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깨진 커피잔. 지인 몇과 선배 시인 집에 간 적이
있다. 시인이 차 한잔을 내놓았을 때였다. 지인들이 자꾸 시인 대신
차를 타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인이 한마디 했다. 장롱 깊숙히 모셔둔
커피잔을 당신들이 어떻게 찾느냐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 앉아
있던 지인들이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눈이 안 보이는 나는 영문을 몰랐다.
곁에 앉은 지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유는 시인이 테이블에 올려
놓은 커피잔 때문이었다. 지인들의 탄성이 이내 감상평으로 이어졌다.
커다란 나뭇잎을 동그랗게 말아서 만든 그 모양이 예술이다.
벼루 모양으로 만든 받침대가 커피장과 어우러진 모양이 앙상불이다.
청자처럼 부스한 빛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지인들 말을 들으며 나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정말로 뛰어난 예술
작품 같았다. 아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술 작품이 맞았다.
이 말이 교도소 강연 때 선물로 받은 거라 했다. 실제 교도소 안에서
재수자들이 만든 거라 했다. 도자기 기능대의 출품을 위해 만든 거라
했다. 그러나 혼자 차를 마실 때 쓰지 않는 커피잔이라고 했다. 귀한
손님들이어서 예의를 갖추는 거라 했다. 시인의 말을들은 지인들도 대접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 사이 커피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내 앞에 그 멋진 커피잔이 놓였다. 나는 특이한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뜨거운 커피 한 모음을 마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침대를 멀치감치
밀어 놓고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시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보에 그 예술 작품이 마음에 안 드시나?
나는 예측 못한 질문에 얼른 과한 목소리로 그게 아니라 했다. 이내
얼머무리듯 무슨 커피인지 몰라도 커피가 참 구수하고 맛있다고 했다.
일순 상상 못한 동문서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시인은 물론이고 지인들도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이 시인이 받침대를 내 앞에 가져다 놓고
내 커피자를 받침대 위에 공손이 올려 주었다. 순간 이제라도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고 지인들은 무심히 대화의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애초 대답을 제대로 해야 했다. 귀찮아도 설명해야 했다. 커피
받침대에서 잔을 들어 올린 뒤 커피을 다시 받침대에 내려 놓을 때 몹이
난감하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두 눈 때문에 받침대의 정황을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때 균형 이은 자니 받침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번질 때마다 불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문제는 뜨거운 커피를
어떻게 한 모음에 비울 수 있는가? 계속 들고 있자니 달아온 자네 다은
손이 뜨겁고 수평을 잃을까 봐 힘을 잔뜩 준 손가락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했다. 뜨거울 때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놓아야 하고 제대로
내려놓기가 영 자신이 없어서 받침대를 멀치감치 치우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거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럼 말을 꼭 해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나는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내 설명을 듣지 못한
시인이 내 사정을 어떻게 알 것인가? 내 사장을 모르는 시인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한테 받침대를 사용할 수 있게 커피잔을 공손히 올려 놓아 준
거였다. 친절을 베푼 거였다. 그러나 그때라도 나는 말해야 했다.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었는듯한 썰렁한 말이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평소에
못한 말을 다시 끄집어내어 정확히 말해야 했다. 너무 뜨거운 나머지
커피잔을 내려놓다가 없기 전에 말해야 했다. 애초에 커다란 머그잔을 달라고
말해야 했다. 반드시 받침대가 없는 잔을 달라고 말해야 했다. 쏟아진
커피가 테이블을 적시고 시인과 지인들 바지를 적시기 전에 말해야 했다.
소중한 컵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기 전에 말해야 했다. 나 때문에
마음들이 상하기 전에 말해야 했다.
내가 저지른 사고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두 군반 세 금반
뛰었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두 안절 부절 못했다. 와중에 나는
제일 걱정하는 시인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러나 입이 저질러진
일이었다. 후에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일이었다. 사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릇이든 접시이든 차잔이든 거기에 술장까지 누군들 예쁜 디자인을
싫어할까? 나도 좋아한다. 그러나 자꾸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까 내
커피잔은 언제부터인가 먹그잔이 되었다. 커피 취향도 물처럼 마시는
실용주의자가 되었다. 잔을 포함한 모든 그릇에 액체가 담겨 있을 때
나는 수평을 유지하기 힘들다. 기울어진 용기 때문에 액체가 쏟아지기
일수다. 내가 두 눈을 잃어갈 초기에는 대단히 심했다. 그릇들과
각까지 병들 그리고 잔들까지 내 손에 깨지은 일이 다반사였다.
