찾게 된다. 종종 전시는 그 방법의 하나가 되는데, 누군가의 반복된 나날, 흔들리는 일상,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이나 시선, 차갑거나 뜨거운 실천의 일부까지 잠시 떼어와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업자의 삶에서 요동치던 무언가가 전시장으로 옮겨져 배치되는 과정에서 뜨거운 것은 따뜻한 것이 되기도 하고, 깜깜한 것은 거무스름한 것이 되기도 하고, 휘청거리는 것은 흔들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시는 ‘기꺼이 기어이’ 그것에 ‘기대어’ 다른 말 걸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예술의 한 조각이라고 주장하듯이.
전시 《관계의 기술: 기꺼이 기어이 기대어》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모두미술공간이 주관한 전시였다는 점에서, 장애예술에 대한 하나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해석’보다 더욱 강력하게 ‘주장’을 언급하는 이유는, 삐죽삐죽한 주장이 장애예술이라는 이름 주변에서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재적 재능, 개성 넘치는 독자적 영역, 그것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한 명의 예술가도 있지만, 그 주변에 분명하고 촘촘하게 존재하는 사람, 상황, 조건, 관계 등도 있다. 때로는 그것이 예술의 현재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예술의 일반성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장애예술이, 도리어 일반적 작품성, 완성도, 전문성, 작가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런 측면에서 장애예술인이 참여하는 전시가 어느새 알록달록한 완성작 발표 현장으로 익숙해진 요즘, 작업 과정과 창작자의 일상에 집중한 이 전시는 담담한 주장처럼 보였다. 전시 소개문에도 그 목소리가 이렇게 담겨있다.
“전시의 참여자들은 울퉁불퉁한 관계의 역동성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들에게 창작이란 고립된 성공이 아니라, 서로 긍정하고 지지하며 일구어낸 협력의 기록입니다.”
김진우 작가가 서천-아산-익산을 거쳐 다시 서천으로 돌아오는 기차 여행 영상에는 그의 즐거운 일상을 소중하게 담아내며 동행하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었다. 기차 여행이 김진우라는 사람에게 익숙한 경험이 되기까지 그의 동행은 오랜 시간 반복되었을 것이고 그사이 복잡한 감정과 사건도 발생했을 것이다. 그 기록이 예술 영역에 작품으로서 소개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관객이 감각적 공동체 ‘둥지’의 제안을 따라 상자 속 실, 씨앗, 밀랍 덩어리 등 일상적인 사물을 만져보며 관계의 감각을 탐색하는 과정. 아티스트 듀오 ‘라움콘’이 만든 〈함께 조각〉을 관객이 서로 도우며 함께 입고 움직여보는 경험. ‘발달장애인 독립공간 예술쉼터’의 여러 창작자가 무더기로 가져온 작업물들. 예술공동체 ‘선사랑드로잉회’와 함께 팔의 너울거림과 발가락의 미세한 떨림을 점과 선으로 표현하는 경험. 이정현 작가가 음악을 시각 언어로 옮기는 과정. 이 상황과 시간 또한 어떤 질문을 남길까.
그렇게 이 전시는 ‘함께 사는 세상’, 그 당연한 이야기를 개별화된 작업 과정으로 잠시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지켜봄, 함께함, 도움, 연결, 기다림이 관계와 창작으로 의미화되는 현장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는 ‘함께 사는 세상’보다 ‘각자 사는 세상’이 더 내재화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독립된 주체로, 흔들림 없이, 씩씩하게, 각자 버텨내며 일상을 살아가고 예술도 해내라고. 기필코 기어이 기대지 않고. 그런 측면에서 주로 예술가 개인의 결과물이나 성과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을 되짚어보면 ‘각자 사는 세상’의 일반화로 인한 어려움이 더 많이 발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그 발화의 자리를 언어적·비언어적으로 다양하게 마련했다. 워크숍, 라운드테이블, 참여 퍼포먼스 등 4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나는 그중 라운드테이블 〈연립의 기술: 지저분하고 찬란한〉에 패널로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도 함께 사는 세상을 구호로서만 외치는 사회적 분위기, 모호하고 두루뭉술하게 포용성을 언급하는 예술계, 그로 인해 개별화된 어려움이나 입장을 꺼내놓기 어려운 상황 등이 논의되었다. 이젠 많은 사람이 ‘다양성’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낯설고 파편화된 개별성과 그로 인한 어려움에는 깊은 관심이 덜 한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 자립보다 연립을 이야기하고,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게 전시 주제로만 머물지 않고 다수의 인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질문이 남는다. 역시나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해야 하는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예술은 어떤 자리가 될 것인가. ‘모두가 함께하는 예술’이 공중에 뜬 공익광고 문구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모두’에게 가능한 큰 주머니 ‘다양성’ 이전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개별성’의 조각들을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진우, 〈진우와 함께하는 기차여행_롤링페이퍼〉, 혼합매체, 44×60×16cm, 2024~2025|〈진우의 여행노트〉, 아카이브 노트, 18.2×25.7cm,
2019-2026|〈진우와 함께하는 기차여행〉, 싱글채널 비디오, 7분 23초, 2026. 영상 프로덕션: 소농지. 모두미술공간 제작지원
둥지, 〈둥지의 풍경〉, 상자, 실, 종이, 씨앗, 차망, 철사, 밀랍 점토, 스펀지, 주워 온 자연물, 스피커, 가변 크기, 2026
(왼쪽부터) 라움콘, 〈함께 조각〉, 광목천에 실, 가변 크기, 2026. 모두미술공간 제작지원|〈함께 조각〉,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18.9×84.1cm, 3점,
2026. 모두미술공간 제작지원
선사랑드로잉회, 〈우리 몸 크로키 - 공간 그림 퍼포먼스〉, 캔버스 천에 아크릴, 가변 크기, 2026

《관계의 기술: 기꺼이 기어이 기대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6.4.16.~5.23.|모두미술공간
《관계의 기술: 기꺼이 기어이 기대어》는 개인 역량 중심 사고를 넘어 돌봄과 협력 과정에서 확장되는 장애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는 전시다.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관계’의 관점에서 조명한 다채로운 작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서로 다른 몸을 통해 형성된 다양한 감각을 긍정하고, 협력 과정을 통해 축적한 창작 결과물을 만날 수 있다.
참여 작가: 김진우, 둥지(김보라, 오다솜, 송하정), 라움콘(Q레이터, 송지은), 발달장애인 독립공간 예술쉼터, 선사랑드로잉회, 이정현

최선영
문화예술기획자. 2007년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개별성 중심의 활동을 기획 및 연구하고 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발달장애인 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연구개발’(2022), 부산문화재단 ‘포용적 예술 창작접근성 가이드북’ 연구(2025) 등에 참여했으며 최근 장애인 예술교육 강의 노트 〈같이 좀 모르자〉를 집필했다.
∙ 블로그 uugoorichoi.tistory.com
∙ 인스타그램 @bokman_choi
사진 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썸네일.발달장애인 독립공간 예술쉼터, 〈우리가 쌓아온 이야기〉, 2022-2026
2026년 5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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