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녕하세요. 저는 박소희입니다. 서울에 살고요. 연극을 합니다.” 내가 자기소개를 어떻게 했었더라. 살면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최대한 튀지 않게 보편적인 방식을 선택해 묻어가는 자리이기도 했다. 사실상 소개하고 있지만, 소개되지 않는 걸 바랐던 순간도 많다. 그만큼 나를 소개한다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난·잡·한 자기소개〉는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에서 활동하는 5명의 발달장애인(나영, 냐옹, 차니, 마카롱, 피아노) 예술가와 공연예술창작터 수다의 배우들, 현대미술가 화사가 함께 만든 미디어 오페라이다. 5명의 예술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자기를 소개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영은 관객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춘다. 냐옹은 유퀴즈에 출연하여 관객에게 자기의 꿈과 일상을 소개한다. 차니는 유튜브를 통해 자기 일상을 보여주고 공연이 끝난 후 직접 구운 쿠키를 관객에게 나눠준다. 마카롱은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어 관객과 함께 대사를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는 관객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피아노를 치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한다. 이들은 왜 자기소개를 하게 됐을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이 만난다. 나를 소개하고 간단히 인사를 한 후 헤어진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는 사이가 된다. 자기소개를 한다는 것은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어색할 순 있지만 서로를 외면할 수 없는, 얼굴을 마주하면 웃음 짓는 사이가 된다. 나는 종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게 뭘까 고민한다. 〈난·잡·한 자기소개〉를 본 후 내린 결론은 ‘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이란 이름으로 범주화되어 묶여있는 것을 풀어내고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나아가 한 사람을 진득이 알아볼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면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기소개를 하며 한 사람을 바라보고 알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나를 드러낸다는 일상적인 것에 예술을 더하니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힘이 생긴다. 나영의 화풍을 함께 공유하고, 냐옹이 사자보단 호랑이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게 되며, 차니의 쿠키 만드는 과정을 보며 군침을 흘린다. 그리고 마카롱의 내밀한 속마음을 대신 발화하며 그의 고민을 생각해 보고, 이름이 피아노인 만큼 피아노의 연주 솜씨를 기대하며 음악에 심취해 본다. 자기소개가 없었다면 알 수 없던 것들을 알아가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 안으로 녹아드는 과정은 모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발달장애예술가와 비장애예술가가 공동창작으로 만든 〈난·잡·한 자기소개〉에는 예술가 개인의 습관과 방식이 여실히 묻어있다. 공연을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개인 맞춤 창작 방식은 공연을 보는 사람에게도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관객은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중간에 극장 밖으로 나가는 것도,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것도, 배우와 함께 듀엣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도 모두 다 가능하다. 이 모든 순간 놀라는 사람도, 행동을 말리는 사람도 없다. 장애인 예술가의 개인 맞춤 창작 방식은 배리어프리나 접근성을 따로 제안하지 않아도 당연히,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너 내 길동무가 돼라
무대 뒤편엔 공연을 함께 만든 사람들의 몸을 본떠 좋아하는 것을 쓰고 그린 그림이 설치되어 있다. 관객석을 길게 둘러싸고 있는 이 그림들이 관객의 길동무가 되어준다는 설명을 들었다. 무대에는 자기소개를 하는 5명의 예술가와 ‘길동무’라는 이름의 비장애인 예술가들이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배우로서 무대에 서기도 하고, 묵묵히 바라보기도 하며 현장 속 지지자를 자처한다. 길동무라는 이름처럼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걷는 사람이 되어준다.
문득 ‘무대 위 길동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름이 뭘까?’ 궁금해진다. 〈난·잡·한 자기소개〉에서 비장애예술가들은 발달장애예술가 5인을 지지해 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며 함께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소개는 알 수 없다.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 발달장애예술가의 자기소개에 많은 부분 치중되어 비장애예술가들의 역할이 조력자에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조력하는 역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와 예술가로 만나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으니 더욱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예술가들이 만나 함께 작품을 만들었고,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의 네트워킹으로 관계성 또한 잘 직조되어 있는 만큼 그들의 동등한 예술이 궁금해진다. 우리 모두에게 길동무는 상호보완적이다. 장애예술가의 삶에 비장애예술가가 길동무일 때도, 그 반대로 비장애예술가의 삶에 장애예술가가 길동무일 때도 있을 것이다. 무대 위 어느 것에도 치중되지 않은 목소리는 낯선 누군가의 자기소개를 더욱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 누구든 길동무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것이다.
자기소개가 끝이 나고, 여전히 낯선 사람임은 변하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내적 친밀감이 차오른다. 아마도 공연을 통해 사람을 알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난·잡·한 자기소개〉는 누군가에게 말 그대로 ‘난잡’했을 수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으로 시작하는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의 자기소개는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난잡하면 어떤가. 방법이나 구성이 어떻든 누군가의 삶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 완벽한 자기소개이지 않을까. 집에 가는 길에 차니 님이 준 쿠키를 먹으며 앞으로 나를 소개할 자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즐거움과 나를 소개하는 즐거움을 쿠키의 고소함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난·잡·한 자기소개
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2024.10.19.~10.20|모두예술극장
미디어 오페라 〈난·잡·한 자기소개〉는 발달장애청년 5명의 옴니버스 예술극이다. 공연예술창작터 수다의 배우들, 여성주의현대미술가 화사와 함께 봄부터 극과 퍼포먼스를 준비해 온 이들은 난잡하고 자유롭게 얽혀있는 자기소개를 한다. 2022년 사부작의 청년예술가와 뉴미디어 아티스트 노드 트리는 ‘캠씨(CAMSEE)’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미디어를 매개로 직관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으로 극을 만들고 소통하면서, 발달장애예술가들이 명명한 ‘미디어 오페라’라는 이름을 가진 새로운 장르의 극이 탄생했다. 이후 발달장애예술가와 다양한 분야의 비장애예술가의 협력으로 〈오리마을 대모험〉, 〈메마른 땅 위의 동물왕국〉 등의 극을 만들고 공연해왔다.
박소희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가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말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예술을 한다. 주요 작품으로 〈누구야오늘놀기딱좋아쉴게맥주먹자(feat.결혼하고싶어)〉 〈함께 살아가기 프로젝트: ㅅㅅㅅㅅ〉 〈언니의 언니의 언니〉가 있다.
sohee1122@naver.com
∙ 인스타그램 @p_thgml
사진 제공.발달장애청년허브 사부작
2024년 12월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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