그 모습을 본 가까운 친구들은 내 앞에 위험한 것을 놓지 않는다.
친구들뿐만이 아니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되도록 뜨거운 그릇을 내게
하지 않는다. 들기 불편한 컵잔도 권하지 않는다. 나는 친구들에게 늘
일부러 말했다. 얕은 그릇보다 좀 깊이가 있는 그릇을 달라. 찌그러진
모양이나 각진 그릇보다 동그란 그릇을 달라. 받침대가 있는 우아한 커피잔보다
머그잔을 달라. 손잡이도 작은 것보다 좀 큰 것으로 달라.
그때쯤 내 커피의 농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친구들과 만나면 내 커피잔은
언제나 커다란 머그잔이었다. 진하게 먹던 커피 취향도 완전히
변했다.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는 연한 커피가 되었다. 한때는 커피
잔으로 가지고 다니던 머잔 때문이었을까? 커피를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또 하나의 새로운 오해로 굳어갔다.
실용을 위해 선택한 머그잔이 만든 오해였다. 어쩌겠는가?
모든 오해가 그리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내 먹으자 따뜻한 거피양은
점점 더 늘어갔다. 구수한 향기를 품는 숙이 되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 완전히 방심했다.
장롱 속에서 겉삐잔이 나올 것을 예상 못했다.
인들의 시선을 단순히 압도한 커피잔이 나올 것을 예상 못했다. 나를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버린 예술 작품이 나올 줄 몰랐다. 재소자들이 재화를
꿈꾸며 만든 예술 작품이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가 파르스름한 생기가 도는 그 겉비잔을 깨뜨릴 줄 몰랐다.
치약 뚜껑
치약 뚜껑. 치카치카자 하는 제 엄마 목소리에
딸아이가 화장실로 뛰어갔다. 예쁜 턱바지를 목에 두르고 양치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이가 다힐는지 안
닦힐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의무는 곧바로 뒷전이 되었다. 적절한
칠솔지를 마치고 입안에 거품을 뱉트려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예뻤기 때문이었다. 그런 딸 아이가 선어살이 된 때였을까?
혼자 양치질하기 시작한 때부터 습관 하나가 생겼다.
딸아이는 이상하게 치약 뚜껑을 닿지 않았다. 뚜껑 열린 치약 통 입구에는
언제나 치약이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딸 아이에게 잔소리를
했다. 치약을 짜고 왜 뚜껑을 닿지 않냐? 딸라이의 대답은 단순했다. 또 양치질
할 건데 굳이 닫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였다.
치약 뚜껑이 잘 다혀 있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터이어서
딸아이가 집에서는 양치질을 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늘 아침이었다. 분명히 딸아이가 양치질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치약 뚜껑이 잘 다혀 있었다. 나는 양치질을 하며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결론은 요즘 치약
뚜껑을 제대로 닫고 있었다. 내 잔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딸 아이는
컸다. 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철이 들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점점 작아져 보였다.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든 한 번 더 생각하고 말을 걸었다. 될 수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 예를 썼다.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대화가 줄었다. 내가 철이
들어가는만큼 부모님이 점점 더 빨리 늙어가는 듯했다. 시간은 정말
빨랐다. 가난한 소장농 살림을 어떻게든 내가 보란듯이 일으키고
싶었다. 공기 댕천한다는 특공대를 전역한 뒤 서둘러 사회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암담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한참 멀기만 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참 외롭고 아픈 일이었다. 열린 치약통 입구처럼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일이었다. 딸아이도 이제 웬만한이 일은 혼자
해결하려 한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별 도움을 못 주는 아비로서
안타깝다. 어차피 철이 들면 이별을 맞이할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더디 가면
좋겠다. 옥신과 식신 부딪히며 사소한 행복을 더 누리고 싶다. 아직은
정돈하지 않는 어지러운 딸 아이 방이 좋다. 그러나 딸 아이 방을 내가
일부러 어지럽힐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잘 다친 치약 뚜껑을
슬그머니 열어두고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붕어빵 살리기
붕어빵 살리기. 청탁받은 원고 때문에 이틀간 기행을
다녀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세면을 마친 뒤 서둘러
컴퓨터를 켰다. 생생한 기억을 빨리 쓰고 싶었다. 그러나 책상 위에는
가진 물건이 늘어져 있었다. 일단 어수선한 물건들을 정리해야 했다.
