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시 풍경은 늘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준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는 정돈되고 구조화된 질서를 상징하는 동시에 단절과 고독을 뿜어내는 양가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길 원하면서도 한편 그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또한 공존한다. 이처럼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는 도시의 풍경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창작자의 관심을 끌어왔으며 그만큼 익숙하고 흔한 예술적 소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허겸 작가는 끊임없이 도시 주변을 맴돌며 그 풍경을 화면에 담기 위해 차갑고 견고하면서도 때로는 찬란한 도시의 얼굴을 응시한다. 또한 작가는 단일한 시선에서 벗어나 도시를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풍경을 새롭게 포착하려 시도한다.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도시를 담아내는 회화적 실험은 사실 도시라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다양한 시점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려는 태도는 도시와 그 구성원들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연결되기 위함이다.
허겸 미술작가
그림을 좋아하던 작가에게 예술의전당 영재원에서의 경험은 화가를 꿈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당시 작가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미술대학 진학을 제안했고, 이후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다. 미대생으로서의 시간이 늘 행복했던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작가로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고 작가는 회고한다.
그렇게 허겸 작가는 회화로 무엇을 담아낼지 고민하던 끝에 자신을 둘러싼 서울이라는 도시의 단편들로 시선을 돌린다. 도시의 원경을 담은 〈서울〉 시리즈는 허겸이라는 작가를 알린 중요한 작업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도시 풍경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의 ‘도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왜 그의 시선이 도시로 향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초기 작업에서 허겸 작가는 도시 풍경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주목했다. 도시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공간이기에, 그 안에는 수많은 군상이 존재한다. 웃으며 춤추는 사람을 그린 〈춤추는 사람〉(2021), 도시를 하염없이 걸어가는 인물들을 담은 〈밤산책〉(2020)이 그 대표적인 예다. 〈춤추는 사람〉을 다시 살펴보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잿빛 건물을 배경으로 인물은 가방까지 벗어 던지고 웃으며 춤을 춘다. 가방 안에는 우유갑 등 일상적인 물품이 담겨 있는 이 평범하고도 기이한 인물의 춤과 표정에는 참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기쁨 혹은 슬픔과 외로움. 번잡한 도시에서의 삶이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듯 그들을 바라보던 작가 자신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물을 그리던 작가는 시선을 조금 더 멀리 옮겨본다. 그는 “도시를 멀리서 보면, 그 안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조화롭고 평화롭게 보인다는 점이 비현실적이면서도 위안을 준다”라고 말한다. 원경으로 바라본 도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기에 위안을 주는 동시에 그 안에 온전히 속할 수 없다는 쓸쓸함도 동반한다. 그렇게 도시는 작가에게 있어 이제 풍경 이상의 사건으로, 자신의 감정과 존재를 이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허겸, 〈춤추는 사람〉, 2021, 캔버스에 아크릴, 72.7×53cm
허겸, 〈밤산책〉, 2020, 종이에 연필, 96×126.6cm
도시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듣던 중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 궁금해졌다. 〈서울 No.9-Before Sunset〉(2024)라는 답이 바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서울의 도시 풍경을 그린 것이다. 꽤 경사진 언덕길에 위치해 숨을 고르며 이동해야 하는 낙산공원에서 작가는 서울의 여러 지역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해 질 녘 어스름한 빛을 온전히 받아내는 서울의 자잘한 풍경은, 오히려 가까이서 봤을 때는 알 수 없던, 미묘하고 풍부한 색채를 갖고 있었다. “여러 색을 갖고 있는 그 장면이 아름다웠다”라고 회상하던 작가는 그렇게 원경을 통해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굴한다. 뾰족한 고층 건물과 회색빛의 단조로운 외면이 사라진 도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빛을 충실히 흡수한 추상적인 덩어리들로 읽힌다. 그렇게 색과 면이 강조되면서 작가의 〈서울〉 시리즈 속 대상들은 서로 얽히고 엉겨 붙는다. 근엄하게 굳은 도시 대신 곡선 중심의 유기체로 탄생한 그 ‘서울 풍경’에 대해 작가는 “멀리서 도시 풍경을 보았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라고 말한다. 그 감상을 온전히 담기 위해 작가는 캔버스를 이어 붙여 큰 화면으로 작업하는 일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허겸, 〈서울 No.9-Before Sunset〉, 2024, 캔버스에 유채, 80.3×116.8cm
반면 이후 작업인 〈선과 선〉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날카로운 선으로 가득하다. 전깃줄, 앙상한 나뭇가지, 공사장, 건물의 계단과 문 등에서 강조되는 거친 직선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콘테와 낮은 톤으로 채워진 장면은 전형적인 삭막한 도시 그 자체다. 〈서울〉이 원경의 관점에서 담아낸 빛과 색의 덩어리로서의 도시 풍경이었다면, 〈선과 선〉은 도시의 단면을 바로 앞에서 보고 담은 근경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시점과 형식이 달라진 만큼 작품에도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해 작가는, 그것은 변화가 아닌, 계획이자 의도였다고 설명한다. “멀리서 봐도 잘 알 수 없고 너무 또 가까이서 봐도 잘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있음을 이미 작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작가에게 너무도 당연한 답이었을 것이다. 작업의 외적인 변화만 보고 그 안에서 그저 새로운 방향이나 의미를 서둘러 찾으려 했던 나의 성급함이 오히려 머쓱하게 느껴졌다. 더 많이 알고 싶다면 거리와 시점 그리고 시간을 조정하며 대상 혹은 상대를 관찰해야 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이지 않던 지점을 알게 되고, 멀어질수록 또 다른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듯 시점과 관점을 의식적으로 조율하며 회화에 담을 대상을 늘 다르게 파악하고자 한다.
