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터뷰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잠시 후 김보라 작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우리는 같은 부천에 산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묘하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그의 시력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나와는 다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건 내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읽고 표현하는 동시대의 예술가였다. 그의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감각일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궁금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 ‘시각예술’을 선택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졌다.
김보라 작가
첫 개인전에서 “저는 저시력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 말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작가님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생각했어요. 또, 전시를 만드는 일을 하는 저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상태 자체가 큰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작가님은 그 순간을 선언처럼 내뱉으셨더군요. 어떤 마음이었나요?
작업 밖에서 제 눈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상태를 먼저 드러내지 않고 지냈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그건 굉장히 조심스럽고 꺼내기 힘든 주제였거든요. 그런데 이번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저는 저시력자입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나니, 좀 홀가분해졌던 것도 같고, 제 표현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빙빙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장치를 통해서 드러내려 했다면, 이번에는 훨씬 직접적으로, 더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작업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에게도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기억의 지도〉 같은 작업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친구는 보인다고 했는데, 나는 보이지 않았다”라는 내레이션을 들을 때 마음이 먹먹해졌어요. 그런 경험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아난 걸까요?
어릴 때 한쪽 눈 시력을 잠시 잃은 적이 있었어요. 유치원 때였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그랬던 것 같아요. 친구가 제 한쪽 눈을 가리고 “저기 저거 보여?”라고 물었는데, 제게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날 하루의 일이었지만, 어린 저에게는 나에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꽤 두려웠던 시절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기억의 지도에도 그 장소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늘 ‘내가 본 세계와 남이 본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안고 살아왔어요. 〈기억의 지도〉는 그 경험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입니다. 눈을 감고 손끝으로 공간을 더듬으며 그려낸 지도는 단순히 지형을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 기억이 뒤얽혀 만들어진 풍경에 가깝습니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것,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었어요. 제 안의 훨씬 다층적이고 풍부한 세계를 열 수 있던 계기였고요.
작업에서 중요한 축인 ‘지도’는 건축을 전공한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건축이 지금의 지도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건축을 공부하면서 공간을 도면으로 이해하고 설계하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시력으로 살아가면서 제가 경험하는 공간은 그런 도면과 달랐어요. 보이지 않는 부분은 기억이나 촉각뿐 아니라, 청각, 지식과 직관, 몸의 경험, 상상까지 동원해야 알 수 있었습니다. 중심 시력으로만 살아가다 보니 저에게 사각지대가 되는 영역을 인지하려면 공간지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기억과 다양한 감각이 함께 재빨리 작동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리는 지도는 단순히 지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감각과 경험이 겹친 공간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건축이 제게 구조와 질서를 보는 눈을 주었다면, 저의 시각적 한계는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조합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기억의 지도〉는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개인전 제목이 《터치투어 마음씨(Mind Seed)》였습니다. 저는 마음씨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초록초록한 싹이 돋아나는 느낌이었어요. 아주 오래 알던 지인처럼 작가님이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음씨라는 제목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이번 전시에서는 언어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시각’이라는 단어 대신 ‘시선’을, ‘형용사’ 대신 ‘느낌의 언어’를 쓰려고 했어요. 그러자 작업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보송보송, 말랑말랑 같은 단어들이 제 손끝에서 흘러나왔어요. 그 과정에서 ‘마음씨’라는 말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씨는 저에게 씨앗 같은 단어였습니다. 두려움과 예측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태도, 긴장을 풀고 조금 더 편안히 걸어가는 법을 담고 있죠. 영어로는 ‘Mind Seed’라고 옮겼는데, 마음과 마인드, 씨앗과 씨드 사이의 간극조차 제 작업에 중요했습니다. 언어의 미묘한 차이가 곧 감각의 차이였거든요.
김보라 작가
《터치투어 마음씨》에서 ‘전철역부터 전시장까지 함께 걷기’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셨는데요. 이 퍼포먼스는 작업에서 관객과 함께 감각을 나누는 시간이 단순한 부차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작업의 중요한 축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관객의 참여는 어떤 의미인가요?