쌓인 책들은 책장에 꽂았다. 차를 마시고 책상에 두었던 머그자는
싱크대에 옮겨 놓았다. 이제야 정리가 다 끝났다 싶어 키보드를 앞에 놓고
책상 위를 더듬거릴 때였다. 책상 귀퉁 위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나는 속끝에 닿은 종이봉지를 열고 안에 삼긴 내용물을 만져 보았다. 아
붕어빵 봉지였다. 딸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 사온 붕어방
봉지를 책상 위에 놓고 기행을 간 것이었다. 따라에게 말해 주지 않는
내에 실수였다. 기행 중 몇 차례 통화를 했을 때 알려주어야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책상 위에 놓고 간 붕어빵은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아깝지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냄비에 넣고 끓여 보기로 했다. 냄비를 찾아서 물을 채웠다.
가스 레인지를 켜기 전 고민했다. 물에 푹 담가서 끓이면 풀처럼 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물을 조금 덜어내고 가스 레인지 불을 켰다. 잠시 후 물이
끓었다. 냄비 뚜껑을 열고 끓는 물에 딱딱한 붕어빵을 넣었다. 한 2분이
지났을까?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붕어빵을 건졌다. 겉은 따뜻하고 잘 익은
듯했으나 소은 여전히 딱딱했다. 딱딱한 소을 익히려고 다시 끓이면
분명 풀이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가?
짧은 고민 뒤 접시에 담긴 붕어빵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이분을 돌려
보았다. 그런데 웬 일인가? 축한 껍질이 바삭해지고 속살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써도 낫졌다.
오호. 다시 붕어빵이 살아났다. 방금 구운 부흥업방처럼 살아났다. 진느비도
힘차게 살아났다. 나는 기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온 것처럼 종이
봉투에 다시 담았다. 그리고 때를 맞춘 듯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형관문을 들어섰다. 나는 시침이 뚝 떼고 붕어빵 봉지를 딸 아이에게
내밀었다. 붕어방 봉지를 받아둔 딸아이가 활짝 웃었다. 체카방도 벗지
않고 식탁에 앉은 딸아이는 다시 살아난 붕어빵을 맛있게 먹었다.
붕어빵을 오물거리며 먹던 딸아이가 아빠도 드이라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비질 소리
비질 소리. 경사진 골목간 비질소리가
다디한 새벽잠을 깨운다. 골목 양쪽에 빼꼼이 들어찬 저층 빌라 사람들도
비질소리 알람을들은 듯 부수 몸을 일으킨다.
이내 집마다 텔레비전이 켜지고 수돗물 소리, 설거지 소리, 화장실 변기
소리, 방문는 소리가 한꺼번에 골목 안으로 쏟아진다.
발빠른 출근길 발소리 따라 두두 발소리 한 무리 한 모리가 골목을
연이어 빠져나간다. 잠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골목
안이 고요해진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비질소리의 주인공인 저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느 날 잔하듯 어스름 저녁에 이사를 온 저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새벽마다 빚을 소리로 아침을 흔들어 깨우는 저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침뿐만이 아니다. 아저씨의 빚질 소리는 밤낮이 없다.
흰 머리카락이 성성해서 호칭도 어르신이 어울릴 것 같은데 늘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과 단단해 보이는 몸. 게다가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강인해
보이는 아저씨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한 때는 군대에서 이었다.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공장에서 잃었다. 조직 공력배였다. 한쪽 발이 없는 아저씨에 대한 풍문이
돌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풍문이 자자들만하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는 원인 불명의 풍문이 돌았고 그때마다 아저씨의 귀에
닿으면 금시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이 골목 안에 팽팽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맥쾌한 냄새를 풍기며 동네를 떠다니는 가스 같은 풍문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저씨는 나날이 풍성해지는 풍문을 쓸어버리듯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열심히 비질했다.
