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읽기
그의 목소리는 저음이었다. 잔파도 이는 앞바다의 소리가 아니라 망망창해 수평선의 소리로 들렸다. 우쭐대는 작은 높낮이가 아니라 해수면의 모든 율동을 하나의 직선으로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우여곡절과 신산고초 너머 대양의 소리는 마땅히 저음이어야 한다는 듯 그는 좀처럼 들뜨지 않았다. 목소리는 물론 신체발부를 물려준 어버이의 내력이지만, 손병걸은 치열하면서도 깊은 시편들과 함께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정을 소리로 표현하는 듯했다.
삶의 세목을 배제하지 않고 개별성을 옹호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면, 그것을 보편적 지평으로 이끌어가는 힘은 서정적 주체의 고유한 역량에서 비롯된다. 손병걸의 시는 소재적으로 자신의 경험 세계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서정시가 추구해야 할 인간애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별성과 보편성의 박진감 넘치는 긴장을 지켜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저음 안에 세간의 모든 고음이 내포된 듯한 양상과 같다.
손병걸이 시력을 잃은 때는 서른 살이었다. 가난했지만 게으르지 않았고 힘들었지만 성실한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특수부대 출신의 건장한 젊은이였다. 당당한 사회인으로 일하던 그에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들었다. 베체트병(Behcet’s disease)이었다. 일종의 전신 혈관염으로 정확한 병인이 알려지지 않은 희귀 질환이었다. 다양한 병변으로 나타나지만, 그에게는 실명으로 귀결되었다. 서른 해 동안 보아왔던 세상을 더 이상 육안으로 감각할 수 없었다. 신체적 결손으로 그치지 않았다. 상실감, 분노, 좌절과 절망이라는 심리적 상처에 머물지 않았다. 생의 시공에 불현듯 죽음의 손길이 다가왔다. 그는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죽음 곁에 다가서고자 했다. 그 극점에서 손병걸이 마주한 게 시였다. 날마다 썼고 밤마다 적었다. 실로 2천여 편이 넘는 나날의 기록이었다.
손병걸에게 시는 생명이고 구원이었다. 육안 대신 육성이 그를 살렸다. 가성이 완전히 제거된 몸부림의 언어가 시의 형식으로 나타나 생명을 이어주었다. 그는 시집을 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시단의 관례를 따라 먼저 시인이 되어야 했다.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연이어 구상솟대문학상(2006)과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2008),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2011), 중봉조헌문학상 대상(2013)이 그를 찾았다. 그가 찾은 것이 아니었다.
동해를 딛고 선 산 중턱
스무 해가 넘은 아버지 묏등을 허문다
살점 하나 없어도
여전히 지상에 남아 있는 노동인 듯
차마 썩지 못한 단단한 뼈
가난을 짊어지고 등골이 휜
아버지의 혹독한 일생을 생각하며
부드러운 솔로 흙을 털어낸 뒤
불길로 태우고 곱게 빤 뼛가루
한 줌 한 줌 산꼭대기에 흩어놓으니
하늘이 대신 알고 빗방울 떨어뜨린다
황토와 빗방울에 섞인 뼛가루
산길에 찍힌 발자국들
주춤주춤 그러모아 바다로 흘러갈 때
먹구름 지나간 하늘 골똘히 높아가고
모가지 길게 빼고 구경하던 나무들
여지없이 그렁그렁 푸르다
- 「푸른 뼈」(『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 2011) 전문
개별성과 보편성의 박진감 넘치는 긴장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작품의 ‘아버지’는 이미 이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분이다. 동해가 훤히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육탈이 되도록 멀리 떠난 그에게 남은 것은 “차마 썩지 못한 단단한 뼈”뿐이다. 그는 ‘아버지’여서 뼈까지 썩도록 떠나지는 못한 것이다. 떠났지만 떠나지 못한 아버지를 지시하는 득의의 시행이 있어 손병걸의 개별성은 빛난다.
거기서 멈추었다면 일견 범상한 시편에 그쳤을지 모른다. 삶—죽음의 경계를 넘은 아버지의 뼈는 물리—윤리의 경계를 넘어 ‘올곧음’의 표상으로 되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올곧으며, 그렇기에 한평생 뼈가 휘어지도록(“가난을 짊어지고 등골이 휜”) 일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을 위해 “하늘이 대신 알고 빗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아버지 혹은 어버이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손병걸의 언어가 치열하고 깊다.
그것만이 아니다. 큰딸, 작은딸이 모두 병마에 시달리는 한 어머니가 “점심 때, 아픈 딸들 가운데 앉아서는 / 잘근잘근 씹은 밥 큰딸 입에 넣어주고 / 우걱우걱 씹은 반찬 뱉어서는 / 작은딸 밥그릇에 올려놓는다.” 이를 본 손님들이 슬금슬금 식당을 빠져나가는 등에 대고 “느근 안 씹어 처묵냐?”(「파란 하늘」) 하고 들릴락 말락 낸 소리를 듣는다. 그런가 하면,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며 눈 대신 ‘열 손가락’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자신의 자긍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 “시력을 잃고 엎질러진 물처럼 / 내 생이 밑바닥 밑바닥으로 스미는 동안” 분노와 좌절과 절망은커녕 오히려 “모든 틈이 사라진 여기가 바로 / 내가 간절히 원한 절정”(「물이 끓는 시간」)이라는 강렬한 통찰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어둠보다 선명한 것이 있을까”(「묵화를 그리며」)라며 명과 암을 역전시키거나, “엇결이 순결이고 순결이 엇결”(「나무숟가락」)이라는 시행과 같이 사물의 본성을 대립적으로 지시하는 통념을 경계하는 사유에 이르기까지, 손병걸의 ‘박진감 넘치는 긴장’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이제 중견이다.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2010),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2011), 『통증을 켜다』(삶창, 2017),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걷는사람, 2021) 등 네 권의 시집에 산문집도 두 권을 냈다. 그는 더 이상 “혼자 서러워하다, 혼자 분노하다, 혼자 취해”(「민」) 쓰러질 사람이 아니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긴장의 세계’가 장차 어떤 차원에 도달할지 긴장되는 순간이다.
손병걸,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2010)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손병걸,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2011)
손병걸, 『통증을 켜다』(삶창, 2017)
손병걸,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걷는사람, 2021)

손병걸
시인.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2010),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2011), 『통증을 켜다』(삶이 보이는 창, 2017),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걷는사람, 2021)가 있고, 산문집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손병걸』(솟대, 2017), 『내 커피의 적당한 농도는 30도』(작가마을, 2021) 등을 발간했다. 기업체, 교도소, 노숙인 쉼터, 초중고대학교 등에서 수백 회의 강연과 음악 공연을 했고, 여러 언론과 문예지에도 수백 편의 작품(칼럼, 에세이, 평론, 르포)을 발표했다. 여전히 활발한 강연, 공연, 작품발표와 더불어, 사단법인 인천민예총 이사와 사단법인 인천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thsqudrjf@hanmail.net

김재홍
시인, 문학평론가. 2003년 중앙일보로 시, 2022년 광남일보로 문학평론에 등단했다. 저서로 시집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주름, 펼치는』,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기린으로 떠난 사람』. 평론집 『분열자의 산책』, 『구도자의 산책』, 연구서 『현대시의 비대칭성과 상징성』, 산문집 『너를 생각하고 사랑하고』가 있다. 2017년 박두진문학상 젊은시인상, 2023년 시작문학상, 2024년 한국가톨릭문학상 작품상 수상했다.
kimjhs0007@naver.com
책표지 사진 제공.걷는사람, 삶창, 애지
2026년 5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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