《터치투어 마음씨》에서 전철역부터 전시장까지 함께 걷는 퍼포먼스를 했을 때, 3주 동안 30명 넘게 참여했어요. 거의 매일 예약이 가득 찰 만큼 반응이 뜨거웠답니다. 그런데 제게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서사였습니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이름, 만나고 싶은 장소, 시간대를 적어내고, 저는 그에 맞춰 그룹을 구성했어요. 많을 때는 일곱 명, 적을 때는 1대1로 걷기도 했습니다. 각자 걷고 싶은 방식을 적어내면 그것이 곧 퍼포먼스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눈을 감고 걷기’를 선택했고, 또 다른 분은 ‘관찰하며 걷기’를 택해 15분 거리를 무려 한 시간 동안 구석구석 살펴보며 걸었죠. 한 참여자는 무용을 전공한 배우였는데 ‘이인삼각 걷기’를 요청했어요. 저는 끈 대신 줄자를 사용해 서로의 거리를 재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함께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관객의 참여는 단순히 프로그램을 보조하는 요소가 아니라, 작업의 본질적인 일부입니다. 걷기의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관객을 감상자가 아니라 작업을 함께 빚어내는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참여가 있어야 제 작업이 비로소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전 작업은 광학 장치, 필름 프로젝터 같은 요소들이 많이 보였어요. 저는 그때의 작업이 ‘머리와 말’이었다면 지금은 ‘마음씨’로 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제 시야가 좁아지는 경험을 어떻게든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계 장치, 광학 장비에 집착했죠. 하지만 지금은 분석보다는 감각을, 논리보다는 관계와 신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제 작업이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디오 초대장’도 그런 변화의 연장선 같아요. 저는 작품 설명보다 훨씬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오디오 초대장’은 말 그대로 ‘초대장’이었어요. 실제로 세 가지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제작 과정부터 작곡가와 협업했는데, 그는 음악을 만들고 저는 시를 썼죠. 워크숍 하루 전날 참여하기로 한 분들께 초대장을 직접 보냈습니다. 첫 번째 초대장은 가이드에 가까웠어요. “눈을 감아보세요, 천천히 걸어보세요” 같은 문구가 들어간, 퍼포먼스를 유도하는 스코어적인 초대장이었죠. 두 번째는 조금 달랐습니다. 단순한 지시나 안내문이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와 참여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오기를 바라는지를 담은 문학적인 시 형식의 초대장이 되었어요. 그때부터 제 안에서 변화가 시작됐던 것 같아요. 세 번째는 그 두 가지를 섞은 형태였습니다. 안내와 제안, 그리고 시적인 감각이 함께 담긴 초대장이었죠.
작가님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지만, 요즘 미술계에서 ‘접근성’은 빠질 수 없는 화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접근성 논의가 종종 형식에만 머문다고 느낍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뉴얼대로 다 갖췄다고 접근성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건 진정성과 관계성입니다. 점자 안내문이나 오디오 장치가 아무리 잘 마련돼 있어도 그것을 함께 매개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없죠. 반대로, 작은 태도와 배려는 어떤 장치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접근성이란 결국 관계의 문제이고, 태도의 문제예요. 저는 고정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성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계속 실험하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작업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은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예술을 통해 저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 만나는 방식을 새롭게 배웠어요. 그것이 제가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저는 몸의 불리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키워내는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토양 위에 지도를 그리고, 씨앗을 심으며, 앞으로도 계속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작업 속에서 그 답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은 여전히 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던 오후였다.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이어간 대화 속에는 북받치는 감정과 웃음, 서운함과 눈물, 그리고 공감이 교차하면서 그의 말처럼 ‘보송보송’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김보라의 예술이라는 씨앗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은 듯했다. 그의 예술은 감각과 감각을 이어주고 관계와 신뢰를 자라나게 한다. 저시력이라는 조건이 한계나 결핍이 아니라 충만일 수도 있음을, 그는 여리면서도 단단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름을 확인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서로 다른 감각이 만나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그의 마음씨가 만들어낸 새로운 지도 위를 잠시 여행하고 온 느낌이 들었다. 그 지도는 익숙한 길을 따라가면서도 전혀 새로운 세계로 열려 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감각들은 다시 내 안의 씨앗이 되어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김보라 〈기억의 지도〉 지점토, 젯소, 설탕, 캔버스, 38×36×3cm, 2017 (사진. 김보라)
김보라 〈오디오 초대장3-저시력자의 마음씨〉 스피커, 흰 스티커 시트지, 4분 17초, 2025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사진 이동웅)
김보라 〈섬마을〉 중 일부. 워크숍 및 결과물 설치, 지점토, 다양한 지도 판, 스피커, 가변적 크기, 2025
(왼쪽) 사진 이수연, (오른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사진 이동웅

김보라
인천대학교에서 도시설계를, 파리-세르쥐 국공립예술학교에서 순수예술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다양한 단체전과 퍼포먼스 페스티벌에서 작가, 퍼포머로 참여했다. 장애인극단 ‘떼아뜨르 뒤 크리스탈(Theatre du Cristal)’에서 무대미술 작가로 일하며 워크숍을 진행했다. 2023년에는 벨기에의 소리와 빛 중심 공연단 ‘뉴폴리포니스(Newpolyphonies)’에서 시각작가, 퍼포머로서 다수의 공연에 함께했다. 2024년 한국에 정착했고, 오다솜 작가와 함께 워크숍 중심 포용적 예술 전시-공연을 만들기 위한 단체 ‘둥지’를 설립했다.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 프로그램으로 개인전 《터치투어 마음씨》를 진행하며 ‘터치투어’를 주제로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감각의 미술 감상법을 제안했다.
kimbora9563@gmail.com

신보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동시대 예술과 사회적 현장을 연결하는 융복합 기획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특히 중구장애인복지관과 함께한 ‘드림 블라썸 아카데미’를 통해 발달장애·자폐인들과 장기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또한 시각장애 관객을 위한 감각 기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등 예술의 접근성과 포용성을 확장하는 데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nathalie.boseulshin@gmail.com
사진. 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자료사진 제공. 김보라,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2025년 9월 (67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