세상사 심한 편견처럼 겉모습 때문에 행동이 불안해 보였지만 아저씨는 없는
팔 때문에 겪는 장애가 없었다. 언제나 목소리가 힘찬 아저씨는 결국
몹을 풍문들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우리 동네 육쾌한 골목대장이 되었다. 가끔
나는 장애에 대한 동병산년의 마음으로 그 아저씨와 막걸리잔을 비운다.
마음을 닥터 놓고 속속들이 이야기를 나누어도 나는 한쪽 팔에 대한
궁금증을 묻지 않는다. 아저씨도 내가 두 눈이 안 보이게 된 사연을 묻지
않는다. 오늘도 지하방 머리맛 비질 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거치고 형과문을 나선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내 인사를들은 아저씨 골목을 쓰시며 내게 한 말씀을
던진다. 작년처럼 올겨울도 심상치 않다.
하늘을 보면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릴 것 같다. 나는 취임새를 넣듯 고개를
끄덕인다. 넓죽 대담한다. 그리고 진눈깨비가 많이 내리던 작년 겨울을
생각한다. 올 겨울도 역시 골목에는 송이 눈이 쌓일 틈이 없겠다. 흰머리카락에
성상한 하얀 비질소리가 온 동네를 흔들겠다. 아저씨의 빚질 소리는
겨울뿐만이 아니었다. 꽃잎 은날리는 봄에도 햇볕 쨍쨍한 여름에도 낙엽
수북한 가을에도 멈춤 없이 번졌다. 아저씨의 비질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칭찬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쓴다. 벌써 이사온지 다섯가
되었으니 참 오래된 습관이다. 언젠가 통장이 아저씨를 훌륭한
시민수상자 후보로 시청에 거의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자기 집마당을 쓰는
것이 상받을 일은 아니라 했다. 분명 아저씨의 말이 맞는 말이다. 그래도
거부하는 아저씨의 행동이 아쉬웠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상 받으셔도 된다고. 그러니까 받으시라고. 그날 저녁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서
막걸리잔을 채워들이며 줄기차게 설득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줄곧
빙글에 웃으며 유연한 듯 왕강했다. 끝내 부상도 썩 괜찮고 상금도
괜찮은데 꼭 받으시라는 내 속물 근성만 길바닥에 쓰레기처럼 뒹굴던
날이었다. 아저씨 말 맞다하나 계절마다 쓰레야 할 쓰레기들이 다르듯
내 마음을 쓰는 아저씨의 빚질 소리는 늘 같은 소리가 아니다. 적적할 때
함께 막걸리잔을 비우며 나누는 이야기처럼 빚질 소리는 날마다 다른 소리가 되어
달팽이관을 후빈다. 얼마 전에는 장애인 차별에 관한 정책 제한 원고
마감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더니 비질도 하루만 멈추면 동네가 더러워진다 하며
내 게으음을 깨끗이 쓸어 주었다. 일주일 전에도 혼자 사시던 동네
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어지름증에 시달린 마음을 자분자분
쓸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빚질소리가 꿈속에서 일어나는
장면과도 이어진다. 오늘 아침엔 산찜승이 마당까지 내려와
먹을 것을 찾는 소리가 들린다. 마당곁 개집 아래 자다가 놀란 듯
마구짓는 누렁이 목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산속으로 돌아가는 산진성
발소리도 들린다. 확실히 성기를 잡은 듯 더 크게 짓는 누렁이 목소리도
들린다. 태마루 짐들을 정리하는 아버지 발소리도 들린다.
이내 마당에서 쌀이 비질 소리가 들린다. 산 중턱 시골집 뒤란 굴뚝에
쌓인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쿨룩거리는 굴뚝의 연기만큼
아궁이에서 생솔가지 타는 소리도 들린다.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친
엄마가 살씻는 소리도 들린다. 와중에 어젯밤 채한 듯 내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엄마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문풍지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골바람 소리 앞세운 엄마 방문 열리는 소리도
들린다. 엄마 손이 약손 엄마 손이 약손나무
껍질 같은 손바닥이 내 배를 쓸어 주는 소리도 들린다.
