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 눈물 머금은 눈, 나의 눈을 보라.
그 극단적인 몸짓을 보라.
내 눈과 기억의 싸움을 이해하라.”
나는 나의 기억을 더듬어 내가 본 것에 대해 말한다. 아니, 내 눈을 통해 본 것, 보지 못한 것, 볼 수 없었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 나의 기억을 기억한다. 힐다가 무대 중앙에 남겨졌을 때, 푸른빛도 아니고 연보랏빛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차갑고 부드러운 빛이 그의 뒤에서 가볍게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녀가 어둠을 향해 손짓하며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모든 불을 끄고 극장으로 돌아오라는 그의 제안을 따라 눈을 감고 다른 감각을 연다. 그러자 조금씩 공간을 점령해 오는 소리의 파동, 공기의 진동이 나의 살갗에 와 닿는 것을 알아챈다. 그녀를 통과한 빛의 알갱이들은 나의 홍채가 아니라 손등과 얼굴, 목젖 근처의 살갗 배냇솜털 사이를 통과한다. 나는 기억한다. 안데스의 하양이 무대에 솜털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며 내려오던 순간을. ‘미친 산맥이 다가오는’ 그 더없는 하양 사이를 거닐며 힐다와 에바나는 손끝으로 하양을 읽는다. 마치 점자를 읽듯이. 그들은 하양을 손끝으로 두드리고, 문지르고, 압축하고, 공처럼 둥글게 만들어 던지고, 입에 넣어 깨물고, 혀 위에 올려 녹여 본다. 녹은 하양은 떨어진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끝없이 떨어진다. 부풀어 오르는 물결처럼 무대 위 하양은 점점 더없이 하얘진다. 내 눈이 기억하는 하양은 안데스에서 불어오는 바람 뒤의 새벽 같은 투명함이다. 그 하양이 바람의 지평선에서 불어오는 파도는 아니었을까.
‘내게 빨강은 피이자 사랑이야. 내가 배운 빨강은 하나의 감정이고, 촉각이고, 냄새야.’ 힐다의 목소리와 함께 빛나던 빛을 기억한다. 무대 중앙 뒤 객석을 향한 조명기에서 나오는 빛은 빨강에서 보라로 서서히 파장을 바꾸다가 어느새 연둣빛으로 다시 변했다. 극장의 공기 분자들과 부딪혀 산란된 연둣빛 입자들이 내 눈에 이르기 전이라도 나는 그것을 연둣빛으로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떤 냄새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촉감으로 내게 왔던 것일까. 빨간 토마토와 초록 토마토의 맛이 다르고 노랑 스웨터와 파란 스웨터의 촉감이 다른 것처럼, 그 연둣빛은 숲의 짙은 초록보다 더 부드럽고 어린잎처럼 귀여웠다고 나는 기억한다.
에바나가 허공에서 받아 든 무거운 덩이를 힐다에게 건네는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에바나는 이야기한다. ‘눈은 왕이고, 질서를 만들고, 모든 것을 아는 신이다. 보는 눈은 주체가 되고 훼손된 눈은 보는 것을 제거당한 채 보지 못하는 객체가 된다.’ 신을 믿지 않는 힐다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두 손에 받아 든 권력의 이미지를 응시한다. 천천히 빈 덩이를 내려놓고 힐다는 자신의 빈손을 바라본다. 손이 하늘로 뻗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손과 팔이 서로를 스치며 움직인다. 훼손된 힐다의 눈은 그 몸짓을 계속 따라간다. 힐다와 나란히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는 에바나. 그 둘은 전복된 주체이면서 객체들이다. 보이지 않는 눈이 보는 눈을 이끄는 세계.
무대 중앙에 안개처럼 뿌연 막을 사이에 두고 힐다와 에바나가 마주 보고 있던 순간을 기억한다. 힐다가 묻는다. ‘너의 파랑은 어때?’ 에바나가 대답한다. ‘파랑은 아주 멀고 깊은 세계에 있어.’ 나는 생각한다. 나의 파랑은 어떤가. 맨몸으로 어렵게 도달한 20미터 바닷속 고독만큼 아득한가. 아니면 힐다의 하늘처럼 빽빽하고, 끈적하고, 무한한가. 투명한 물이 두텁고 깊어지면서 더 많은 파랑을 품을 수 있는 것처럼 파랑은 덧없는 것일까. 혹은 하늘과 물이 맞닿는 깊은 곳의 파랑처럼 외롭고 쓸쓸할까. 또 다른 안개 막이 무대와 객석 사이로 내려앉고 둘은 그 사이에 서서 마주 본다. 포옹한다. 서로 손을 맞대고 서서 작게 웃는다. 리듬에 맞는 걸음을 걷기 시작하자 그것은 춤이 된다. (결국 힐다는 춤을 추게 되었다) 푸른빛이 점점 밝아져 더 많은 색을 품게 될수록, 그래서 무대가 온통 하양으로 뒤덮이면서 힐다와 에바나의 형체가 희미해져 갔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겹겹이 영상과 빛이 중첩되고 사운드도 더 많은 층위로 쌓인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진동하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경험한다.
공연이 주는 경험은 매우 시적이어서 감각이 다층적으로 작동했다고 기억한다. 뿌연 엔딩만큼이나 감동은 한동안 안개 속에 남겨진다. 그리고 다층적 층위 사이에서 피어난 맥락 없는 것 같은 사유는 더 깊이 내 피부 안으로 스며들고, 그 층위들 사이에 ‘훼손된(mutilated)’ 칠레 시위대의 눈동자들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 안에 남은 것은, 보는 것을 박탈당한, 힘을 가진 자들의 폭력에 의해 훼손당한 모든 객체를 위로하고 기억하려는, 조용하지만 찬란한 노래. 스러져 간 ‘그 극단적인 몸짓’. ‘눈물 머금은 눈’으로 기억과 싸우려는 그 눈동자들.

라스트 호프
콜렉티보 쿠에르포 수르|2025.11.14.~11.16.|모두예술극장
시각을 잃거나 잃어버리는 이들과 함께 청각, 후각, 직관을 통해 어떻게 현실을 인지하는지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제안하는 연극이다. 시각장애인이자 아마추어 배우 힐다 스닙페와 퍼포머 에바나 가린은 이미지가 과잉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 가진 감각, 기억, 신체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경험의 지도를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색깔과 풍경이라는 시각적 우위의 세계를 시각장애인의 풍부한 감각적인 묘사로 그려보이며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 감각의 다중성,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배요섭
리서치그룹 궁리소묻다 대표. 강원도 화천의 ‘예술텃밭’이라는 예술가 레지던시 공간을 일구며 소소하게 예술적인 연구와 작업을 하는 사람. 몸으로 글을 쓰고, 움직이고,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jodokjodok@gmail.com
∙ 궁리소묻다 인스타그램 @muddha101
사진 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모두예술극장
2025년 12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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