허겸, 〈선과 선 IX〉, 2025, 종이에 콩테, 파스텔, 40.9×31.8cm
허겸, 〈선과 선 XII〉, 2025, 종이에 콩테, 파스텔, 40.9×31.8cm
도시를 담은 회화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조심스레 ‘장애예술가’라는 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벽을 치는(벽이 생기는) 기분이 드는 단어”라고 답했다. 자신이 장애를 소재로 작업하는 것도 아니지만, 장애가 자신의 예술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화를 통해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고 타인과 소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말을 들으며 ‘장애예술가’라는 정체성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회화를 매개로 세계를 바라보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모색하는 데 작업의 핵심적인 동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에게 회화는 자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소통의 가교이자, 그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할 수 있는 매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형식을 덧붙이기보다 회화 자체의 잠재력을 깊이 파고든다. 이제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먼저 살필 것은 ‘장애예술가 고유의 감각’이라는 반복적인 수사가 아니라, 작가가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무엇을 사유하고 실천하는지를 함께 헤아리고 언어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허겸 작가
한편, 작가는 장애예술가에게 필요한 지원에 대해 꽤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동했던 그는, 레지던시 경험이 자신의 작업에 매우 유의미한 시간이었고, 포트폴리오 제작과 작품 사진 촬영 방법에 대한 수업은 지금까지도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지원서 작성이나 작품 판매 과정에서 문서 작성과 행정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장애예술가와 그 가족을 위해, 이를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지원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다시 쑥스러운 듯 웃으며 앞선 답과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나 자신에 대해 늘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나라는 존재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늘 고민한다”라는 말을 다시 꺼냈다. 사실 이 고민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품고 살아가는 그것과 동일하다. 그가 도시를 단순히 회화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삶의 터전으로 타인과 관계를 이어가고픈 마음을 화면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있어 허겸 작가는 더 이상 ‘장애예술가’라는 수식어로 규정되는 이가 아니었다. 그저 도시를 통해 인간과 삶을 이야기하는 한 명의 작가일 뿐이었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 허겸 작가 역시 언젠가는 도시 풍경을 떠나 새로운 소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평면 위에 계속해서 도시를 담아낼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끝내 다 알 수 없는, 흔하지만 미지의 세계인 삶의 전경을 말이다. 다음에 그는 어떤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질문 혹은 기대를 남기며 그의 작가 노트에 적힌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언젠가는 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도 나를 궁금해하기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 허겸, 작가노트, 2025

허겸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도시를 산책하면서 관찰하는 사람과 풍경에 관심을 두고 화폭에 담아내는 작업을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원경,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들과 화려한 도시 풍경의 이면, 원경과 근경의 대비를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탐구하고 형상화한다. 개인전 《18》(갤러리 가이아, 2016), 《Ordinary World》(나이브아트갤러리, 2022)와 단체전 《기울기 기울이기》(한가람미술관, 2024), 《투명한 몸짓들 Transparent Gestures》(신한갤러리, 2025), 《The Sensory Tale 감각의 서사》(한가람미술관, 2025), 《예담화경》(모두미술공간, 2025) 등에 참여했다.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sky340600@naver.com

김미정
미술과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동력으로 전시와 프로그램을 만들고 글을 쓴다. 《여기 닿은 노래》(2024) 등을 기획했으며, 현재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eebakim@gmail.com
사진.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자료사진 제공.허겸 작가
2026년 7월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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