이발리즘
이발리즘 내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 하나
있다. 내가 이발할 때 앉았던 널반지였다.
정확히는 의자대용 빨래판이었다. 지금은 찾기 힘든 작은 이발소가 우리
동네 역 앞에 있었다. 어른들이 이발할 때 앉는 의자는 컸고 나는
너무 작았다. 당연히 제대로 앉을 수 없었으므로 의자 팔거리에 빨래판을
걸쳐 놓고 앉았다. 망도를 두루듯 나는 하얀 보자기를 두르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오래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이발소 냄새는 오묘했다. 비누 냄새 같기도 하고 잘림 머리칼
냄새 같기도 하고 수건 마르는 냄새 같기도 하고 물이 팔 끓는 냄새
같기도 했다. 모든 냄새가 한꺼번에 내 코를 자극할 때마다 나는 강한
마취향을 맡은 듯 마구 조름이 쏟아졌다. 바리깡 소리와 가위질
소리도 조름을 붙이는데 한목했다. 그때마다 고개는 푹 떨어졌고 입술
사이로 침이 흘러나왔다. 머리통 버짐에서는 살 비듬이 잃었고
누런 콧물도 흘러내렸다. 그때 내 또래 아이들은 다 그랬다.
이발소는 여름에 문을 활짝 열고 커다란 선풍기를 돌렸다. 시원한
바람이 쏟아지는 선풍기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 당시는 선풍기를
가지고 있는 집이 없었다. 우리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옆마을 건너
마을에도 선풍기를 가지고 있는 집이 없었다. 겨울이 오면 이발소의 연탄
날로가 피워졌다. 이발소 연탄은 가정용 연탄이 아니었다. 커다란
연탄이었다. 그 연탄이 3층 탑으로 불기둥을 이룬 연탄날로는
대단한 화력을 품었다. 날로 주위에는 큰 주전자가 기을
뿜었다. 이발소는 언제나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나는 그 이발소가
매우 좋았다. 계절에 상관없이 좋았다. 그러나 역 앞에서 아이들과
놀면서 가끔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렸을뿐 자주 머리를 깎지 못했다.
집안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나 명절이 아니면 굳이 이발소에 갈 일이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바쁜 탓에 머리카락이 눈을 찔려도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그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미취약 아동 때처럼 내 의자는 여전히
빨래판이었다. 나는 빨래판에서 언제쯤 내려앉을 수
있을까? 폭신푹신한 의자에 앉을 수 있을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연탄 날로 연통에 비누거를 낸 부드러운 소울을 따뜻하게 대운 뒤
턱의 거품을 듬뿍 바르고 싶었다. 이발사 아저씨가 가죽에 쓱쓱 간
면칼이 내 코믹과 턱을 지나간 뒤 턱과 귀볼에 파르스름한 빛을 바라고
싶었다. 나는 빨리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이발소를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 듯 바리깡이
뒤통수를 빠르게 지나갔다. 언제나 깜빡 졸고 나면 이발사 아저씨의
가위질이 끝났다. 어른들처럼 이발소 의자를 한껏 뒤로 높여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찜질해 죽이는 커녕. 나는 빨래판에서 얼른 내려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해야 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이발소 아저씨가 잘
마른 수건 한 장을 내밀 때였다. 세탁한 수건을 연통에 휘감아서 말린
수건이었다. 따뜻한 온기를 먹으면 그 수건에서 풍기는 냄새가 나는 좋았다.
바삭바삭한 과자 냄새 같기도 하고 명절 때 큰 집에서 먹던 과질 냄새
같기도 했다. 그중에 제일 좋았던 건 펄펄 끊는 물에 삶은 그 하얀
색깔이었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닫고 나면 금시감해지는 그 수건 색깔처럼
암담한 이야기를 어른들이 나누기도 했다. 철길집 큰 딸 가방 공장의
취직이 어떻고 100억불 수출탑이 어떻고 경제개발 계획이 어떻고
우리나라 산업화가 어떻고 농사보다는 공장일이 어떻고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이발 뒤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멋있게 보였고 스포츠 머리로
상쾌해진 내 머리카력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마을에 한 개밖에
없는 이발소였다. 이발사 아저씨도 마을에 사는
이유이었다. 마을 사람들 누구나 단골이었다. 어느 바람 좋은 날에는 이발소 앞에서
막걸리판이 벌어지곤 했다. 형상에 둘러 앉은 마을 어른들은 논들을
품맛이 하는 사이였다. 이발사 아저씨도 그리크지 않는 농사를
지었다. 이발소가 빤히 보이는 역앞 공터가 놀이터여서 나는 아저씨에게
자주 불려갔다. 작은 심부름 하나에도 아저씨는 꼭 과자값을 주셨다.
과자값이 아닐 때는 삼각형 모양 우유를 주셨다. 귀한 우유였고 정말
고소한 우유이었다. 이발소 아저씨는 마을 사람들 머리카를 늘 도마타 왔듯
마을의 대소사를 많이 맡았다. 마을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 집 장례를
도았다. 염을 해 주고 몇자리를 잡아주고 상해 앞에서 종을 울리며
알아들 수 없는 곡을 했다. 나는 그 이발 사저씨를 왜 좋아한 것일까?
이발소 거울 위에는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액자 속에는
돼지 한 마리가 무척 많은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그리고 액자
유리에는 하얀 글씨로 도무지 모를 글기가 적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중학교
때 알았다. 이발소에 갈 때마다 만난이 글기가 알렉산드로 세르게 빛이
푸시긴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의 시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더 커서 여러
시를 읽고 한 가지 더 알았다. 바로이 시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최초로 만난 시이고 그때부터 내 시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삶이라는 말은 너무나 어려운 단어였다. 속이는 것과
놓여움은 얼핏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거짓말과 화를 내지 말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중학교 이후로도 푸시키는 오랫동안 내게 정말 많은
질문을 쏟아놓았다. 인생의 본질이 무엇일까? 인간의 고독이 무엇일까?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게 될까? 살면서 슬픈 날들이 끝없이 이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삶이 흰노에락을 동일하게
병행하는 걸까?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지는 걸까? 그것이
오히려 선명한 그리움이 될까? 나는 부시킨의 무수한 질문 속에서 내
삶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 상징문을 뒤늦게 찾았다.
그 시절을 내게 정의해 주려고 다가온 것일까? 우연히 아주 우연히 오용택
화가를 만났다. 짧은 인연 치고는 조금 긴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이야기 중에 이발소가 나왔다. 나는 어린 시절 나를 관통한 이발소의
빨래판이 떠올랐다. 내가 빨래판을 말하자 오용택 화가는 이발소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운 좋게 이발소를 만나도 70년대 이발소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이발사 아저씨가 떠올랐고 오용택 화가는
70년대 이발소를 이발리즘이라고 지칭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맞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제적 관점에서 나는
이발리스터였다. 찾아보면 이발소야 있겠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이발소는 그냥 이발소가 아니었다. 한 시대를 주도한
이발사 아저씨를 만난 곳이었다. 그 시절 이발소는 마을 공동체의
산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일들의 출발지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르고 잔치집을 가고 명절을 맞이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때는 몰랐다. 이발사 아저씨는 푸시킨을 닮은 내
삶의 사상가이자 최초의 시인이었다. 빨래판 위에 앉은 내 머리가 바닥으로
곤두 박칠할 때마다 내 몸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던 사상가였다.
[음악] 내 커피에 적당한 농도는 30도.
내 커피의 적당한 농도는 30도
적당한 농도의 30도는 물의 온도가 아니다. 팔팔 끓는 물을 머그잔에
가득 뒤 머그잔의 손잡이를 잡고 싱크대에서 기울리는 머그잔의
각도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갸우뚱할 수
있겠다. 자초지종을 찬찬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커피를 타는 보편적인 방식은
티스푼으로 커피 알갱이를 잔내 놓고 뜨거운 물을 붙는다. 설탕과 크림도
마찬가지 아닌가? 뜨거운 물을 붓는 순서가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는 부어야 할 물의 양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입니다. 그래서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먼저 받고 커피 알갱이와 설탕크림을 나중에 넣는다.
전원을 켠 커피 보트에서 물이 다 끓을 때쯤이다. 미리 챙겨둔 머그잔을
왼손에 든다. 물 끊는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지는 커피 포트 쪽으로
걸어간다. 전원을 끈다. 오른손으로 커피 포트를 든다. 뜨거운 물을
바닥에 흘리거나 발등에 쏟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사물들과 몸이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몸의 균형을 이르면 큰 일이 난다. 최대한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싱크대에 다른다. 물을 부을 때도 계수대 바깥쪽은
곤란하다. 반드시 계수대 안쪽에서 머그자잔의 수평을 유지한다.
침착하게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붙는다. 머그잔에 적절한 무게가
느껴진다. 물 붓기를 멈춘다. 적절한 무게.이 이 짧은 표현이 말로는
간단하게 들리지만 다연코 쉽지 않은 표현이다. 커피 한스푼과 땅 맞는
물의 양을 머그잔니 받아내야 할 그 적절한 무게를 손으로 측정한다는 것이
단박에 될 일인가? 어느 날은 쓴맛, 어느 날은 냉랭한
맛, 어느 날은 아예 내 맛도네 맛도 아닌 맛들을 온몸으로 체험한 뒤
간신히 터득한 무게이다. 그러나 간혹 커피는 끓여야 하고 내가 늘 사용해온
머그잔이 아니어서 난감할 때가 있다. 익숙해진 무게로 굳이 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내 전용 버그잔을 가져오지 못한 야외일 경우이다.
새로운 머그잔을 만나면 가음할 수 없는 무게 때문에 커피를 타는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뜨거운 물이 기울인 머그잔의 각도에 맞춰 조르르르 흘러야 하는데 콸콸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두 번 조율를 거치면 이내 적응이 된다. 잘
훈련된 습관이 또 하나 있다. 다행히 넘쳐도 상관없다. 이미 나는 습관처럼
싱크대 앞에서 있고 계수대 안에서 머그잔의 각도를 30도로 기울이고
있다. 일반 머그잔이 아닌 특수한 모양을 지닌 머그잔을 만날 때도
있다. 이를 테면 다른 머그장보다 조금 무겁게 제작한 점토 머그잔 같은
경우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어떤 잔에서든 뜨거운 물이 넘치더라도
계수대 안쪽에서 떨어지고 있다. 비단 우리 집이 아니어도 뜨거운 커피를 달
수 있다. 환경이나 구조가 달라서 괜에 불안한가?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미 나는 숙련된 기능이니다.
일머리의 순서를 지키며 차분하게 임하면 다 괜찮다. 이제는 완벽한
바리스타이어서 애초에 먹그잔의 무게를 가음하지 않아도 된다. 물컵도 좋고
밥공기도 좋고 예쁜 커피잔도 괜찮다. 손으로 만져 보면 대충 그 잔이
담아낼 물의 양이 องค์된다. 그러므로 조금씩 기울인 컵에서 뜨거운
물이 넘쳐도 안전하다. 또 중요한 한 가지 커피 맛인데 각기 모양을 다르게
제작한 머잔이라도 괜찮다. 대충 30도 기준이면 커피 농도에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먹그잔이 아니라 조금 작은듯한 패션
디자인 커피잔들은 조재에 대한 대접법이 다를 수 있다. 아니 달라야
한다. 무게감이 있는 뭐그저 안에 원통력 모양이 아니라 하부가 좁고
손잡이도 작고 입술이 닿는 원형이 하부보다 넓고 커서 뜨거운 물을 흘릴
가능성이 높음으로 일정 부분 매뉴얼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물론 각도도
마찬가지이다. 머그잔을 기울이는 각도가 30도이니까 그보다는 작은
15도 정도가 적당하다. 나는 커피를 탈 때마다 세상 속 여러
각도를 생각한다. 자존감을 지키려고 기울인 내 삶의 농도를 생각한다.
날이 선 세상과 정면으로 맞선 내 각도를 생각한다. 꺾일 때마다 생긴
삶의 모서리를 어루 만지듯 언제나 물이 끓는 소리를 가슴으로 품고
일어난다. 혼자 커피 한 잔을 탈 수 없었을 무렵이었다.
커피 포트가 내 속 대신 터질 것 같은 물 끊는 소리를들은 적이 있다.
넘쳐 흘러 싱크대에 떨어지는 뜨거운 물소리를들은
적이 있다. 입술에 머그자니 닿기도 전 뜨거운 향기가 부정적인 내 정신을
흔든 적이 있다. 끝내 예각을 제시하며 내 달팽이관을 깨끗이 씻어
준 건 저 뜨거운 물소리였다. 나는 잠시도 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
언제나 머그 전에 수평을 잡듯 내 몸의 균형을 소리로 잡아야 한다.
물은 끌어오르는 비등점만큼 다시 제자리를 잡는 고유의 수평을
가지고 있다. 테이블도 제 각도를 수평으로 유지하고 있다. 내 머그잔도
수평을 잡고 식탁 위에 올라온다. 오른손에든 커피 포트도 수평을 잡으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식탁 위에 커피통을 잡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커피 알갱이 한 스푼을 먹을 자에 넣는다. 그다음은 티스푼을 오른쪽으로
졌든 왼쪽으로 졌든 네모 졌든 그게 무슨 상관일이야?
커피 알갱이가 녹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내 커피 알갱이 한 스푼과 물의 양을
조절하는 머그잔의 각도가 30도이니까 간혹 손님이 오시면 기호에 따라서
컵을 제시하고 농도의 조절을 커피 알갱이 양으로 맞추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일회용 커피만 있을 때가 있가? 그때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머그잔에 물이 적게 남도록 머그잔을 더 깊숙히 기울이면 되는
일이다. 연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머그잔을 30도보다
덜 기울이면 되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극한 내 삶의 농도를 담은
뜨거운 커피를 탄다. 손가락 하나 데이지 않고 펄펄 끊는 물에 거피를
탄다. 이게 단순한 세상 사학 기술 같지만 아니다. 느닷없이 두 눈 잃고
수시로 손을 대며 터득한 나만의 겉빛하는 법이다.
[음악] 안녕하세요. 책 읽어 드리는 집사
책을 접으며
백종한입니다. 오늘은 시각 장애인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손병걸 시인의 첫 산문집 내
커피에 적당한 농도는 30도이었습니다.
허영만 시인은 시각 장애인 손병걸 씨는 상상력과 문필력으로 우리
시인단에 잘 알려진 시인이다. 이번 산문집은 우리의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손병거 시인의 삶과 문학 정신이 고스란이 담겨 있어 읽는 내내
그 감동을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고 평했습니다.
여러분 백종환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셨습니다. 어떠하셨는지요?
허영만 시인과 같은 공감으로 감동도 받으셨는지요?
선병걸 시인은 1967년 강원도 동해에서 되어 2005년
부산일보 신춘회에 시가 당선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병거시는 1997년 두 눈을 실명한 이후 장작과 학업에
몰입하여 경의 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의 창작과 석사하기를 마쳤고요. 민들의
문학상을 비롯하여 중봉조헌 문학상, 장애인 문화 대상
국무총리상, 전국 장애인 근로문화제 C부분 국회의장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푸른 신호등 나는 열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등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곧 빠른 시일 내에 손병걸 시님의 시집 낭독을
기대하며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오늘은 시각장애인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손병걸 시인의 첫 산문집, 『내 커피의 적당한 농도는 30도』입니다. 손병걸 시인은 상상력과 문필력으로 우리 시단에 잘 알려진 시인이다. 이번 산문집은 우리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손병걸 시인의 삶과 문학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내내 그 감동을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고 평했습니다. 손병걸 시인은 1967년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병결 시인은 1997년 두 눈을 실명한 이후 창작과 학업에 몰입하여 경희사어버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석사학위를 마쳤습니다. 민들레문학상을 비롯하여 중봉조헌문학상, 장애인문화대상 국무총리상, 전국장애인근로문화제 시부문 국회의장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등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곧 빠른 시일내 손병걸 시인님의 시집, 낭독을 기대하며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제목 : 내 커피의 적당한 농도는 30도
저자 : 손병걸
출판사 : 도서출판 작가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